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
비앙카는 이상하게도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계속해서 조슈아의 묘한 표정이 뇌리에 맴도는 탓이었다.
아들의 마음마저 아리아드에게서 떠났다고 했으니, 그 사실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다방면으로 잘된 일이었다.
그녀는 아리아드의 앙칼진 목소리를 떠올렸다.
‘어떤 것을요. 조슈아의 옆자리요?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꽤 당돌하게 나오길래 골치 아프겠다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애써 손 쓸 필요도 없이 먼저 떨어져 나가 줬으니 아리아드의 형편없는 끈기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 제 주제는 아나 보지.”
윙체어에 앉아 천 위에 꽃 모양을 수 놓고 있던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건너편에 있던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네?”
“아니다. 혼잣말이란다.”
그 말에 켈리는 방긋 웃어 보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비앙카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켈리의 손가락이 하얀 천 위에서 성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제 기준에서 모든 것이 완벽한 아이였다. 내면과 외면 모두.
다만 큰 흠이 있다면 그녀의 핏줄이었지만, 자신이 도와준다면 그 또한 어느 정도 가려질 수 있는 결점이었다.
“기억하니? 내가 도와준다고 했던 말.”
화장 하나 하지 않은 수수한 낯이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무엇을….”
“조슈아의 옆자리에 서게 해 주겠다고 했었지.”
“아, 기억합니다.”
켈리가 주먹에 설핏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아리아드를 찾으러 사라졌던 조슈아의 뒷모습이 생각나 문득 초조해진 탓이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만났을까, 그로 인해 그 남자의 심경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면면하게 이어진 물음표들 끝에 비앙카가 명확한 해답을 주었다.
“결국 아리아드와 이혼한다더구나. 아주 잘된 일이지.”
“아….”
“그때도 말했지만 너에게 부담 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란다.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거, 겉보기엔 화려해 보여도 굉장히 고단한 일이야. 찬양받는 만큼 수많은 질타도 받게 되지.”
자신의 일상을 읊는 담담한 말소리였다.
“그래서 너에게 강요하고 싶진 않구나.”
그렇게 다다른 결론에 켈리는 여태 조용히 경청하다가 입을 열었다. 황후의 마음이 금방이라도 변할까 그녀는 조금 다급해졌다.
“잘해 나가겠습니다. 도와주세요.”
그러한 초조함이 읽혔는지 비앙카가 설핏 웃었다. 그리고 예리한 말을 던졌다.
“조슈아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버티기엔 버거울 거다.”
“그걸… 아시는군요.”
켈리는 눈시울을 설핏 떨며 손에 쥔 헝겊을 쉼 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런 건 이제 이 나이쯤 되면 빤히 보이니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단다.”
비앙카는 달래 주려는 듯했으나 켈리가 다시 침착함을 되찾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슈아가 말하길 그 여자에게서 마음이 완벽히 떠났다는구나.”
거짓말.
켈리는 그리 솔직하게 튀어 나가려는 한마디를 눌러 삼켰다.
“이제 그 빈자리를 너의 능력껏 채워 보렴. 내가 조슈아의 마음을 얻는 것까지 도와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
“사랑이라도 쟁취해야 버거운 그 자리를 그나마 견딜 수 있을 테니.”
비앙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와 함께 켈리의 푸른 눈망울도 아래로 떨어졌다.
테이블 위에 투명 유리잔이 보였다. 그 유리잔 외부에 천을 쥔 켈리의 작은 손가락이 일그러져 비쳤다. 켈리는 그 볼품없이 보이는 제 손가락을 힘을 쥐어 폈다.
처음에는 그저 그 남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내 초반과는 비할 바 없이 커져 버린 마음은 진정 그 옆자리에 서길 바랐고. 결국, 자의든 타의든 그것을 이뤄 냈다.
그다음은….
사랑, 그것을 곱씹던 켈리는 불현듯 아득한 공간을 부유하는 듯했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도 결국 이루어 냈으니 이 또한 다를 바 없을 테지.
시간이 흐르면 모두 해결될 일이라 여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잊히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완벽히 그 여자의 자리를 지워 버리는 게 맞았다. 두 번 다시 재기할 수도 없게. 감히 돌아올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말이다.
거기까지 결론이 다다른 켈리는 유리잔을 바라보던 눈동자를 옮겼다. 또 무언가를 움켜쥐듯 주먹을 꽉 쥔 채였다.
“사실은 아리아드 님이 떠나시기 전에 저를 찾으셨어요.”
비앙카는 여전히 수를 놓는 제 손끝에 집중하고 있었다.
“도망가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죠.”
일순 바늘이 비앙카의 손끝을 찌르자 그녀의 미간이 빠르게 구겨졌다. 곧 비앙카는 천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걸 지켜보다가 켈리는 제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대요.”
그와 동시에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 * *
황태자 궁이 뒤집혔다.
시녀들을 잔뜩 대동한 채 들이닥친 황후 덕이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사용인들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의 사이를 비앙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집무실 앞에 있던 시녀들이 놀라 조슈아에게 고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채였다. 비앙카는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섰다.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평온한 자태로 서류를 뒤적거리던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알고 있었니?”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조슈아의 귓전을 할퀴었다. 늦은 오후 유리창 너머로 들어온 햇볕이 비앙카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 빛으로 인해 붉은 눈동자가 더욱 사납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 앞에서 조슈아가 여유롭게 펜대를 굴렸다.
“아리아드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거 말이다.”
여유롭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여전히 그 상태로 묵묵부답인 것이 답답한 듯 비앙카는 다시 언성을 높였다.
“너는 걔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고 도망간 걸 알고도 그 사실을 숨겨 준 거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아리아드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걔가 직접 그런 소리를 했다더구나.”
이후 또 침묵이 찾아오자 비앙카는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더 가까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무심한 낯에 그녀는 책상을 두 손으로 쾅 내려쳤다.
“조슈아, 결국 그 소문이 다 사실이었구나.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탈출을 감행했다는 소문 말이다. 그 아이의 아빠와 도망이라도 간 모양이야.”
“….”
“그 와중에 넌 미련하게 그 사실을 숨겨 주고 있었니? 알면 알수록 별로라 네가 질려서 놔?”
비앙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멍청한 놈.”
한동안 조용히 그 싸늘한 말들을 듣고만 있던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높낮이 없는 단조로운 음성이 이어졌다.
“다 끝난 일입니다. 결국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특별한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에 비앙카는 속이 더 뒤집히는 듯했다.
분명히 결과적으로는 비앙카가 바라던 바였다.
또한 돌이켜 보면 아리아드가 매킨리 황실의 핏줄을 안고 떠났다는 사실이 여태 찝찝했었다. 그러니 조슈아의 아이가 아니란 사실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다행인 바였다.
그런데 비앙카는 도리어 화를 냈다. 평소 우아한 모습과는 다르게 목에 핏대가 솟아 소리쳤다.
“조슈아, 이건 명백한 황실 모독이야!”
몸의 떨림을 타고 비앙카의 머리 위에 달린 자주색의 꽃장식이 잘게 흔들렸다.
“얼마나 너를 우습게 봤으면, 정말 기가 차서….”
그녀는 자꾸만 한숨이 터져 나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격분에 찬 목소리를 흘려듣는 남자는 도리어 차분했다. 자신이 화를 내야 할 상황임에도 이토록 침착할 수가 없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 여자에 대한 제 마음이 식은 거 또한 사실입니다.”
“아니, 조슈아. 너는 그 와중에 그 아이를 지키고 싶었던 게지. 사실대로 말했다간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비약이 심하십니다. 귀찮아지는 게 싫었을 뿐입니다.”
조슈아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놨던 회색 재킷을 입었다.
“폐하, 저는 일정이 있어서 먼저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스쳐 지나가려는 것을 비앙카가 잡아 세웠다.
“조슈아!”
멈춰 선 그가 목을 꽉 조이고 있는 타이를 밑으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작게 읊조렸다.
“최대한 조용히 흘러가게 제발 내버려 두세요.”
“넌 그 아이를 끝까지 감싸는구나.”
“감싸는 게 아니라 제가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동네방네 버려진 황태자라고 기사가 나가서 불쌍하게 비춰질 제 모습이 싫어서요!”
무감하기만 하던 그의 낯에 드디어 표정이 실렸다. 또렷한 검은색 눈썹이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그러니 폐하, 제발. 최대한 조용히 부탁드리겠습니다.”
팔을 잡고 있던 비앙카의 손에 힘이 풀리자 그는 망설일 것 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허공에 있던 그녀의 손이 밑으로 축 늘어졌다. 그와 함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기는 소리. 어디 이 어미를 속이려고.
너른 등에 대고 비앙카는 말했다.
“아이를 가지고서야 두려워 도망간 게 참 그 아이다워. 뻔뻔하기 짝이 없지.”
일순 방을 빠져나가려는 그의 두 다리에 속도가 붙었다.
“인정해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작 그 정도라는 걸.”
마치 뒤에서 들려오는 뼈아픈 일침에 도망치려는 듯이.
* * *
조슈아는 일정을 모두 마치고 궁궐로 돌아왔다. 피곤함에 저도 모르게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이다가 방문을 열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아리아드의 침실이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서웠다. 단지 그 몇 달 동안 동침했을 뿐이었고, 따지고 보면 그리 긴 시간 애정을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조슈아가 방 중앙까지 걸어와 남아 있는 가구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매일 같이 청소를 하는지 가구들 위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여태 회피하듯 들어서지도 않던 공간이었다. 그녀가 떠난 지 대략 한 달이 넘게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기 중에는 라벤더 향이 짙게 스며 있는 듯했다.
그걸 느끼자 갑작스레 피곤함이 몰려왔다. 머리가 뺑뺑 도는 게 편두통이 이는 거 같기도 했다.
조슈아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 쥐며 협탁 위에 놓여 있는 호출 종을 흔들었다. 그 소리에 방을 들어온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방에 있는 가구들이랑 물건들 싹 다 버려 주세요.”
한때 달콤했던 체취는 이제 두통만 남겼다. 그러니 몇 개 없는 물건들이라도 치우면 이 머리 아픈 향이 사라지지 않을까.
가구들이 하나둘 빠지는 것을 보며 조슈아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 공간을 빠져나왔음에도 여전히 기분 나쁜 잔향이 코끝에 머물렀다.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벽면에 세워져 있는 그림이 곧바로 눈에 띄었다.
조슈아는 충동적으로 구석에 세워 둔 그림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오른편에 놓여 있던 뾰족한 펜촉을 들어 올렸다. 아리아드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펜촉을 잡은 손이 오래도록 공중에 떠 있었다. 차마 내려찍지 못해 방황하는 제 손이 우스워 자꾸만 자조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끝내 허공에만 맴돌던 손이 펜을 거칠게 던졌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펜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동시에, 그 움직임으로 인해 재킷 주머니에 담겨 있던 물건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보고 조슈아가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거렸다.
그 와중에 빨간 속옷이었다.
아리아드의 빨간 속옷.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올렸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등 위로 뼈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화풀이하듯 조슈아는 큼지막한 손으로 속옷을 잔뜩 구겼다. 그리고 테이블 옆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짜증 나는 그림도, 이 어이없는 속옷도.
그녀가 남기고 간 모든 건 다 버릴 예정이었다. 고작 이 두 개뿐이지만.
그래야 요즘 따라 심해진 이 지긋지긋한 편두통이 사라질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