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
켈리는 커다란 침대 위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두꺼운 신부 화장을 한 지 무려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이 상태로 초저녁부터 침대 주변을 서성이다가 누워서 뒤척이길 반복하니 시간은 금방 자정을 넘어갔다.
적막만이 가득한 방에 초침 소리가 째깍거렸다. 얇은 슬립 원피스 자락을 매만지다가 켈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도저히 이렇게만 있을 수는 없었다.
켈리는 충동적으로 방을 나서 남자가 있을 삼 층으로 향했다. 층계참에 다다랐을 때는 찾아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는 이성적인 물음에 잠시 발이 멈칫 세워졌다. 하지만 결국은 휘몰아치는 감정의 승리였다.
어느새 자신은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있었다. 문득 정신이 든 건, 집무실 유리창에 반사된 제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하나 켜져 있는 주황빛 조명 아래 조슈아가 엎드려 있었다. 그 불편한 자세로 곤히 잠이 든 듯 켈리의 인기척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책상 쪽으로 가까워졌다. 축 늘어진 그의 왼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었다.
윤이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으로 시선이 닿았을 때, 켈리는 또 제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그녀의 얇은 손가락이 까만 머리카락 위를 스쳤다. 이내 그 손길이 서서히 내려가 고운 옆얼굴로 향했다.
창백한 뺨이 조명 아래 반짝거렸다. 조심스레 가져다 댄 손끝에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오늘 아침, 제 입술에 닿았던 부드러운 감촉처럼.
더한 욕심이 난 켈리는 그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 움직임으로 인해 책상 왼편에 있던 하얀 도화지가 밑으로 툭 떨어진 것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도화지의 앞 뒷면이 바뀌었다. 켈리는 더 이상 백지가 아닌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리아드의 실사화였다.
이제 더는 황성에 없는 아리아드,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아리아드. 그런데 이 남자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아리아드.
켈리는 허리를 굽혀 그림을 집어 들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조슈아의 흐릿한 초점이 켈리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미간을 구긴 그는 허리를 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저 왼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들어 그것을 물처럼 들이켰다.
이어지는 정적에 켈리가 변명하듯 먼저 입을 열었다.
“…첫날 밤에는 그래도 같이 있어 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예의 주시 하는 시선이 많았기에 그것이 당연한 일인 줄로만 알았다. 결혼한 남녀가 첫날 밤을 따로 보낸다면 온갖 구설수가 뒤따를 테니까.
이미 황태자가 바람난 전 부인을 잊지 못해 날마다 술로 지새운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으니 더욱 조심해야 할 사항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건 조슈아를 기다렸던 켈리의 핑계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냥 이 남자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일이 바쁩니다.”
술 냄새가 가득한 집무실에 앉아 핑계라고 보기에도 웃긴 말이 이어졌다. 일순 도화지를 든 켈리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때부터 어쩌면 실낱같게라도 남아 있던 이성이 모조리 날아간 듯했다. 켈리는 입술을 잘게 떨면서도 제 할 말을 뱉었다.
“그래도 결혼을 했으니 도리는 지켜 주세요.”
조슈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다시 마주한 만면에는 피곤한 기색이 잔뜩 묻어 있었다.
“켈리 양은 이 결혼이 제가 원해서 한 결혼으로 보입니까.”
“이 길에 대한 체념도 저하의 선택이셨겠죠.”
어이없다는 듯 김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그가 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기다란 전신이 가까워지자 거대한 음영이 켈리를 덮었다.
“도리?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멀쩡해 보이지만 한층 더 낮아진 억양이 그가 조금 취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어떻게 해야 귀찮게 굴지 않을 겁니까.”
그 말에 켈리는 울컥 분노가 차올랐다. 다정했던 첫 만남과는 너무도 비교되는 모습이라 더욱이 그랬다.
켈리는 손에 쥔 종이를 앞으로 들이밀며 입술을 뗐다.
“현 부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게 그 도리겠죠.”
목소리가 잘게 떨렸지만 무사히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런 건 너무 기분이 나쁘거든요.”
쫘악, 조용한 공간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아리아드의 얼굴이 반쯤 찢겨 나가자 조슈아가 다급하게 켈리의 두 손목을 틀어잡았다.
여전히 종이를 찢으려는 켈리의 팔이 방해하는 힘으로 인해 거세게 떨렸다. 어찌나 세게 잡았으면 피가 통하지 않아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고작 이 그림 한 장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켈리의 눈시울이 점점 벌게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거 같았지만 억지로 삼켜 냈다.
“거기까지 하시죠. 선 넘는 짓.”
조슈아의 무거운 말소리가 또박또박 꽂히자 켈리는 더 언성을 높였다.
“평생 가보로 간직이라도 하시게요? 사람 수천 명, 수만 명 세워 놓고 물어봐요. 지금 누구의 태도가 옳은지.”
이젠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 왔다. 눈물이 볼을 타고 한 방울씩 흐르다 이후엔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아프니까 놔주세요.”
결국 조슈아는 단단히 움켜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켈리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아리아드의 얼굴이 알아볼 수도 없이 조각나 허공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 조각들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의 눈동자에는 힘이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그러한 표정에 켈리는 더욱 짜증이 들끓는 듯했다. 그래서 이를 꽉 물고 읊조렸다.
“이른 시일 내에 아이도 갖고 싶어요.”
“….”
“저하께서는 거기까지 도리를 다해 주세요.”
켈리는 남자와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 마음이 더더욱 비틀려 갔다.
이런 식으로 해서 진정한 사랑을 얻어 낼 수 있을까. 조금만 더 내디디면 원하던 종착점에 다다를 거 같은데.
글쎄, 켈리는 자조했다. 마주한 남자의 눈망울에는 전보다 더 짙은 피곤함이 묻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해일처럼 몰려오는 거대한 감정들을 도무지 참아 낼 방법이 없었다.
“그것들만 노력해 주시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그와 함께 조슈아가 실소를 터트렸다.
하, 들려오는 그 소리 하나에 날카로운 모든 감정이 실려 그대로 전달되었다.
* * *
한 달이 지나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날 일로 그저 켈리의 노골적인 감정만 드러났을 뿐.
결국은 결혼했어도 남보다 못한 사이였고, 어쩌면 그 이전이 더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다.
조슈아는 켈리의 말을 들어줄 조그마한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번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다.
궁 내 사용인들 통해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공식 석상에 설 때마다 그녀를 조롱하고 안타깝게 보는 시선들이 쏟아졌다.
어느 날은 공작 부인의 티타임에 초대받았을 때였다.
처음 켈리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댔다. 동정 어린 시선을 도무지 견딜 자신이 없어서.
하지만 결국 참여하지 않았을 때의 불이익을 계산하다가 그녀는 길을 나서야 했다.
공작 저에 뒤늦게 도착한 켈리가 안내를 받아 정원에 들어섰다. 초대해 준 공작 부인에게 인사를 하려던 켈리는 그녀에게 가까워지기까지 몇 발자국 남기지 않고 발길을 굳혔다.
“그래도 태생부터 귀족인 아리아드 피어슨이 대단하긴 했어요.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다른 게, 여자들이 그렇게 욕을 해 대도 그 여자가 입는 스타일을 따라 하려고들 얼마나 노력했던지.”
“맞아요. 사람 자체가 그냥 우아하잖아요. 남자를 밝히는 천성만 아니었다면 자연스레 황후 자리는 아리아드의 것이었을 텐데.”
“그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없긴 했죠. 그에 비하면 지금은….”
“말해 뭐 해요. 핏줄이 이미 구별하는 것이지요. 대접받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항상 주눅 들어 있는 게 풍기는 우아함도 없고 황후 감으로 영 아니다 싶어요. 심지어 내조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거 같던데. 다른 일을 어찌하겠어요.”
“지금 황후인 비앙카가 힘을 잃으면 저절로 함께 저물어 갈 인물인 게지요.”
켈리는 일순 제 주변의 모든 공간이 뒤틀리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지독한 두통과 함께 구역감이 치솟았다.
들고 왔던 파우치를 바닥에 떨어트린 귀족 부인이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그녀가 켈리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켈리…. 아니, 비저하.”
놀라 벌게진 얼굴 위로 다른 표정이 겹쳐져 보였다. 고개를 돌려 켈리를 확인한 다른 여인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웃고 있을 리 없을 텐데, 웃고 있는 듯했다.
켈리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돌아섰다. 뒤에서 자신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멋대로 움직이는 발길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켈리는 비슷한 증상을 계속해서 앓았다.
타국에서 온 사절단의 인사를 받을 때도 그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 자리에서 갑작스레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켈리는 심장을 움켜잡았다.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자 조슈아가 시종들에게 명했다.
“비를 부축해서 먼저 들어가세요.”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켈리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달달 떨리는 몸을 감췄다.
메리가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이것 좀 드세요.”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캐모마일 차예요. 심신 안정에 좋은….”
메리는 그 말을 다 이을 수 없었다.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손이 찻잔을 거칠게 쳐 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녀의 손에는 뜨거운 차가 몽땅 쏟아졌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메리 앞으로 사나운 고함이 울렸다.
“너도 방금 나 비웃었지.”
“…네?”
켈리는 협탁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던졌다.
“지금 비웃었잖아!”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간 파편 하나가 메리의 왼쪽 얼굴을 스쳤다. 상처가 꽤 깊은지 피부는 금세 피로 물들었다.
뜨거운 것이 제 얼굴에 흐르자 메리는 손가락을 들어 매만졌다. 새빨간 선혈을 보고 그녀는 동공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에 켈리의 초점이 점차 돌아왔다. 입술만 벙긋거리던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이러려던 건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켈리는 생각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온몸이 꽉 죄어 오는 것은. 이곳이 제 자리가 아니라고 말하듯 모든 것들이 숨통을 틀어막는 것은.
켈리의 머릿속을 스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아리아드, 그녀의 존재.
멀리 사라졌대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그 여자의 존재가 제 모든 것을 망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