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
소희가 먼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모순된 제 속마음이 싫어서였다.
본인이 조슈아가 없는 길을 선택해 놓고, 이제 와 그와의 가능성을 재고 있다니. 정말이지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소희는 불쾌한 상념들을 지우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친절하게 대답해 줄 이는 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방금 숲에 들어오기 전에 비명이 들렸는데…. 그 사람은 괜찮겠지?”
그렇게 혼자 작게 중얼거렸는데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메리.”
나직한 목소리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에 소희가 눈이 동그래져서 그와 다시 눈을 맞추었다.
“그 사람이 메리인 건 어떻게 알아?”
“네가 귀청이 찢어지게 불러 댔잖아.”
“아….”
일순 머쓱해진 소희를 두고 그가 뜬금없이 메리의 인적 사항을 읊었다.
“너의 시녀였지. 아마 육 개월 전에 네가 궁을 나가는 걸 도왔을 거고.”
“아, 아니야.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
조슈아가 짧아진 담배를 바닥에 문질러 껐다. 그리고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웃었다.
“그리 기겁할 거 없어. 너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잘리는 일은 없으니까.”
이제 너는 그럴 존재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매우 단호한 언성이었다.
소희는 괜히 의기소침해져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모아 얼굴을 묻었다. 추위는 얇은 드레스를 파고들어 점차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에 몸이 잘게 떨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이렇게 아침까지 어떻게 버티지.
막막한 상황에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희미하게 깜빡이던 불이 수명을 다해 꺼지고야 말았다. 소희는 그나마 그곳에서 붙잡고 있던 안정감이 불빛과 함께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암흑이었다. 어둠 속에서 쓸데없는 상상력이 높아져 갔다.
이곳이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파 둔 덫이라면 오늘 하필 짐승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건지, 이대로 짐승의 밥이 되는 건 아닌지, 갖은 생각들이 머리에 꽉 들어찼다. 그러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짐승의 소리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자신에게 서늘한 시선을 보내는 조슈아의 실루엣이라도 보이면 마음이 놓일 텐데.
“저기 조슈아…. 거기 있는 거 맞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만큼은 칼날 같은 대화라도 좋았다. 하지만 소희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결국 소희는 오만 생각 끝에 부탁했다.
“정말 미안한데… 해가 뜰 때까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어도 될까?”
소희는 그 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으로 갈게.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진짜 너무 무서워서….”
애초에 그의 승낙 같은 건 중요치 않았다. 그 정도로 이 암흑은 견디기 어려웠으니까.
짙은 어둠 속을 걷고 있어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조슈아가 있는 거리가 가늠되지 않아 소희는 그냥 무작정 걷고 봤다.
그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각보다 많은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소희의 발끝에 무언가가 툭 걸리더니 몸이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또 이렇게 넘어지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강고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 이상하게 도착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원하던 바를 이룬 셈이었다.
익숙한 시원한 체취와 담배의 씁쓸한 향이 콧속 깊숙이로 몰려 들어왔다. 가까이에 붙으니 짙은 어둠 속에서도 조슈아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제야 소희는 안도했다.
문득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소희의 왼팔과 오른팔을 감싸 쥐었다.
그에 시선을 내린 소희는 자신의 손이 그제야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탄탄한 근육질 가슴에 정확히 한쪽씩 손바닥을 올린 채였다.
조슈아가 그녀의 팔을 잡아 제 몸에서 떼어 냈다. 딱딱한 목소리가 뒤이었다.
“내려가.”
“아, 응. 미안.”
소희는 머쓱해져서 재빠르게 답하고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가까이에서 나는 향과 가끔씩 작은 움직임에 팔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소희는 다시 무릎을 세워 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여태 그랬듯이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먼저 서두를 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이야기를 꺼내면 질타와 비난만이 이어질까 봐. 둘 사이에 남은 이야기라고는 이제 그런 거밖에 없었으니까.
어깨를 잘게 떨면서도 잠들려고 애썼다. 잠에라도 들면 차라리 이 추운 밤이 빠르게 지나갈 테니까 말이다.
몇 분 뒤, 고요하기만 하던 옆자리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꽤 커다란 인기척에 소희가 빼꼼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이대로면 아침에 둘 다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되겠어.”
나직한 말과 함께 소희의 허리에 다시 손길이 닿았다. 조금 놀라서 눈을 크게 감았다가 떴을 때는 이미 조슈아가 그녀를 들어 올려 제 다리 위로 내린 뒤였다. 바로 앞에서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조슈아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소희의 어깨에 자신의 재킷을 둘러 주는 일에 열중했다.
“한 명이라도 죽어서 시체로 발견되면 난감하니까.”
그런 말을 태연스럽게 한 뒤 두꺼운 두 팔이 등 뒤로 단단하게 감겨 왔다.
“그렇지…. 어쩔 수 없지….”
소희는 당황스러웠지만 괜히 그의 무미건조한 어투를 어설프게 흉내 냈다. 하지만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는 지워 낼 수 없었다.
소희의 두 팔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허공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슈아의 허리 부근 쪽 셔츠를 손으로 살짝 잡았다.
따스한 체온이 온몸을 덮었다. 추위에 잘게 떨려 오던 몸이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단단하고 너른 가슴에 소희는 얼굴을 툭 기댔다. 정수리 위로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있었다.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자 얼마 안 가 잠이 몰려왔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잠들던 그때처럼.
오래간만에 꾼 꿈에는 조슈아가 나왔다.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였고, 그의 오른손은 한참 동안 소희의 다친 무릎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얼마 뒤 그 손이 뺨 위로 올라와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턱에 닿았다. 약한 힘으로 인해 소희의 얼굴이 위로 올라갔다.
혼몽한 시야에 조슈아의 얼굴이 가득히 담겼다. 현실에서의 서슬 푸른 눈빛과는 달리 붉은 눈동자가 한낮의 태양과도 같이 곳곳에 따스함을 남겼다.
“…너를 미워하고 싶어.”
그렇게 남자가 중얼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내려왔다.
따뜻한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그리고 소희의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파고들었다. 꿈속에서 소희는 아득한 부유감에 시달렸다. 그 진득한 입맞춤은 꽤 오랜 시간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가끔씩 떼어지는 틈으로 그는 비슷한 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리길 반복했다.
너를 미워하고 싶어, 미워하게 해 줘.
그 기운 없는 음성은 다소 서글프게 들려왔다. 그러다 다시 입술을 부딪칠 때면 그 염원을 이루지 못하는 본인에게 화를 내듯 끓어오르는 감정을 거칠게 토해 냈다.
미워하고 싶지만 미워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들로부터 비롯된 끈질긴 움직임이었다.
소희는 억누르지 못한 그의 감정들을 피부로 느끼며 달뜬 숨을 뱉었다. 가끔씩 그 농밀한 움직임이 감당할 수 없이 버겁게 느껴지다가도 끝내 지독할 만큼 생경한 감각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그렇게 그 꿈에서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다소 웃기는 생각을 했다. 이 꿈이 영원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 * *
눈을 감고 있는데도 앞에서 따사로운 빛이 느껴졌다. 그러한 빛에 아득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던 찰나였다.
“아리아드 님!”
누군가 위에서 아리아드를 다급히 부르고 있었다. 그에 소희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눈 앞에 펼쳐진 건 생각보다 더 당혹스러운 광경이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수많은 궁궐 사용인들이 그녀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내려 보고 있었다. 이 순간 소희는 제 처지가 동물원의 원숭이 같이 느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다들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소희는 눈을 크게 끔뻑이다가 다급히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뭐야, 왜 나 혼자….”
주변을 둘러보니 조슈아는 없었다. 마치 저 혼자 어디로 쏙 증발한 것처럼.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말이다.
“아리아드 님, 큰일 날 뻔하셨어요. 여기에 곰이라도 같이 떨어졌으면 어쩔 뻔하셨습니까. 대체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아, 숲길을 헤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혹시 여기 저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저희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는데, 아리아드 님 혼자 계셨습니다.”
정말이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이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혼자 떨어졌고 머리를 세게 부딪히면서 조슈아와 함께 있는 꿈을 그때부터 꾼 건 아닐까, 그런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조슈아 특유의 향이 이렇게 코끝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소희는 그 현실이 믿기 어려웠다.
사람들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아리아드를 보고 사용인이 말문을 열었다. 한쪽 손으로는 구덩이의 울퉁불퉁한 벽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번에 또 이런 곳에 빠지시게 되면, 여기 벽면에 박힌 돌멩이를 밟고 올라오시면 됩니다.”
“…돌멩이요?”
“네, 여기 울퉁불퉁한 벽면이 사람만 다닐 수 있게 만들어 둔 통로입니다.”
그 말이 한 번에 이해가 되질 않아 소희는 되물었다.
“여길 그냥 밟고 올라가면 된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시원스럽게 나오는 대답에 소희는 그 벽면을 올려 봤다. 밟기 좋게 돌멩이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다 보니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슈아는 증발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지난밤은 꿈이 아니었다.
‘그러면 낮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해?’
소희는 제 말에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조슈아를 떠올렸다. 이미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소희가 머리를 굴리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전보다 심히 부풀어 오른 입술이 따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