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
소희는 어느덧 만삭에 가까워진 제 배를 감싸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선율에 발끝을 까딱거렸다.
태교를 위해서라며 데온은 어느 날부터 플롯을 들고 나타났다. 여태 혼자 조용히 연습했는지 자세는 꽤 연주자다운 흉내를 내었지만, 썩 듣기 좋은 음악은 아니었다.
그런 날이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데온의 연주는 그럴듯한 선율을 갖추어 나갔다.
가끔씩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음정이 계속해서 어긋났지만 소희는 웃음을 참고 경청하였다. 몸집이 거대한 남자가 태교를 위해 애쓰는 엉뚱한 모습이 나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오늘은 수습할 수 없는 커다란 음 이탈이 났다.
소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 웃음소리에 데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입술에서 플롯을 떼어 내고 한 손으로 회색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이번 건 엉망이네. 다시 연습해 올게.”
“나쁘지 않았어.”
“아리, 그런데 왜 비웃어.”
잔뜩 시무룩해진 모습이었다. 그에 소희는 애써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고는 태연스럽게 답했다.
“아니야, 즐거워서 웃은 거야. 듣고 보는 재미가 있네.”
단순한 남자는 금세 두 눈을 부드럽게 휘어 접고는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데온이 다시 연주를 시작하려고 플롯을 잡았을 때였다. 저택 밖에서 소란스러운 고함이 들려왔다.
마침 사용인 한 명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주인님, 밖에서 다들 주인님을 찾습니다. 문을 계속 열어 달라고 난동을 피워서 나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아리,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데온이 그렇게 자리를 비웠다. 소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 저택의 정문 앞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 광경을 살피던 소희는 자신을 부르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 새로 들어온 사용인이었다.
그녀는 유리잔을 건넸다.
“주인님께서 만드신 사과 주스예요.”
“데온이?”
“아까 낮에 만들어 두시고 드리는 걸 깜빡하셨는지 부엌에 그대로 있어서 들고 왔어요.”
“아, 고마워.”
소희는 잔을 받아 들고 윙체어에 앉았다. 그리고 잔에 든 음료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굉장히 달콤한 향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그것을 끝까지 마시고는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그 순간, 여태껏 달콤한 향만 맴돌던 혀끝에서 조금 떫은 맛이 느껴졌다.
문득 목 끝이 따끔거리자, 소희는 예전에 있던 일이 생각나 사용인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에 파인애플이 들어간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냥 사과 주스인데….”
일순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까지 일자 소희가 제 이마를 한 손으로 짚었다.
목 끝이 꺼끌꺼끌한 느낌에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러자 입 밖으로 붉은 액체가 울컥하고 튀어나왔다.
손바닥에 묻어난 건 피였다.
전에 겪었을 때보다 더 심한 작열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소희는 찢어질 거 같은 목을 두 손으로 쥐었다.
의식이 흐려지며 의자에 앉은 몸이 휘청이고 있었다.
“아리아드 님!”
사용인의 고함 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이내 시야가 흐려지고 아리아드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소희는 그러한 순간까지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버텨 보려고 애썼다.
이대로 쓰러졌을 때는 보통 죽음의 문턱을 밟은 경우였으니까. 그렇다면 이대로 정신을 놓아 현실로 돌아간다면, 아이의 목숨은….
아랫입술을 꽉 물자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그곳에도 피가 고였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몸에 힘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까지 소희는 제 배를 감싸 쥐고 있었다.
뒤이어 완전한 암전이었다.
* * *
소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이제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대한민국, 자신의 작은 방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눈을 감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 손이 배를 잡은 상태였다. 그저 평평하기만 한 제 배에서 손을 떼어 낸 소희는 급하게 컴퓨터 앞에 앉았다.
등이 금방 식은땀으로 젖어 갔다. 잔뜩 초조해진 탓이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마우스가 정확한 목적지를 찾아갔다. 수없이 많이 풀린 회차에서 제일 끝에 있는 회차를 누른 그녀는 급하게 원하는 내용을 찾아 읽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까지 아리아드는 제 배를 감싸 쥐고 있었다. 뒤이어 완전한 암전이었다.]
이 망할 소설에는 원하는 정보가 없었다. 그저 소희가 겪은 경험을 그대로 적어 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휘몰아치는 불안감에 소희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대체 누구의 소행일까.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소희는 글 속에서 범인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아리아드가 쓰러지기 직전에는 이상하게도 사용인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제 갈색 머리를 배배 꼬아 쥐었다. 저택에 들어온 지 몇 주가 지났건만 일에 진척이 없어 초조해진 탓이었다.
성질 사나운 남자가 자리를 비운다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필트모어 공작은 어찌나 여인을 아끼는지 한 시라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기회를 엿보던 그녀는 마침내 틈을 찾았다. 저택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며 필트모어 공작은 자리를 비웠다.
침실로 들어선 그녀는 창문 앞에 서 있는 여인에게 음료를 건넸다.
달콤한 향 속에 독을 품은 사과 주스였다. 황실 사람에게 건네받은 이 독은, 소량의 양으로도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다.
아리아드는 그것을 별 의심 없이 입안에 모두 삼켜 넣었다. 곧이어 피를 토하고 목을 틀어잡았다.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그녀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리아드 님!”
얼굴을 찡그리며 연기를 하니 다른 사용인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큰일 났어요! 아리아드 님이 주인님이 만든 사과 주스를 마시다가 갑자기….”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주 일품이었다. 모두가 깜빡 속을 만큼.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은 추호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라고.
이 주스는 확실히 필트모어 공작이 만든 것이었으니까. 자신은 그저 기회를 엿보다가 그곳에 독을 조금 넣었을 뿐이다. 심지어 아주 소량이라 주치의도 판단하기 힘들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받을 돈의 금액을 예상하며 행복한 상상을 이어 갔다. 이 저택은 오늘 당장 벗어나 황성으로 향할 작정이었다.]
소희는 내용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았던 사용인의 외양을 떠올렸다. 갈색 머리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했던 여자였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거야.”
그런데도 하필이면 중요한 내용이 모호하게 쓰여 있었다. 황실 사람에게 건네받은 독인데 대체 그 사람이 누군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망할 소설. 아주 제멋대로지.”
소희는 자신의 소설을 욕하며 읽지 않은 전 회차들을 속독했다.
아리아드가 황성을 떠난 순간부터 켈리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곳에 사랑을 외면받은 여자의 슬픔, 분노, 질투, 우울감 등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특히 켈리는 이전에도 파인애플 알레르기가 있는 아리아드에게 의도적으로 그것을 건넨 전과가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켈리인가.”
소희는 범인을 차분히 유추해 나갔다. 본래 시놉시스대로라면 조슈아가 아이를 죽였었지만, 생일을 축하한다며 이혼 서류를 시원스럽게 건넨 그가 범인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아리아드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는 비앙카와 켈리 중 한 명이란 건 확실했다.
소희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힘줘 물었다. 현실로 돌아오기 전처럼 입술에 피가 맺혔다.
아직 슬퍼하기엔 일렀다.
아리아드는 엄청난 독에도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고, 또 그렇다면 아이도 무사할 수 있지 않을까.
소희는 책상 왼편에 놓인 수면제를 삼켰다.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자신의 바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제발, 제발….
잠이 드는 순간까지 그렇게 되뇌었다.
꺼지지 않은 컴퓨터 모니터에는 소희가 확인하지 않은 댓글들이 띄워져 있었다.
소희의 심리는 전혀 담기지 않은 소설에 아리아드의 갑작스러운 잠적은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힘든 내용이었다. 그랬기에 댓글 반응은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태 그토록 절절하게 매달리던 것들에 소희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 * *
눈을 뜨기도 전에 코끝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흐릿한 시야 안으로 데온의 거대한 몸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는 소희의 오른손을 꽉 쥔 채였다.
점차 눈에 초점이 잡히자 자신을 바라보는 데온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간을 그렇게 울었는지 흰자위가 붉게 충혈된 상태였다.
“…내가 미안해. 자리를 비웠으면 안 됐는데.”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의 뒤에 선 주치의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모든 것이 부정적인 방향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그래도 소희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아이의 태동은 생생했으니까.
왼손을 들어 습관처럼 제 배를 매만진 소희는 떴던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애초부터 아이의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그녀의 배는 평평하기만 했다.
겨우 일어나 앉아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다리 아래, 침대 시트에 남아 있는 붉은 선혈만이 아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사실은 죽음을 겪고 방으로 돌아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부정했던 상황들이 너무도 차갑게 심장에 내리꽂혔다.
어느덧 소희의 뺨 위로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눌러 참고 있던 감정들이 터져 소희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저 아이만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그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자신이 너무 밉고 한심스러웠다.
‘모두 다 네 탓이야, 소희야.’
꿈속에서 아이의 죽음에 대해 그리 말하던 남자의 언성이 생각났다. 이제는 정말이지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옳다고 여겼던 오만한 선택들이, 겨우 이따위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