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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61화 (61/120)

Chapter 61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피어슨 부인은 소희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도 연신 이것은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한 번 만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냐는 말도 함께였다.

사실 가문을 망친 주범인 아리아드는 이에 딱히 토를 달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긍정을 표했을 땐, 어느새 모든 세팅이 완료된 후였다. 마치 애초에 아리아드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이.

소희는 조금 께름칙한 기분을 느끼며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엔드로 가문에 있는 온실 정원이었다. 황궁에 있는 것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것이, 대부호라는 칭호가 이제야 크게 와닿았다.

소희는 타인의 손에 의해 오랜만에 온갖 액세서리를 치렁치렁하게 다 매달고 왔다. 기다란 귀걸이에 자꾸 머리카락이 끼어 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을 때였다.

“나의 꽃, 아리아드 양. 드디어 당신이 저를 보러 와 주었군요.”

버터를 한껏 바른 듯 느끼한 목소리에 미간이 절로 좁혀 들었다. 시선을 올리자 짙은 밤색 머리카락에 녹안을 가진 남자가 제 머리숱만큼이나 풍성한 꽃다발을 쥐고 서 있었다.

“피어슨 가문이 망하고 나서야 당신이라는 꽃을 손에 쥘 수 있다니, 그건 좀 슬픈 일이지만요.”

남자가 꽃다발을 건넸다. 그리고 볼을 쓰다듬으려고 하자 소희는 황급히 방향을 틀어 그 손길을 피했다. 그 모습에 찰스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저런, 아직도 이런 스킨십이 쑥스러운가 봐요.”

미친놈이다. 확실히 미친놈이야.

소희가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그와 똑같이 웃어 주었다. 머릿속에서 적색 경고등이 켜졌다. 어쩐지 잘못 엮였다가는 아리아드의 인생이 제대로 꼬일 것만 같았다.

찰스는 혀를 더럽게 날름거리며 군침을 다시고는 자리에 앉아 말을 이어 갔다.

“이미 끝까지 다 본 사이에 이러니 조금 귀엽네요.”

심지어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아리아드와 몸도 섞은 모양인데. 잘생긴 남자랑만 몸을 섞는다는 아리아드의 공식이 갑작스레 이렇게 깨지고야 말았다.

‘망할 아리아드….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소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제 속마음을 감춘 채였다. 그리고 이 느끼한 분위기를 전환 시키기 위해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손을 다치셨나 봐요.”

남자의 오른손은 하얀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곳에 시선이 닿아 별 의미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찰스는 갑작스레 노기를 드러냈다. 어금니를 꽉 물어 아드득 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 듯 보였다.

그리고 뒤잇는 말에 소희는 웃고 있던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망할 황태자 놈…. 아니, 그 대단한 조슈아 매킨리 덕분에 손이 이렇게 불구가 되었지요.”

“부, 불구요? 무슨 일 때문에….”

조슈아는 대체 안 보이는 곳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건지, 예상보다 엄청난 그의 미친 짓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내 사랑 아리아드에게 그림 선물을 줬을 뿐인데. 그 망할 놈이!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림을 못 그리는 몸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분노를 터트리는 그를 앞두고 소희가 눈을 끔뻑였다. ‘그림 선물’이라는 네 글자에 꽤 인상 깊었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예전에 침대에 올라와 있었던 그 변태 같은 그림이….

“혹시 제 선물을 받아 보셨나요?”

찰스와 눈이 마주치자 소희가 밑으로 축 처지려던 입꼬리를 다시 올려세웠다.

역시 그녀의 예상이 확실히 들어맞았다. 생각보다 더한 미친놈이었다.

수틀리면 이 자리에서 그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소희는 욕을 하고 싶은 제 속마음을 더욱 꽁꽁 감추었다.

중지 대신 엄지를 치켜세우자 그가 다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레이디도 그 미친놈의 실체를 알아 버린 거겠죠.”

“네?”

“그러니 매킨리 황실을 벗어나 도망간 것일 테고.”

제멋대로 뱉어 대는 말에 소희는 그저 고개만 반복적으로 끄덕여 주며 분위기를 맞춰 주었다.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남자가 소희와 다시 눈을 맞추었다.

“제가 이제 지켜 줄게요. 아리아드의 가문도, 나의 사랑 아리아드도.”

녹안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이 화려한 공간이 보여요? 이제는 모두 당신 거예요.”

억지로 웃고 있던 입매가 자꾸 떨려와 소희는 미소 짓는 것을 포기했다.

“저와 결혼을 한다면.”

“어우.”

저도 모르게 너무도 노골적인 탄식을 내뱉어 버렸다. 소희는 애써 그 소리를 감추기 위해 목을 가다듬는 척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뜨거운 차를 삼켜 느글거리는 속을 달래었다.

아무리 가문을 살리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해도 이 남자를 선택하는 길은 제 비위가 상해 절대 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이미 혼자서 결혼을 확정 지어 버린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공식적으로 우리의 사이를 알려야 할 거 같아요.”

“저기, 제 의견은….”

강하게 피력하지 못한 소희의 의견이 깔끔하게 무시당하며 말이 끊겨 나갔다.

“이틀 뒤에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에 함께 나가요.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불도저처럼 직진만 하는 미친놈 때문에 당황하던 와중이었다. 소희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이는듯했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 이 남자를 이용하여 황궁으로 들어갈 확실한 방법이었다.

가식적인 가면만 쓰고 있던 소희의 만면에 진정한 미소가 띄워졌다.

“좋아요.”

* * *

사교계가 떠들썩해졌다. 도망간 아리아드가 라트베아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기정사실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내일 있을 무도회에 찰스 엔드로의 파트너로 참석할 것이라는 그녀의 파격적인 행보가 하루 만에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소문이 닿은 곳은 켈리가 있는 황태자궁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왜 이것밖에 안 주시는지….”

부스스한 갈색 정수리만 보이던 찰나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켈리의 눈치를 살피느라 힐끔거리길 반복했다.

켈리는 테이블 위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채였다.

“약속하셨던 금액에 절반밖에 되지 않는데….”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고 침묵하던 켈리가 그 말에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던졌다.

쨍그랑, 찻잔이 갈색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서 벽면에 닿자 산산조각이 났다. 그에 여자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제대로 일 처리도 못 했으면서 무슨 돈을 다 받으려고 하세요.”

목을 긁고 나와 잔뜩 쉬어 비틀어진 목소리였다. 여자를 내려 보는 켈리의 안광에서 서늘한 빛이 돌았다.

“죽은 걸 확인했다며!”

이내 핏발 선 눈으로 소리를 지르자 여자가 고개를 거듭 조아렸다.

“제, 제가 분명 피를 토하고 숨이 멎는 거까지 확인했는데….”

블루앙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분명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시체같이 파리해진 낯에 심장이 곧 멎을 듯 박동이 거의 없었다.

주치의도 아예 가망이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던 걸 두 귀로 똑똑히 듣지 않았던가. 블루앙은 그것으로 그 여자의 죽음을 확신한 채 길을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라트베아로 돌아왔다니. 신의 장난이 아니고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지금 뭐 시체가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켈리가 그리 말하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 기괴한 웃음소리에 블루앙은 전신을 떨며 다시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나가요.”

“…네?”

“그 돈을 들고 최대한 빨리 라트베아에서 떠나요.”

단호한 목소리에 블루앙은 손에 쥔 돈주머니만 만지작거렸다. 생각했던 금액에 반절밖에 챙기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아쉬운 탓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자 앞에서 다시 격분에 찬 목소리가 쏟아졌다.

“아리아드 눈에 띄지 않게 당장 떠나라고요!”

블루앙 래비는 결국 그렇게 이를 꽉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의 시종이었던 자신이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자괴감에 빠진 채로.

그녀가 나가고 방 안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켈리는 다시 책상 위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주변 공기가 희박해지고 있는 건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정적 속에 그녀의 고르지 못한 거친 숨소리만 섞여 들었다.

* * *

무도회장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사교계의 큰 파장을 일으킨 주인공이 들어섰다.

한껏 꾸민 아리아드의 존재감은 그 주변 것들을 모두 지워 버리듯 그녀에게만 시선을 쏠리게 했다.

생각보다 더 무섭게 쏟아지는 노골적인 시선에 소희는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금방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제 목표를 위해 계속 메리를 찾아 나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리아드의 쓰레기 같은 여론 덕에 멀리서 수군거리기만 할 뿐 들러붙어 귀찮게 구는 인간은 없다는 거였다.

찰스 엔드로, 이 거머리 같은 변태만 빼놓으면 아주 완벽했다.

손을 잡고 무도회장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한 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다. 소희는 이 골치 아픈 남자를 떼어 놓기 위해 궁리하다가 결국 화장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레이디, 어디로 가는 거죠?”

자신의 뒤를 졸졸 쫓는 남자에게로 소희는 몸을 휙 틀었다.

“화장실이요.”

“아,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에 소희는 입매를 부드럽게 휘어 올렸다.

“제가 변비가 있어요.”

“네?”

“변비가 있어서 화장실에 좀 오래 앉아 있을 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특출난 외모와 사람을 집중시키는 목소리로 아리아드의 변비 소식은 주변 귀족들에게 알려졌다.

망할.

소희가 쏠리는 이목을 느끼며 속으로 욕을 읊조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제가 장이 안 좋아서 똥 냄새가 심각하게 날 텐데. 앞에서 기다리시는 건 추천해 드리지 못하겠네요.”

“아, 냄새가….”

“어머, 놀라셨구나. 너무 솔직했나요?”

남자의 얼굴이 점차 창백하게 질려 가는 걸 확인하며 소희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대의 꽃도 똥 냄새가 난답니다.”

본인도 자괴감이 몰려오는 멘트와 함께 소희는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곧이어 아리아드의 똥 냄새까지 사랑하지 못하는 찰스가 고개를 뻣뻣하게 끄덕이며 멀어져 갔다.

거머리는 떼어 냈고, 그다음으로 해야 할 건….

아무래도 메리는 황태자궁 소속이었고,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면 켈리의 곁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켈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보였으니 소희는 무도회장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구석에 자리 잡은 소희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틈에서 소희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꽂혔다. 밝은 조명 아래서 더욱 까맣게 느껴지는 흑발과 전보다 더 서늘하게 일렁이는 붉은 눈망울.

얼마 안 가 꽤 먼 거리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

조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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