Chapter 65
해가 중천에 떠서야 소희는 마련된 숙소로 돌아왔다.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고민이 한껏 묻어서 무겁고 느릿했다.
머릿속은 온통 조슈아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그의 행동에서부터 현실성 없는 기묘한 꿈까지. 널 미워하게 해 달라고 절절하게 말하던 언성이 귓전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사실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은 소희는 느릿한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오늘이 황궁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블루앙 래비의 행방은 영영 알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소희는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다시 무도회장으로 향할 작정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하여 방문의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안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피어슨 가문에서 붙여 준 사용인들의 목소리였다.
“피어슨 부부가 독하기도 하지. 어떻게 매번 딸을 팔 생각을 하는지 몰라.”
“황태자와 결혼식을 올릴 때도 아리아드가 죽어도 싫다고 무릎 꿇어 빌던 걸 억지로 보내 놨으니, 난 언젠가 아리아드가 그렇게 도망가도 이상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말이야. 그래서 이번엔 부부가 방법을 좀 바꿨나 봐. 가문이 망한 걸 아리아드의 탓으로 돌리면 죄책감에 자기들 뜻대로 움직이기 쉬울 테니까. 저번에 피어슨 부인이 아리아드를 안고 다독이는데 난 이게 예전이랑 같은 사람이 맞나 싶더라니까.”
“근데 아이는 어디로 갔냐고 했을 때 죽었다고 대답하니까 슬쩍 웃는 거 봤어? 난 진짜 소름이 다 돋더라.”
“설마 아이가 있으면 재혼하기 힘드니까 그걸 확인하려는 거였어?”
“그렇지, 뭐. 피어슨 부인이 진짜 딸 걱정을 해서 그걸 물었겠어.”
문고리를 잡아 내렸다가 소희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갈색 문을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기다렸다는 듯이 찰스 엔드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불길한 예감은 슬프게도 항상 이렇게 정확하게 적중했다.
생각해 보면 소희가 황태자비로 있던 시절에도 그들은 단 한 순간도 딸을 보러 찾아온 적이 없었다. 비앙카가 투자금을 회수해서 위기에 놓이자 아리아드에게 부탁하러 찾아온 단 한 번을 빼고는 말이다.
그 부분만 생각해 보면 간단히 답이 나오는 문제인 것을. 소희는 찝찝함을 알고서도 피어슨 부인의 다정함에 속아 넘어갔다.
‘아리아드, 내 아가.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온 거야.’
그 온화한 목소리가 연기였단 말이지.
아이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던 제 모습이 떠오르자 헛웃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이의 부재에 기뻐하던 상대는, 그 앞에서 울고 있는 자신을 보고 얼마나 웃겼을까.
분명 제 부모가 아닌 아리아드의 부모니 자신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상처받을 일이 없다고 여겼는데. 이상하게도 소희는 기분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걸 느꼈다.
“현실이나 소설이나 개판이구만.”
어쩌면 소희는 소설 밖에서 채우지 못했던 부모에 대한 사랑을 원했던 것도 같다. 그러니 다소 배신감이 느껴지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내 툭툭 털어 버렸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부채 의식을 이제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결국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찰스 엔드로와 이어 주기 위해 노골적으로 감시하는 피어슨 가문의 시선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 * *
무도회장에 도착한 소희는 찰스 엔드로의 수족으로 인해 어딘가로 끌려 들어갔다. 무도회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에서 살짝 떨어진 구석진 방이었다.
희미하게 흘러들어오는 악단의 연주를 눈을 감고 음미하고 있던 찰스는 아리아드의 등장에 눈을 떴다.
녹안이 오늘도 여전히 느끼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성분들이 이런 걸 좋아한다는데.”
찰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 접시를 소희의 앞으로 가볍게 밀어 주었다. 소희는 예의상 한 번 웃어 주고는 접시 위에 놓인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물론 좋아하는 것이 확실했지만, 입안에 구겨 넣으니 이상하게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텁텁하기만 할 뿐이었다.
노골적으로 전신을 샅샅이 훑는 저 뱀을 닮은 눈 때문인가.
찰스는 눈이 마주치자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동그랗게 말아 둔 종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희가 앉아 있는 곳은 기다란 빨간색 벨벳 소파였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찰스도 갑작스레 가까워지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심지어는 아주 몸을 찰싹 붙였다.
그는 그 앞에 종이를 펼쳐서 보여 주었다. 그가 입을 열자 옆에서 습한 숨결이 진득하게 따라왔다.
“예전에 그렸던 그림이에요. 레이디에게 주고 싶어서 간직하고 있었어요.”
다섯 장의 그림은 하나같이 불쾌했다. 전에 봤던 것과 같이 모두 다 아리아드의 알몸을 담고 있었다. 포즈만 조금씩 바뀐 것이 아리아드의 몽롱하게 풀린 뇌쇄적인 표정은 여전했다.
이미 한 번 보았던 것이라도 익숙해질 리는 없었다. 소희는 따뜻한 실내에서 홀로 한파를 겪는 사람처럼 전신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욱 진저리나게 싫은 것은 이 그림을 그린 당사자가 바로 옆에 붙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소희의 기분을 알 리 없는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레이디가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정말 열심히 그렸거든요. 아리아드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관찰했죠.”
“…관찰이요?”
“레이디가 밤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소리를 내는지, 또 어떤 행동을 하는지. 열심히 지켜보고 그림에 녹여 냈어요.”
그 말과 함께 찰스는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소희는 잠시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되질 않아 문장을 곱씹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그림들이… 제가 다른 남자들이랑 관계하는 걸 관찰해서 그렸다는 말인가요?”
“정확해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선선하게 대꾸하는 낯에 소희는 그 앞에서 욕을 뱉을 뻔했다.
미친놈.
목 끝에서 겨우 삼켜 낸 욕설이 계속해서 툭툭 튀어나오려고 했다.
이로써 소희가 느꼈던 모든 의문이 풀렸다. 눈 높은 아리아드가 하필이면 찰스 엔드로랑 몸을 섞어서 그 뒷감당은 자신이 해야 하는 현실에 상당한 원망을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리아드는 그냥 변태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가련한 캐릭터였을 뿐.
찰스가 손등으로 소희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내 그 손길이 점차 밑을 향했다.
소희는 종교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속으로 염불과 주기도문을 읊었다. 버텨야 했다. 찰스 엔드로가 없다면 황궁에 들어올 자격조차 없는 아리아드의 신세를 생각해서라도 버텨 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끈적한 손길이 목을 타고 내려와 가슴에 닿았을 때. 소희는 머리에 있는 신경 하나가 뚝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진짜 왜 자꾸 만지고 지랄이야.”
입을 맞추려고 다가오던 찰스의 움직임이 멈칫 세워졌다.
“네? 지금 뭐라고….”
그리 의문을 가지면서도 아리아드의 살결을 주물럭거리는 손길은 여전했다. 소희는 더는 참지 못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악!”
외마디 비명이 이어졌다. 찰스는 얻어맞은 코를 부여잡고 소파 위를 굴렀다.
소희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보리색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뛰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구두 한 짝을 잃어버린 건지 한참을 맞지 않는 눈높이에 절뚝이다가 결국 다른 한쪽도 벗어서 던져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냉정히 꿰뚫고 있었다.
엔드로 가문은 힘이 막강했고, 피어슨 가문은 그곳에 아리아드를 팔아 적자를 메우고자 했다. 그런 처지에서 아양을 떨어도 모자랄 판에 엔드로 가문의 아들에게 주먹을 날렸다.
찰스가 화가 나 아리아드를 잡아서 지금 당장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그곳에서 자신을 구제해 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일단 도망가는 것이 살길이었다.
주먹은 충동적으로 날리긴 했어도 소희는 뒷일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두 다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따스한 바람결에 보랏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두 다리가 점차 무거워지고 맨발이 아려 오는 고통을 느낄 때쯤이었다.
소희의 두 눈에 익숙한 호수가 펼쳐졌다. 그 앞쪽에 커다란 별채가 있었다. 낮에 보니 조금 낯설긴 했지만, 분명 조슈아와 불꽃놀이를 봤던 그 호수였다.
그 앞에서 무릎을 붙잡고 숨을 고르던 소희는 잔디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호수의 물비늘을 가만히 응시하며 상념에 빠졌다.
소설 초반에는 제 뜻대로 이야기가 참 쉽게만 흘러가고 있다고 여겼다. 모든 게 참 쉽기만 했는데, 어느덧 아리아드의 인생은 전부 다 엉망으로 엉켜 버렸다.
소희가 해야 할 것은 블루앙 래비를 잡고, 아리아드의 위치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엇 하나 쉽게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자신이 짜 놓지 않은 설정 속에 덩그러니 놓여 당장 내일의 일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갖은 생각 끝에 소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은 여전히 깊어 보이는 호수에 고정한 채였다.
“안 되겠다. 소설 내용을 봐야겠어.”
죽음의 고통은 여전히 무서웠지만, 딱히 좋은 수가 생각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찰스 엔드로를 무작정 때리고 와서 그런지 더욱이 망망대해에 몸 하나만 둥둥 떠 있는 막막한 기분이었다.
소설을 읽으면 찰스 엔드로를 피하고 아리아드의 자리를 지킬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소희는 어차피 물에 잠겨 죽을 작정이면서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사실은 막상 빠지려니 두려움에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었다.
뒤편에서 처음 듣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뭐 하세요?”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소희는 뒤를 돌아봤다. 화려한 연금발에 그보다 연한 눈 색을 가진 남자였다.
소희가 오기 전부터 잔디에 앉아 호수를 구경하던 브릭스는 갑자기 나타나 온몸을 열심히 푸는 그녀를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 준비 운동이요.”
“무슨 준비요?”
“뛰어내릴 준비요. 제가 물놀이를 좋아해서.”
물놀이를 좋아하긴 개뿔. 수영은 전혀 못 했다.
소희는 대충 둘러대고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더 이상 남자가 관심을 주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이상한 말을 납득했다는 듯 브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재밌는 분이었네. 그럼 마음껏 즐기세요.”
심지어 공손하게 두 손을 펴 호수를 가리키기까지 했다.
그걸 보며 소희는 익사의 위기에 처한 아리아드의 몸을 이 남자가 지켜보다가 건져 올려 주면 되겠다는 계산까지 끝마쳤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됐다. 소희는 숨을 깊게 몰아쉬고는 호수를 향해 달려 나갔다.
풍덩, 청명한 소리가 호숫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