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
크기만 컸던 실속 없는 저택은 확실히 살만해졌다. 얼마 전에 사용인 두 명을 겨우 고용한 덕이었다.
소희는 창문을 열어 놔 불어오는 따스한 바닷바람을 느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들었다. 심심하다는 소희의 말에 사용인 중 한 명이 장을 보러 나갈 때마다 신문을 들고 오곤 했다.
항상 붙어 있던 데온이 없으니 여유롭게 글이나 읽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요즘 신문 메인 기사에는 아리아드의 얼굴이 올라와 있어 데온은 그녀가 신문을 들기만 하면 보지 말라며 화를 냈다. 딱히 그 날카로운 기사 내용에 소희는 타격을 전혀 입지 않는데도 말이다.
여느 때처럼 소희는 노래나 흥얼거리며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여전히 아리아드 피어슨의 이야기는 뜨거운 관심 속에 있었다. 지겹지도 않은지 몇 주에 걸쳐 올라와 있는 것들은 모두 비슷한 내용이었다.
황태자비였던 아리아드 피어슨은 사실 남자 문제로 도망을 갔다더라, 아이를 뱄는데 너무 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서 아이의 부친도 제대로 알 수 없다더라, 황실의 위상을 무참히 떨어트린 아리아드를 황후 폐하께서는 도저히 용서를 할 수 없다더라.
매번 단어만 조금씩 바꿔서 올라와 있는 기사에 오늘은 페트린 후작 부인의 인터뷰가 더해져 있었다.
예전 아리아드 피어슨이 망신을 당했던 개교식 사건은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벌인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황태자비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황후 폐하가 시킨 일은 절대 아니라고.
어찌 보면 아리아드가 다시 돌아올 자리가 없게 노골적으로 자근자근 밟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나의 이슈라도 더 만들어서 말이다.
제 일과는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훑어 내려가던 보랏빛 눈동자가 일순 멈춰 섰다.
새로운 내용의 기사가 소희를 사로잡았다.
[위기를 맞이한 피어슨 가문, 정점에 서 있다 추락하다.]
그 문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희는 제 선택으로 아리아드의 가문이 망하는 것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찌 보면 그 모든 걸 다 따져 보고 선택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리아드와 상관없이 한소희가 원하는 길을 걸을 뿐이니까.
그런데 왜 이리 불편함에 목이 콱 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번 마주했던 아리아드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자 소희는 그 기억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냥 엑스트라일 뿐이잖아. 어차피 본래 이야기대로라면 결국 다 죽을 목숨이었고….”
비집고 올라오는 찝찝한 감정을 합리화를 통해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 소희가 다른 기사 내용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아리, 신문 보지 말라고 했잖아.”
데온이 날카로운 눈매를 더욱 사납게 굳히며 방 안에 들어섰다. 감기에 걸린다고 유난을 떨며 열려 있는 창문을 닫고는 소희가 앉아 있는 침대로 가까워졌다.
데온은 그녀의 손에 들린 신문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리아드의 기사로 도배되어 있는 앞 장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잔뜩 구겼다.
여느 때처럼 종이는 그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왜 굳이 확인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야.”
“알겠어. 이제 진짜 안 볼게.”
심심해서 봤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소희는 정해진 대답을 했다. 그리고 문득 바닥에 뒹구는 신문 조각으로 시선이 닿았다.
수많은 조각 중에 왜 그 하나가 그리 정확하게 눈에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다.
조슈아의 얼굴이 찍힌 흑백 사진이었다. 그 위에 큰 글씨로 적혀 있는 건 그가 곧 재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소희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같은 곳으로 시선을 옮긴 데온도 그 내용을 확인했다.
뒤이어 그의 큼지막한 손가락이 소희의 턱 끝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찢긴 종잇조각에 고정되어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데온의 잿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데온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왜, 이제 와서 나를 선택한 걸 후회라도 해?”
“그럴 리 없잖아.”
정말 아니라는 듯 소희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데온은 이용해도 상관없으니 곁에만 있게 해 달라 했지만, 정말 이용만 당하고 괜찮은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그만큼 아리아드의 곁이 간절하다는 소리겠지.
확고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면 결국 이는 도움을 준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이다. 그걸 잘 알기에 소희는 당혹감을 감추고 태연스럽게 굴었다.
“그냥 기사가 보이길래 읽었을 뿐이야.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곧 내 자리가 완벽히 채워진다니 여러모로 죄책감도 조금 덜어지는 것 같고….”
주절주절 떠들던 말이 한마디로 인해 뚝 끊겼다.
“거짓말.”
데온이 침대에 앉은 소희에게로 좀 더 허리를 숙였다. 여전히 커다란 손이 턱을 잡고 있어 피할 새 없이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리, 거짓말하지 마.”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소희는 다시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그리 변명하려고 벌린 입이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애초에 근접한 거리에서 더 가깝게 내려온 데온의 입술이 그대로 닿아 버린 탓이었다. 속절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소희는 고개를 틀었지만 턱 끝을 쥔 그의 손에 점차 강한 힘이 실려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무의미한 행동 대신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 쪽을 선택했다.
전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험악하게 움직이는 손길은 없었다. 데온도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제 욕구를 무척이나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잡고 있었던 인내의 고삐는 느슨해진 듯했다.
그녀의 뒷머리를 잡고 있던 손이 서서히 목을 타고 내려오다 등줄기에 닿았다. 점차 그 손길이 아래를 향하자 소희는 서둘러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그 움직임이 멎고 입술이 떨어졌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애써 흐트러진 숨결을 가다듬는 소희와는 달리 데온은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다만, 금방이라도 다시 가까워질 것처럼 그 잿빛 눈망울이 한층 깊어져 있었다.
“아리, 후회 한데도 소용없어.”
목을 긁고 나온 언성이 거칠었다.
“난 널 두 번 다시 놓아 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가 다시 가까워지고 입술이 뭉개졌다. 사나운 말과는 달리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던 손길로 다시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잡았다. 꽤 많은 것을 어렵사리 참아 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침대 헤드를 잡은 데온의 왼팔에는 시퍼런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소희는 데온이 왜 이리 갑작스레 분노하는지 영문을 통 몰랐다. 바닥에 뒹구는 신문 조각을 바라볼 때 불현듯 제 얼굴에 스친 표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벗어날 길 없는 입맞춤에 그저 다시 눈을 감았다. 이어 뇌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에 많은 생각들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 * *
짧았던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대륙 북부에 자리한 라트베아의 여름은 다른 지역보다 무척이나 시원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브릭스는 남들보다 더위를 더 많이 타는 탓에 셔츠의 단추들을 잔뜩 끄른 채였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계단을 오른 그는 삼 층에 다다르자 욕을 뱉었다.
“망할 조슈아….”
손아귀에 쥔 서류들이 분노로 인해 잔뜩 구겨진 채였다.
무려 근 이 주 동안 사람들을 보내 꾸준히 서류 검토를 요청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는 거야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은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닌가.
그는 몇 달 전 들려온 조슈아의 소식에 흥미롭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직접 찾아가는 기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얼마나 성질이 사납게 변해 있을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처리해야 할 사업 건으로 결국은 이곳을 제 발로 찾아와야만 했다.
집무실 앞에 서 있던 시녀가 브릭스의 등장을 고하기도 전에 그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풍겨오는 낯선 향기에 그는 얼굴을 구겼다.
공기 중에 여러 향이 뒤섞여 있었다. 평소 집무실에서 나던 종이의 향과 조슈아의 시원한 체취에 더해 지독한 알코올의 향, 떫은 담배의 향, 그것들이 한데 섞여 묘한 향을 만들어 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 또한 생소하긴 마찬가지였다.
테이블 한쪽에는 빈 술병들이 줄지어 있었고, 스테인리스 재떨이 위로 피다 만 짤막한 담배와 담뱃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앞쪽에 자리한 가죽 소파 구석에는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옷더미가 보였다.
허, 브릭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대단해. 천하에 조슈아가 이런 꼴이라니. 난 네가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비현실적인 인간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한쪽 팔을 괴고 종이를 대충 넘기던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어 연기 너머로 붉게 충혈된 흰자위가 보였다. 딱 보아하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듯했다.
브릭스는 거기다 대고 괜히 더 장난스럽게 말했다.
“드디어 인간미가 넘치는 게 정말 보기 좋아 보인다.”
“꺼져.”
“꺼질 테니까 서류 검토는 좀 해 주지그래?”
테이블 쪽으로 걸어온 브릭스는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도착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 앞에 던져야겠다 다짐했던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부드러운 태도였다. 조슈아의 좋지 않은 상태를 확인한 제 몸이 절로 눈치를 본 탓이었다.
조슈아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는 재떨이 위에 비벼 껐다. 그리고 브릭스가 내려놓은 서류 뭉치를 뒤적거렸다.
해당 서류에는 아르센트 가문이 만든 각종 상품의 설명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황태자가 주관하는 커다란 무역 사업을 저격해서 만든 사업안이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조슈아가 마지막 장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안 돼. 상선에 오르기에는 물건들이 너무 허술해.”
“뭐?”
“이 똑같은 서류를 대체 몇 번을 보내는 거야. 답이 없으면 알아서 정리할 것이지.”
조슈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신경질을 냈다. 그에 브릭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말을 잃었다가 욕을 읊조렸다.
망할 새끼.
물론 들리지 않게 말이다.
“저하, 그럼 승인을 못 해 주겠다고 답을 똑바로 해 주시든가요.”
브릭스가 트레이 위에 놓인 물컵을 들고 그 많은 양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러자 화가 나서 부글부글 끓는 속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듯했다.
컵을 내려놓으면서 무역 사업 관련 서류들이 눈에 띄자 브릭스는 그걸 집어 들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물건들이 올라와 있나 보자.”
종이를 넘기던 브릭스는 수많은 품목 사이에 예상치도 못한 것을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명단에 피어슨 가문의 사업 품목이 올라와 있었다.
곧이어 브릭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빠르게 말을 뱉었다.
“투자도 제대로 못 받아서 허술한 사치품들을 찍어 내는 피어슨 가문의 상품은 올라가고, 우리 물건은 안 된다?”
브릭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던 조슈아가 갑작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류를 거칠게 뺏어 들었다.
붉은 눈망울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그 앞에서 브릭스가 잔뜩 빈정거렸다.
“뭐, 도망간 전 부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같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