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54화 (54/120)

Chapter 54

소희는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때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라트베아 도시에서 출발하여 이 시골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도 안개가 뿌옇게 껴 있었다. 그래서인지 초목에 싹이 돋았음에도 날씨가 매우 서늘했다.

하루 종일 달려와 고단하고 으슬으슬 떨려 오는 몸을 당장에라도 누이고 싶었다. 그렇게 거대한 저택 입구에 들어섰을 때 도착했다는 안도감으로 온몸에 힘이 풀릴 정도였다.

그런데.

“…데온, 저택이 왜 이렇게 어두워?”

칠흑빛 밤, 어둠 속에 잠긴 것은 저택 안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썰렁한 것이 밖보다 실내의 온도가 더 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데온이 촛대를 찾아 금방 불을 붙였다.

소희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가구들만 놓여 있는 틈에 한기가 서려 있었다.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만진 소희는 경악했다. 오랫동안 관리되지 못한 듯 새까만 먼지가 묻어났기 때문이다.

“설마, 아무도 없는 거야?”

주황빛이 일렁이며 그의 만면을 환하게 밝혔다. 그는 겸연쩍은지 멋쩍은 미소를 지은 채였다.

소희가 크게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데온은 뒷일을 딱히 생각하지 않는 충동적인 캐릭터였다. 그런 그를 따라오며 완벽하게 세팅을 마친 집을 상상하고 있었던 자신이 조금 우습게 보였다.

그래, 그가 틀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아리, 나랑 살자. 저기 지방 근교에 저택도 지어 놨어. 너를 위해서.’

분명 지방 근교에 아리아드를 위해 저택을 지어 놨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저택이 깨끗하고 따뜻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공작 지위, 지금 하고 있는 사업, 날 따르는 사람들, 다 버릴 수 있어.’

그리고 지위, 사업, 따르는 사람들까지 버릴 수 있다더니 정말 다 버리고 왔다. 관리해 주는 사용인이 한 명도 존재치 않았으니 그는 자신이 한 말을 모두 지킨 셈이다.

허허, 소희가 헛웃음을 뱉으며 추워 닭살이 오른 팔뚝의 살갗을 쓰다듬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데온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리, 걱정하지 마. 내가 금방 일할 사람은 구할 거고 오늘만 버티면….”

“돈은 버리지 않고 챙겨 왔지?”

“돈은 챙겨 왔어.”

“그거는 참 다행이네.”

하기야, 그도 급하게 왔을 테니 뒷일을 꼼꼼하게 생각하기엔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잊지 않고 돈이라도 챙겨 온 것에 감사해야 했다.

데온은 정말 걱정하지 말라 했던 말을 지키려는 듯 직접 장작을 구해 와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서툴러 보였지만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먼지가 쌓여 있는 이불을 힘껏 털어 그녀가 잘 곳도 마련해 주었다.

침대에 눕자 불을 지폈음에도 아직 한기가 사라지지 않아 몸이 잘게 떨려 왔다. 그러자 계속 아리아드만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금방 가까워졌다.

온기를 나눠 주려는 듯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소희를 그 품속으로 꽉 끌어안았다.

“해가 뜨자마자 일할 사람을 알아보러 나갈게.”

눈치 없고 계획 없는 남자가 문득 다르게 보였다. 아리아드의 한에서는 그는 매번 설정값의 그 이상을 보여 주었다.

까무룩 잠이 들면서도 소희는 고맙다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예상치 못한 변수가 또 불쑥 찾아왔다.

일어나자마자 마주한 데온의 얼굴은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짙은 눈썹의 끝이 밑으로 축 처진 채였다.

“시골이라 일할 사람이 없네…. 사람을 구하려면 여기서 한참 나가야 할 거 같아서 오늘 당장 구하기는 힘들 거 같아.”

그 말의 끝맺음과 동시에 꼬르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소리가 울렸다.

생각해 보니 꽤 오랜 시간 공복이었다. 아리아드의 몸은 심지어 홑몸도 아닌지라 이대로 계속 쫄쫄 굶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잊지 않았는지 데온은 바닥에서 식자재를 싸 온 종이봉투를 들어 올렸다.

“아리, 걱정하지 마. 일단 아침은 내가 만들어 줄게.”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씩씩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소희는 생각했다. 그 어떠한 것보다 지금이 제일 걱정된다고.

무거운 몸을 일으킨 소희는 다급하게 데온을 쫓았다.

먼지 쌓인 주방에 도착한 그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식자재를 올려 두려고 했다.

“잠깐!”

“응?”

“먼지를 먹을 건 아니니까 닦고 올려놔야 하지 않을까?”

“아하.”

어디선가 찾아온 걸레로 그는 나름 성실하게 먼지들을 없애 나갔다.

소희는 매우 엉성해 보이는 그의 모양새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저 또한 요리를 전혀 하지 못하지만, 차라리 라면이라도 끓여 본 자신이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한 불안감은 얕게 이어지다가 화려한 불 쇼가 이어졌을 때 절정에 달했다. 데온은 그렇게 집을 몽땅 태워 먹을 뻔했다.

* * *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정확했다.

데온이 저택에서 일할 사람을 찾으면 모두 해결될 문제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이 시골 마을에서 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몇 없었고, 그 몇 명마저 거대한 저택의 크기를 보고는 기겁하며 달아나 버렸다.

결국 초반에는 식자재를 조리하지 못한 채 생으로 씹어 먹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 이랬던가.

어쩌면 아리아드를 잘 챙겨야겠다는 데온의 책임감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의 서툰 걸레질은 몇 주가 지나자 완벽해졌고, 쓰레기 맛이 나던 음식들은 특출나게 맛있진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런 데온의 노력으로 인해 엉망이었던 저택도 살만한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몸이 이 생활에 익숙해졌을 때쯤 완연한 봄으로 접어들었다. 생기가 넘치는 경치를 배경 삼아 그들은 자주 산책을 나갔다.

그날은 유독 봄볕이 따스했다. 시선을 바다로 고정한 채 걷는 소희와는 다르게 데온의 신경은 온통 아리아드에게 쏠려 있었다.

문득 눈길을 내려 어느 정도 부푼 아리아드의 배를 바라보던 불쑥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이의 이름은 생각해 둔 게 있어?”

푸른 바다에 닿아 있던 보랏빛 동공이 데온을 한 번 훑고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로 향했다.

소희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위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라즈네.”

“예쁜 이름이네.”

“기적이라는 뜻이래.”

그들은 그렇게 바닷가 주변을 두 바퀴 더 돌고 저택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라며 데온이 발길을 돌린 탓이었다.

“한 바퀴 더 돌면 안 돼? 날씨가 너무 좋아서 들어가기가 싫다. 딱 한 바퀴만 더.”

“점심 먹고 다시 나오자. 배고프잖아.”

“네가 어제 해 준 생일 케이크를 집어 먹었더니 배는 별로 안 고파.”

“아리, 너 그 케이크에서 화장품 맛이 난다고 몇 입 먹다 말았잖아.”

“아니야….”

민망한 듯 말끝을 흐린 소희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서운해하지 마. 마음은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까. 생일에 누가 이렇게 챙겨 주기는 오랜만이거든.”

그리고 활짝 웃어 보였다. 그 해사한 미소를 따라 데온도 바보같이 웃다가 불현듯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리, 무슨 소리야. 내가 작년에도 챙겨 줬잖아. 그러고 보니까 생일이 3월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뭐지, 그는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답지 않게 꽤 예리한 지적이었다.

소희는 눈이 잠시 동그래졌다가 금방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데온에게는 왜인지 모르게 어떠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안한 마음에서 비롯된 생각일까.

소희도 자신이 이 순간 왜 이리 태연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조슈아와 대화하는 도중이었다면 땀을 한 바가지를 쏟았을 텐데 말이다.

“내 생일은 3월이야.”

당당하게 나오니 데온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던 것을 멈추고 금방 수긍하였다.

그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저택을 향하고 있었다. 당시에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였다.

그리고 나흘 뒤, 우편이 왔다.

아리아드 피어슨에게 온 연갈색 서류 봉투였다. 내용물을 확인한 소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정체는 이혼 서류였다. 조슈아의 인장이 찍힌.

서류 봉투 위에는 익숙한 글씨가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생일 축하해.’

머리를 굴려 도망친 자신이 우스워 보일 정도로 담담한 마지막 인사였다.

* * *

다이닝룸에 하프의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음악을 흘려들으며 조슈아는 대충 자른 고기를 씹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턱을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황후 폐하의 부름이 있던 아침, 그는 그녀가 왜 자신을 찾는지 어렴풋이 예상하였다.

황태자 궁궐 담장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 퍼진 기괴한 소문. 아리아드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테지.

조금씩 새어 나가는 이야기는 조슈아의 귀로 다시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 소문을 필사적으로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로 인해 아리아드의 명예가 어떻게 곤두박질치는지 또한 이제는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비앙카가 샴페인을 들어 삼키고는 운을 뗐다.

“아리아드 그 아이가 그렇게 몸이 안 좋은 거니?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한 거 같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조슈아는 고기를 오래도록 씹었다. 그리 질기지 않음에도 삼키기가 버거운 탓이었다.

비앙카는 그곳에서 그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유리잔을 기다란 손톱으로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더구나. 그 아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탈출을 감행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판국이야.”

조슈아는 결국 옆에 놓인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제야 삼켜지지 않던 고기가 목 끝으로 넘어갔다.

“그런 망측한 소문이 도는데 몸이 많이 안 좋더라도 얼굴 한 번 비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구나. 여러모로 황실의 체면이 서지 않는 이야기니까.”

“몸이 안 좋은 게 아닙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리아드는 황성에 없어요.”

제삼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듯 너무도 건조한 언성이었다. 비앙카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뒤이어 실소를 뱉었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리네요.”

그는 남아 있는 스테이크 덩어리를 칼로 다시 조각냈다. 단 한 순간도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비앙카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였다.

느릿한 행동만큼이나 여유로운 말씨가 이어졌다.

“남자와 관련된 건 아닙니다. 그냥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대로 아리아드 그 여자, 알면 알수록 별로라 제가 질려서 놨습니다.”

“뭐?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황당해하며 언성을 높이는 비앙카의 말을 조슈아가 뚝 끊었다.

“이혼하겠습니다.”

그가 더 이상 고기를 썰지 않고 칼을 내려놨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결말입니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냐고 묻듯 조슈아는 그 앞에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비앙카는 그 오묘한 미소에 더 어떠한 추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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