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
소희가 빙의한 덕에 아리아드는 깨어나긴 했어도 독의 여파로 높은 열에 시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날 때마다 소희는 아이처럼 목놓아 울기를 반복했다.
데온은 하루 종일 그런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는 애써 눈물을 삼켜 내고 소희가 깰 때마다 차분히 다독여 주었다.
이틀이 지나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치의는 기적과도 같은 회복 능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소희의 정신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마냥 누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더 이상 울지는 않았다. 소희는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에 힘을 주고 이틀 만에 첫마디를 뱉었다.
“혹시 제일 최근에 들어온 사용인의 인적 사항을 알아?”
울기만 하던 여린 모습이 싹 사라지고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데온은 살짝 놀라 그녀의 변화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이력서가 있어.”
“그것 좀 볼 수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얼마 안 가 한 장의 종이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 종이를 건네받은 소희는 몇 개 없는 정보를 읽어 내려갔다.
이름은 블루앙 래비, 나이는 스물하나.
건질 거라고는 이름과 나이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거짓일 가능성이 컸다.
“지금 이 사람, 저택에 없지?”
“하루 전에 개인 사정이 생겼다면서 일을 그만뒀어. 조금 이상하긴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냥 보내 줬거든.”
“이상한 사람이 맞아.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네가 만든 음료에 독을 탔어.”
“뭐?”
“황실에서 일했던 사람 같아. 누군가의 수족이겠지.”
데온이 얼굴을 사납게 굳혔다. 주먹을 꽉 쥔 손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벌게져 있었다.
때마침 익숙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건물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사람들이 하나같이 데온을 찾고 있었다. 다시 반복되는 소동에 데온이 만면을 일그러뜨리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젠장, 저 새끼들은 또 찾아왔네.”
“무슨 일이야?”
“여길 어떻게 알았는지 필트모어 사람들이 찾아와서 난리야. 별거 아니니까 정리하고 올게.”
데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소희는 사용인 중 한 명이 협탁 위에 올려 둔 신문을 발견했다.
오늘의 메인 기사에는 피어슨 가문의 소식이 실려 있었다. 몇십 년을 살던 거대한 저택을 팔고 이사를 할 정도로 재정난에 시달린다는 내용이었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소희의 시선도 문 쪽으로 옮겨 갔다. 데온 앞에 펼쳐진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소란이 집 안까지 들이닥쳤다.
“제가 장을 보고 들어오는데 이분들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사용인의 뒤로 열댓 명정도 되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광경에 데온이 욕을 읊조렸다.
“다들 좋은 말로 할 때 일어나.”
“공작님, 안 그래도 가세가 기울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버리고 떠나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데온의 사나운 기세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가 용기 내어 말을 던졌다. 그의 곁에서 일하던 비서였다.
“사업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이 몰려와 시위하고, 저택에 있는 물건들이 압류되었습니다. 저택의 안팎으로 아주 난리입니다. 공작 각하, 저희는 이 상황에서 갈 곳이 없습니다. 다들 이렇게 그냥 길바닥에 내몰릴 처지입니다.”
그 절절한 말을 시작으로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제발 돌아와 주세요!”
“어림도 없어. 징징거리지 말고 일어나.”
간절한 외침에도 데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희는 몸을 일으켰다.
숨으면 해결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모든 것을 망쳤다. 또 제 선택으로 인해 아리아드의 주변 또한 망가져 가고 있었다.
데온과 필트모어 가문, 아리아드의 가족들과 피어슨 가문, 또 깊은 상처를 안고 아리아드를 미워하고 있을 조슈아까지.
“데온, 내가 고른 길이 잘못된 길이었던 거 같아.”
소희를 돌아본 데온의 눈망울이 잘게 흔들렸다. 그녀가 이을 말을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했다.
“우리 잠시 라트베아로 돌아가자.”
데온의 거대한 덩치 뒤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언뜻 안도의 탄성이 들려온 거 같기도 했다.
반대로 데온의 낯은 딱딱히 굳어 갔다. 그러한 표정에서 또 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읽혔다.
소희가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한참 위에 있는 데온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만나자. 각자의 일을 모두 해결하고. 너도, 나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일이 생겨 버렸잖아.”
부드럽고 안정감 있는 손길에 데온의 딱딱했던 낯이 점점 풀려 갔다. 따스한 체온을 타고 그녀의 마음이 전달된 덕이었다.
“그 망할 범인을 찾는 일이라면 내 일이기도 해. 가문의 일을 빨리 해결하고 네가 있는 쪽으로 갈게.”
데온이 소희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모든 일이 해결되면, 제대로 된 환경에서 정식으로 청혼할 거야.”
수개월의 시간 동안 아리아드였던 소희에게 변치 않고 진심이었던 남자. 그는 정말이지 자신에게 넘치도록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소희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고마워, 데온.”
* * *
소희와 데온은 라트베아 도시로 돌아왔다. 그녀를 피어슨 공작 저 앞에 내려 준 남자는 곧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필트모어 저택으로 떠났다.
갈 곳이 없었기에 소희는 피어슨 저택으로 돌아오는 것이 최선이었다. 데온을 따라 필트모어 저택으로 갔다가는 아리아드가 지닌 쓰레기 여론이 데온에게로 옮겨붙을 테니 썩 좋은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저택의 안으로 선뜻 들어서기가 무서웠다. 그 아무도 아리아드를 환영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아서였다.
피어슨 가문의 사업은 아리아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황태자비의 자리와 독보적인 아름다움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녀를 따라 하는 유행을 만들어 냈고, 그 결과 사치품 판매가 대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아드의 이미지가 저점을 찍은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피어슨 가문의 사람들과 아리아드의 부모조차 그녀를 반길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모르겠다. 일단 부딪혀 보자.”
어린 한소희도 이미 한 번 버려져 본 마당에 아리아드로 빙의한 소희가 버려진다고 해서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소희는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재정난에 시달려서 이사했다는 기사 내용이 확실한지, 공작 저치고는 허름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시골에 있었던 데온의 저택보다 훨씬 규모가 작아 보였다.
저택 안은 썰렁했다. 시종들의 얼굴에는 어둠의 빛이 만연했다. 그들은 아리아드의 등장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
누군가 저택 안쪽으로 달려가 그녀의 등장을 고하자 아리아드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소희는 이 역시 원망의 기색이라고 생각했다.
피어슨 부인의 손이 허공으로 떠오르자 소희는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설마 뺨을 치려나, 소희는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예상을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그 손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인의 따스한 품이었다.
놀란 소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리아드, 내 아가.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온 거야.”
굉장히 따스한 목소리에 소희의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무척이나 걱정했단다. 잘 지낸 거지?”
소희는 잠시 말을 잃어 입술만 오물거렸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피어슨 부인은 아리아드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들려오지 않자 팔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래도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다.”
그 진심을 의심할 여지 없는 다정한 목소리에 소희는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원망하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원하지도 않은 결혼을 강요한 우리의 잘못이지.”
아리아드에 대한 분노가 가득히 차 있을 것이라는 괜한 걱정을 했다. 자신은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기에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전개였다.
“아리아드, 아이를 가졌다고 들었는데….”
피어슨 부인이 말끝을 흐리며 그녀의 배를 내려 봤다. 소희는 그 말에 잠시 현기증이 이는 듯했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아이는… 아주 멀리 떠났어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말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핑 맺히는 것 같자, 소희는 급하게 손등으로 닦아 냈다.
“아리아드, 괜찮단다. 다시 시작하면 돼.”
우리 함께 이겨 내자.
피어슨 부인은 그 말을 계속 되뇌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소희는 과거의 제 생각들을 후회했다.
어차피 엑스트라라 괜찮을 거라니. 이 따스한 품에 안겨 위로를 받으면서 벼랑 끝에 몰린 그들의 처지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소희는 과거의 제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모든 걸 망쳐 놨다면, 다시 되돌려 놓으면 그만인 것이다. 돌려놓지 못할 것들은 잊지 않고 마음 깊숙이에 새긴 채로.
아리아드와 관련된 모든 걸 최대한 복구하고 싶었다.
아이를 죽인 범인을 잡아내고, 피어슨 가문을 원상 복구시킨다는 다짐이 그렇게 소희의 마음속에 꽉 들어찼다.
* * *
다음날, 피어슨 저택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소희는 방으로 들어와 고민에 빠졌다.
블루앙 래비, 그 쳐 죽여도 시원찮을 여자를 찾으려면 궁궐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지만 현재 희대의 쓰레기인 아리아드가 궐로 들어갈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은 없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그곳에서 메리를 만나 블루앙 래비를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방법들을 여러 가지 골똘히 고민하던 중이었다. 마침 편지 봉투를 쥔 피어슨 부인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리아드, 우리에게 희망이 생겼어.”
기운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녀는 소희에게 편지 봉투를 건넸다.
겉면에는 황금빛으로 멋들어지게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찰스 엔드로]
처음 보는 이의 이름이었다.
“읽어 보렴. 아주 좋은 소식이야.”
편지 봉투를 뜯은 소희는 내용을 읽고 눈을 끔뻑였다. 그는 돌아온 아리아드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었다.
왜? 소희는 그러한 의문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아리아드와 엮여서 좋을 것이 하나 없는 상황이었는데 굳이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건지. 단순히 데온처럼 아리아드를 사모하는 남자인 걸까.
고민에 빠진 소희 앞에서 피어슨 부인은 그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엔드로 가문의 외동아들이고, 그의 아버지인 헨리킨 엔드로는 귀족 중에서도 얼마나 돈이 많은 대부호인지를.
열정적인 설명과 함께 피어슨 부인은 어제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리아드, 우리는 함께 이겨 낼 수 있어.”
소희는 설핏 미간을 좁혔다. 어제와 같은 피어슨 부인의 미소가 이상하게도 지금은 작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