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63화 (63/120)

Chapter 63

자신의 걸음이 이토록 빨랐던 순간이 있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소희는 두 다리를 민첩하게 움직였다. 경보 수준이긴 했지만 뒤를 밟는 사람이 알아챌까 봐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어느덧 사람들의 손이 탄 단정한 길을 벗어난 지는 오래였다. 심지어 등불의 작은 빛 하나에 의지해 무작정 나아가는 발 덕에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제 뒤를 쫓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마음이 더욱 급해진 소희는 기어코 뛰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뒤에서 따라오는 누군가가 무어라 말을 걸어오는 거 같기도 했지만 혼이 빠진 소희의 귀까지 닿지 못했다.

이내 이리저리 엉켜 있는 나무뿌리에 발끝이 닿고서야 소희는 정신없이 움직이던 두 다리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그대로 대자로 뻗어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두 무릎이 아려 왔다. 아무래도 제대로 다친 듯했다.

바로 뒤에서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끈질긴 스토커가 바로 뒤에 있었다.

소희는 순순히 잡혀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엎어진 채로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짧고 굵은 탄식이 들려왔다.

“아리아드, 거긴…!”

뒤이어 시야가 빙글 돌았다. 허공에 몸이 떠오르는 갑작스러운 느낌에 소희는 손에 쥐고 있던 등불을 놓쳤다. 작은 불빛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를 쫓던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와락 감싸 안았다. 다부진 몸에 안겨 소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쿵, 커다란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 엄청난 소리에도 소희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단단히 안고 있는 누군가 덕분이었다.

뒤이어 정신이 조금 돌아오자 소희는 그제야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알아챘다. 익숙한 체취와 몸, 그리고 바닥에 먼저 떨어져 있는 등불에 의해 드러난 익숙한 얼굴.

“…조슈아?”

왜 이 남자가 여기에 있는 건지.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조슈아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잔뜩 구겨진 채였다. 뒤이어 그는 소희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 그 낯에 고통 어린 기색을 지우고 무표정만 남겼다.

“왜, 왜, 여기 있는….”

소희는 말도 제대로 못 잇고 더듬거렸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누군가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고자 했던 이의 정체가 조슈아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 심장을 벌렁거리게 하는 건 묘한 자세 때문이었다.

그녀의 전신이 완벽히 조슈아의 품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지속되는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소희가 입술을 뗐다.

“…안녕.”

머리의 통제를 벗어난 매우 어이없는 인사였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던 게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싸늘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이유가 어찌 됐건 다른 남자와 도망간 전 부인이 나타나 처음 건넨 말이 ‘안녕’이라니. 그의 눈망울이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게 내려앉는 반응이 당연했다.

꽤 오랜 정적 끝에 그가 소희를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장신의 남자가 그 기다란 높이에서 그녀를 내려놨다. 아니, 그대로 내던졌다는 표현이 조금 더 들어맞는 듯했다.

인사를 대신한 꽤 과격한 대꾸였다.

“아야….”

그렇게 아무런 준비 동작도 없이 소희는 돌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따가운 엉덩이를 부여잡자 드레스가 말려 올라갔다. 두꺼운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생긴 무릎의 상처가 드러났다. 아주 몸의 앞뒤로 난리였다.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아 소희는 눈을 비비고 말려 올라간 드레스 자락을 내렸다.

위에서 조슈아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닿는 시선에 소희는 얼굴을 올렸다.

“고마워. 그대로 굴러떨어져 죽을 뻔했네.”

마지막에 자신을 내던지긴 했어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하지만 소희의 감사 인사를 뒤잇는 말이 예상과는 다르게 매우 험악했다.

“그러게. 그냥 그렇게 죽으라고 내버려 둘 걸 그랬어.”

그리 말한 조슈아가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너머로 서슬 푸른 눈빛이 느껴졌다.

가시가 잔뜩 돋친 말에 소희는 당황스러워 절로 헛기침이 나왔다. 그의 눈빛이나 말투가 초반 아리아드를 극도로 싫어할 때 보였던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이러한 냉정함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상상만 하던 것과 직접 눈으로 마주한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소희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침을 삼키어 마른 목을 축였다.

“그나저나, 조슈아 네가 여기는 무슨 일로….”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에 왜 왔는데.”

하긴, 따지고 보면 궁궐의 주인인 황태자가 제 사유지인 숲속에 있는 것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긴 했다. 그보다 이제는 개뿔도 없는 아리아드가 이곳에 숨어든 사실이 당연히 더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하나밖에 없는 정보통인 메리를 찾으러 왔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소희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그들이 있는 깊은 구덩이 속에 풀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한참 뒤에 먼저 서두를 연 것은 조슈아였다.

“아이는?”

그리 말하며 아리아드의 전신을 훑고 내려온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로 올라왔다.

소희는 짧은 탄식과 함께 손톱으로 뺨을 긁었다. 입술이 한참을 벙긋거리는데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뒤이어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 먼저 떠났어.”

또 목소리는 최대한 밝게.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그런 소희를 보고 조슈아도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거렸다. 마주한 낯에서 보이는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래서 돌아왔구나.”

조슈아는 나직한 어투로 그리 단정 지었다.

“방해물인 아이가 없어졌으니, 다시 너의 자리를 찾아 보려고.”

“…그런 게 아니야.”

작게 중얼거리는 소희의 언성이 뒤잇는 건조한 목소리에 묻혔다.

“아리아드, 안타깝게도 이제 너의 자리는 없어.”

“….”

“네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다시 생겨날 일은 없을 거야.”

얼음 파편 같은 말들이 심장으로 와 콕콕 박히자 소희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구겼다.

“바란 적 없어. 그러려고 돌아온 게 아니야.”

“내가 아니면, 이번에는 무도회에 함께 참석한 찰스 엔드로를 노리고 있는 건가.”

첨예한 눈빛과 말투 때문에 만면에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조슈아는 애초에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을 생각조차 없는 거 같았다. 그 정도로 그의 심사는 단단히 뒤틀려 보였다.

“아이가 없어지자마자 이렇게 곧바로 라트베아로 온 것도 놀라워. 네 아이가 참 불쌍하지.”

“그만해.”

날아오는 독설을 참지 못하고 소희는 끝내 한마디를 던졌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입안이 텁텁해졌다.

하지만 조슈아는 멈추지 않고 마지막 직격탄을 날렸다.

“뭐든 참 쉬워서 좋겠어.”

그러자 소희는 꿈속 그의 언성이 그 위로 겹쳐졌다. 눈빛과 말투 그 어떠한 것 하나 바뀌지 않은, 꿈과 다를 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다른 말을 더 덧붙이려다가 소희는 그냥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그의 앞에서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이해받기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아리아드라는 캐릭터를 구제 불능의 쓰레기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제 마음을 이해시키겠다고 이제 와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소희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그의 차가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닥에 자신과 함께 떨어졌던 등불이 보였다.

등은 수명이 거의 다다른 듯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이 작은 빛마저 사라진다면 완전한 어둠이었다. 그러기 전에 이곳을 나가야 했다.

소희는 돌바닥을 손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행동을 지켜보다가 도리어 조슈아는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왜 그러고 앉아? 나갈 방법을 찾아야지.”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희미한 빛이 번져 조슈아의 얼굴에 커다란 음영을 만들어 냈다. 무정해 보이는 낯에 어둠이 깔리자 더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소희는 홀로 나갈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깊은 구덩이의 벽면을 더듬으며 걷다가 제 키의 열 배는 넘어 보이는 입구를 올려 봤다.

나가는 통로가 상당히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며칠 내내 아무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어쩌지.”

소희의 초조한 중얼거림과 반대로 조슈아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 애초에 여긴 야생동물을 잡으려고 파둔 덫이라 낮이 되면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아….”

쌀쌀한 기운에 소희가 두 손으로 팔을 쓸었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나 해가 저문 숲의 추위는 상당했다.

“그러면 낮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해?”

자기 기분에 내키는 대로 질문을 골라 답하는지 조슈아는 또 침묵을 택했다.

소희는 그런 그를 티가 나지 않게 흘겼다. 그리고 그와 거리가 조금 떨어진 맞은편 벽면에 기대앉았다.

곧 꺼질 거 같은 작은 등불에 의지한 시야는 흐릿했다. 그 희미한 빛이 이상하게도 남자의 모습은 또렷하게 보여 주었다.

조슈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붉은 입술에 그것을 가볍게 물었다. 희미한 빛 주변으로 부연 연기가 일렁였다.

그가 담배를 피웠었던가. 소희는 반년 전 그를 회상했다. 애초에 겉보기에는 바른 남자주인공의 이미지였으니 술이고 담배고 입에도 대지 않는 캐릭터도 설정해 놨었다.

그런데 아리아드가 없는 그 반년이 남자의 많은 걸 바꿔 놓은 듯했다.

소희는 전과 많이 달라진 그의 모습을 천천히 훑었다.

정리하지 않아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피로가 묻은 나른한 눈매가 보였다.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어 촘촘한 속눈썹의 음영이 얼굴 위로 짙게 드리워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날카롭게 뻗은 콧날, 그 아래에 자리한 붉은 입술은 피곤함의 잔재인 듯 살갗이 조금 터져 있었다. 턱선도 전보다 더 날렵해 보이는 것이 살이 많이 빠져 보였다.

당연히 변한 것은 그의 외양뿐만이 아니었다. 날카로워진 겉모습만큼이나 마음도 싸늘하게 식어 버린 듯했으니까.

그럼에도 이 커다란 구덩이에 그대로 떨어지려는 아리아드를 감싸 안은 건 어떠한 마음에서였을까. 순전히 위기에 빠진 인간을 보고 본능적으로 달려든 그의 정의심인 걸까.

아니면, 아직까지 아리아드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는 걸까.

짙게 퍼진 연기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붉게 일렁이는 눈망울 안에 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있겠지만 시야를 방해하는 연기 때문인지 그 속내를 읽기 힘들었다.

소희는 저도 모르게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남아 있는 여지를 찾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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