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
“뭐, 도망간 전 부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같은 거야?”
당황스러움을 숨기려는 듯 조슈아가 눈을 피했다. 보기 드문 진귀한 광경이었다.
“그 여자랑은 다른 문제야.”
“뭐가 달라. 그럼 망해 가는 가문에 적선하는 취미라도 생긴 건가.”
조슈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머리카락만 거칠게 쓸어넘겼다. 그걸 지켜보다가 브릭스는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피어슨 가문보다 우리 물건이 못한 게 뭐가 있어서. 돈을 그쪽 물건보다 몇 배를 쏟아부었는데.”
“….”
“안 되겠다. 열 받아서 내 친구들한테 하소연 좀 해야겠어.”
브릭스가 그대로 떠날 것처럼 빠르게 몸을 돌렸다. 여기서 그의 친구들이란 보통 입이 대단히 가벼운 인간들이었다.
그러자 뒤에서 기다리던 말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알겠어.”
“뭐?”
“알겠다고. 너희 물건도 넣는다고.”
브릭스는 조용히 입매를 씰룩였다.
도망간 전 부인이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황태자의 약점이라니, 꽤 재밌는 상황이었다. 언론에서는 희대의 쓰레기로 불리는 아리아드 피어슨에게 브릭스는 조용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목표를 이룬 브릭스는 땀이나 식힐 겸 마음 편히 소파에 몸을 누였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자 불현듯 이와 비슷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이곳에서 담배를 꺼냈다고 혼내던 조슈아, 잠든 아리아드를 품에 안고 업무를 보던 조슈아, 그 기이했던 장면을 곱씹다가 브릭스는 입술을 뗐다.
“그 여자가 그런 여자인 줄 몰랐던 건 아니잖아. 도망갔다고 들었을 때 놀랍지도 않았어.”
그에 잔에 채워진 독주를 한꺼번에 들이킨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그 여자가 어떤 여잔데.”
“뭐, 속된 말로 사람들이 많이들 그러지. 요사스러운 게 딱 백여우 같다고.”
뒤이어 조슈아가 입꼬리를 올려 피식거렸다. 비앙카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인정해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작 그 정도라는 걸.’
자신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일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 조슈아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와중에 그 여자를 대변해 주고 있는 제 모습이 상당히 가소로웠다. 어쩌면 정말 백여우에 홀린 걸 수도.
조슈아가 키들거리고 있자,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브릭스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요즘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아. 율덴 후작과 올리베아 영애가 정략결혼을 했는데 원래는 영애에게 평민 신분의 애인이 있었대. 그런데 결국 그 애인이 울면서 이해하고 보내 줬다나 뭐라나.”
브릭스는 얼마 전 사교계에 떠돌던 이야기를 꺼내와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대답을 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사랑이 참 대단하지 않아? 나라면 그 결혼식을 깽판을 내고 여자와 함께 도망을 갔을 텐데.”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지던 찰나에 생각지도 못한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사랑이야.”
“사랑이지. 욕심부리지 않고 보내주는 거.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대단한 사랑이야.”
“그냥 그건 포기한 거야. 그 여자도, 사랑도. 자신이 선택받을 거라는 확신이 없으니까.”
메말라 거칠어진 목소리에 브릭스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조슈아를 바라봤다. 그는 다시 크리스탈 잔에 호박색 술을 채우고 있었다.
“그럼, 너도 포기한 거야?”
밀도 높은 침묵이 이어졌다. 잔을 들어 천천히 돌리던 남자는 술을 단번에 삼켜 넣었다. 이내 입술을 열었다.
“사랑한 적도 없었어.”
푸핫, 브릭스는 저도 모르게 크게 웃어 버렸다. 온 세상에 보란 듯 티 내고 다녔으면서 늦게나마 부려 보는 오기가 웃겨서 참을 수 없었다.
이어 서늘한 눈동자가 닿자 브릭스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올라오는 웃음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조금 진정되는 듯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사랑한 적 없었으니 그 엉망이 된 상태는 시간이 자연스레 해결해 주겠지.”
브릭스는 다시 조슈아에게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조슈아 옆에 놓인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넘칠 듯 찰랑이는 액체를 그 또한 단번에 들이켰다.
대충 접은 팔소매로 젖은 입가를 닦아 내고는 말했다.
“사람은 또 사람으로 잊는다니까.”
도수가 높은 독주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브릭스의 심장이 시큰거렸다.
“두 번째 결혼을 미리 축하해.”
* * *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당일에 쓸 액세서리를 고르던 켈리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조슈아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전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결혼식 준비를 하는 한 달 동안 남자는 단 한 번도 연락을 준 적이 없었다. 결혼과 관련된 정보를 주는 것은 일종의 통보에 불과했다.
그런데 오늘은 연락이 왔다.
켈리는 이마저도 기뻤다. 그래도 그에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듯해서.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헛된 생각들이 무너져 내린 건, 온실 정원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켈리, 왔구나.”
조슈아의 옆에는 비앙카가 있었다.
그가 직접 자신을 찾은 게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황후의 권유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비앙카는 둘이 좋은 시간을 보내란 말과 함께 곧이어 자리를 비웠으니 말이다.
결국 이 남자에게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상태였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둘만 있는 자리가 몹시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켈리는 차려진 진수성찬을 집어 기계적으로 씹었다. 화려한 빛깔의 음식들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사실은 단둘이 이 남자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황후의 부름으로 황궁을 오가기 시작했을 때는 잠시라도 그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바라는 게 소원이었으니.
그런데 이 남자와 결혼을 한다. 자신이 바랐던 염원에 몇 배는 불어난 결과물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마땅히 이 상황에 감사해야 했다.
그들 사이에 식기의 소리만 들릴 뿐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애초에 조슈아는 인사조차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대신했었다. 그는 이 어색함을 풀 성의조차 없어 보였다.
오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켈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계속 굴린 것이 쓸모없게도 이상한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결혼식이 당장 내일이라니, 믿기지 않아요. 그 자리에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하얀 식탁보에만 향해 있던 남자의 시선이 올라왔다. 붉은 눈망울이 와 닿자 켈리는 일순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무런 대꾸 없이 바라만 보는 눈동자에 홀리듯 그녀는 계속해서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당일에 입을 드레스을 봤는데 너무 화려하더라고요. 좀, 저한테는 과분한 거 같아요. 항상 언니들이 입던 옷만 물려받았었는데….”
“….”
“돈을 정말 많이 쓰신 것 같고…. 그래서 좀 죄송스럽기도 하고요….”
바보 같아, 켈리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제 입을 누군가 콱 틀어막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 바람대로 켈리의 말을 끊어 주었다.
“켈리 양.”
무미건조한 어투였다. 그럼에도 켈리는 저 남자의 입에서 들려오는 제 이름 하나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뒤잇는 말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식사할 땐 조용한 걸 좋아해서.”
최대한 상냥하게 꾸며 냈지만 결국 그 의미는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당황한 켈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푸른색 눈동자를 굴렸다.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네.”
역시 바보 같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정의 내리고는 포크를 들어 앞에 놓인 음식만 휘저었다.
몸이 점차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앞에 앉은 남자와 이 공간은 점점 비대해지는데, 저 혼자 주눅 들어 작아지고 있었다.
옆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복에 겨운 일인데. 분명 그러한데….
켈리는 포크를 내려놓고 식탁보 밑으로 손을 내렸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묻어나 조용히 땀을 닦아 냈다.
몇 분 뒤, 숨 막히는 자리가 파했다. 조슈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속이 안 좋아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맛있게 먹고 들어가세요.”
오늘 첫인사와 같이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마친 남자가 사라졌다.
혼자 남은 공간에서 켈리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몸을 얼리던 긴장감이 사라지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바라 왔던 결혼식이 당장 내일이었으나, 그녀는 웃을 수 없었다.
* * *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아리아드가 사랑이 이어질 가능성을 점지해 준 페이트 성당에서 결혼식은 진행되었다.
중앙에 뿌려진 꽃잎을 밟으며 켈리는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 끝에는 일평생을 염원해 온 남자가 서 있었다.
일순 정신이 혼몽해졌다. 모든 게 꿈인 것처럼.
멍하니 서 있자 조슈아가 다가왔다. 사람들 앞에서 친절을 위장한 남자는 둘만 있을 때처럼 그녀를 방치하지 않았다.
조슈아가 켈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차가운 표정과는 달리 손의 온도는 참으로 따뜻했다.
주례사가 이어졌다. 모두가 손뼉 치며 축하의 말을 뱉고, 또 비난했다. 진정으로 축하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얼음장 같은 이곳의 분위기를 켈리는 모르지 않았다.
그와 손을 맞잡은 채 몸을 돌렸다. 수많은 시선 틈에 켈리는 비앙카와 눈이 마주쳤다. 문득 그녀가 했던 조언이 뇌리를 스쳤다.
‘켈리, 일단 이른 시일 안에 아이를 가지렴. 슬프지만 그래야 비로소 너의 힘이 생길 거야.’
결국 비앙카도 아는 것이다. 그의 마음이 돌아서긴 몹시도 힘들 것이라는 걸.
그래도…. 그럼에도.
켈리는 억누르고 있던 욕심이 조금씩 삐죽삐죽 비집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정해진 형식대로 식은 거행되었고 조슈아는 가까워졌다. 그가 켈리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내 다시 박수갈채가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짧은 순간이 켈리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비현실적이던 남자의 존재가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러자 참고 있던 욕심이 봇물 터지듯 넘쳐흘렀다.
진심 어린 사랑, 이제는 그게 당장이라도 가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