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62화 (62/120)

Chapter 62

소희는 눈이 커다래지고 조금 움츠러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눈동자와 한참을 그렇게 마주한 채였다.

그들의 사이를 많은 인파가 스쳐 지나갔다. 소희는 잠시 둘의 시간만 이대로 멈춘 거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조슈아의 기다란 다리가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구석에 서 있던 소희도 발길을 움직였다. 머리의 통제를 벗어난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스무 걸음, 열 걸음, 다섯 걸음, 점차 간격이 좁혀 들다가….

“저하, 가시죠.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켈리가 조슈아의 팔짱을 끼고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에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금 흘렀다.

그 사이를 몇 걸음 남겨 두지 않고 마주하고 있었던 두 눈이 어긋났다. 조슈아가 먼저 눈길을 빠르게 돌렸기 때문이었다.

이내 두 남녀가 소희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소희는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눈시울이 설핏 떨려 오는 것 같자 오른손을 들어 눈을 빠르게 비볐다.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피어슨 가문의 재건이야 얼마든지 그 방법을 궁리해 볼 수 있겠지만, 블루앙 래비를 놓치면 언제 잡을 수 있을지 몰랐다.

소희는 두 남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메리를 찾기 위해 켈리를 쫓을 작정이었다.

* * *

켈리는 남자의 팔을 감은 제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거절당할 줄 알았다. 여태 자신을 대했던 태도로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 이 남자의 태도는 달랐다. 그리고 이내 그 미묘한 변화의 이유를 읽어 내고 말았다.

“폐하가 부르신 적은 없어요.”

무도회장에 들어서자 쏠리는 시선을 느끼며 켈리는 정면만 응시한 채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위에서 조슈아의 시선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아리아드 님한테 가서 사랑 고백이라도 하려던 모양새였는데. 제 말이 틀렸나요?”

안쪽으로 들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잦아들자 조슈아는 기다렸다는 듯 켈리의 팔을 풀어냈다. 그리고 시종들이 나르는 트레이 위에 올려진 샴페인을 집어 들었다.

아무런 대꾸 없이 그것으로 메마른 목을 축이자 켈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술을 뗐다.

“그런데 제 부름에 응했던 건 정신이 들어서였을 테고.”

악단의 잔잔한 연주에 켈리의 조용한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문득 여전히 마음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자존심이 상하셨겠죠.”

뒤이어 조슈아가 피식거렸다.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켈리는 말했다.

“저를 이용해도 상관없어요. 저하의 복수에, 마음껏 이용하세요.”

“….”

“방금처럼.”

이야기만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말문을 연 것은 샴페인을 다 비운 뒤였다. 잔을 내려놓은 그는 테이블 옆을 손톱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만 바라보는 켈리에게 기꺼이 눈을 맞춰 주었다.

“아리아드에게 이제 남아 있는 마음은 없으니까.”

무정한 낯에 고요해 보이는 눈망울은 그 말이 정말 사실인 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물론 켈리는 속지 않았지만.

“거짓말.”

속마음이 덜컥 튀어나왔을 때, 조슈아는 웃었다. 눈매는 여전히 딱딱히 굳어 있었지만 입꼬리는 올린 채였다.

“반년이면 마음이 식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주문을 새기듯 나직하게 내뱉는 말소리였다. 그리고, 켈리는 그 말이 진정 이뤄졌기를 염원했다.

* * *

소희는 켈리 주변을 맴돌다가 무도회장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블루앙 래비는 개뿔, 메리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불편한 구두를 하얀 드레스 밑에 몰래 벗어 두니 고단했던 두 다리가 조금은 편안해졌다.

악단의 연주곡이 바뀌면서 무도회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갑작스레 앞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지자 소희는 고개를 들었다.

중앙으로 걸어 나온 건 조슈아와 켈리였다. 왈츠곡에 맞춰 그들은 손을 맞잡고 몸을 움직였다. 그 주변에서 춤을 추는 남녀들도 많았지만 소희의 시선은 중앙에 있는 남녀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붉은 드레스 자락이 켈리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감았다가 펄럭이길 반복했다. 새까만 정복을 입은 조슈아는 그 앞에서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춤을 이끌었다.

중앙에 있는 샹들리에 조명 빛이 아래를 비추며 그들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설핏 미소를 짓는 거 같기도 하고.

환한 조명 때문인지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도 같았다.

“더럽게 잘 어울리네.”

소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앞선 남녀의 풍경이 진정한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었다. 아리아드가 감히 끼어들 틈도 없는 완벽한 모습 말이다.

현실로 돌아갔을 때 켈리와 조슈아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바로 앞에서 춤을 추는 남녀를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랑의 가능성이 조금씩 싹트고 있는 듯 보였다.

소희는 켈리를 뒤쫓다가 엿들은 말을 회상했다.

‘아리아드에게 이제 남아 있는 마음은 없으니까.’

‘반년이면 마음이 식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어쩌면 이런 말을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올곧던 그 음성이 정말로 아리아드를 깔끔히 잊은 듯해서. 그래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주인공들의 사랑에 좋은 기류가 흐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을 응시하는 소희의 눈망울은 힘이 실리지 못하고 그저 멍했다. 왜인지 모르게 헛헛한 감정이 들어서였다.

한때 켈리의 사랑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길 바란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기억하며 소희는 자조했다. 켈리가 정말 아이를 죽게 만든 범인이라면 그 행복을 더 이상 빌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저 장면을 보며 불쾌감과 공허감이 뒤섞여 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아이를 죽인 것일 수도 있는 여자가 행복해 보여서. 단지 그뿐이라고 소희는 생각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다 보니 자꾸만 짙어지는 상념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소희는 뒤늦게나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애써 시선을 돌린 곳에 애석하게도 여태 피해 다녔던 찰스 엔드로가 있었다. 소희는 고개를 숙여 제 존재를 감추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레이디, 한참을 찾았네요. 여기 계셨군요.”

그가 장갑을 낀 왼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저와 함께 한 곡 추시죠.”

소희는 애매한 미소와 함께 그의 손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곡이 바뀌고 그들은 홀 중앙으로 움직였다. 반대로 앞서 춤을 췄던 남녀들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중에는 켈리와 조슈아도 있었다. 서로를 엇갈려 지나치면서 그의 붉은 눈망울이 소희를 스치듯 훑었던 거 같기도 했다.

소희는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다. 자신을 훑는 서늘한 눈빛이 낯설긴 했어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 * *

무도회는 이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황성 밖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안쪽에 마련된 숙소에서 일정을 보냈다.

소희는 깜깜한 밤이 찾아오길 기다리다가 건물을 빠져나왔다. 후드가 달린 긴 로브를 뒤집어써 눈에 띄는 보랏빛 머리카락은 가린 채였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황태자 궁궐 입구였다. 보초를 선 기사들 때문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 앞에서 서성이길 반복했다.

일단 무작정 오긴 했지만 마땅히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복장을 최대한 흉내 낸 허름한 모양새이긴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앞에 서 있는 기사들을 속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망설이다가 소희는 결국 발을 떼어 냈다.

“거 누구시오.”

결국 예상했던 대로 입구를 지나치지도 못하고 붙잡혔지만.

소희는 머리에 두른 천으로 최대한 얼굴을 숨기고 목소리도 변조했다.

“저는 황태자궁에서 일하는 메리입니다.”

“메리?”

뒤이어 의문 어린 질문이 따라왔다. 남자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앞길을 다시 단단히 막아섰다.

“메리, 몇 분 전에 숲으로 산딸기를 따러 간다더니 벌써 온 겁니까?”

“이 시간에 무슨 산딸기를….”

소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점점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녀를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뒤이어 난감한 분위기에 더 난감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갑작스레 바람이 불어와 소희가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져 버린 것이다. 이미 벗겨진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려 했을 때는 이미 보라색 머리카락이 드러나 버린 뒤였다.

라트베아 도시에 단 하나뿐인 머리 색.

“…아리아드 님?”

눈이 마주치자 소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슬슬 뒷걸음질 쳤다.

“오케이. 메리가 숲으로 갔다 이거죠?”

“저기, 아리아드 님?”

“저도 이만 가 볼게요!”

그렇게 거리를 벌려 멀어지는데 뒤에서 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쪽 아니고, 오른쪽입니다!”

“아, 오른쪽이구나. 하하! 감사합니다.”

소희는 그렇게 뒤돌아 달리면서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했다. 결국 메리가 있는 위치를 알아냈으니까.

이제 그 큰 숲에서 메리를 어떻게 찾느냐가 관건이었지만. 차라리 황태자궁이 아닌 곳에 혼자 떨어져 있다면 대화를 나누기가 훨씬 수월했다.

기사가 일러 준 대로 걸으니 숲으로 들어서는 길목이 나왔다.

소희는 그 앞에서 손에 쥔 등불을 꽉 움켜쥐었다. 들어서는 길목은 생각보다 잘 다듬어져 있었지만 울창한 숲을 깜깜한 밤에 보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굳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이 길목 입구에서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꺄악!”

익숙한 이의 비명이 멀리에서 울려 퍼졌다. 소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메리?”

분명히 메리의 목소리였다. 코앞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또 그렇다고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다.

소희는 결국 그 숲길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메리! 혹시 거기 있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의 비명은 애초에 들린 적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고요해진 뒤였다. 소희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그렇게 등불에서 나오는 작은 빛만 의지하고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지독하게 고요하니 점차 청각이 예민해졌다. 평소라면 들리지 않았을 소리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졌다.

부엉이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에 초목들이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바스락.

자신의 뒤를 밟고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

긴장감에 소희의 숨이 점차 가늘어졌다. 분명히 누군가 제 뒤를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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