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53화 (53/120)

Chapter 53

켈리는 자꾸만 제 행동들이 우스워 입안에 실소를 머금었다.

‘사랑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장소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가고 안 가고는 켈리 양의 선택이지만요.’

다소 황당한 말이었다. 그런데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 결국 이 성당 앞으로 자신을 이끌었다.

그 여자를 증오하면서도 휘둘리는 느낌이었다. 또 그 여자를 미워하면서도, 닮고 싶었다.

사랑이 이어질 가능성이라는 거, 결국 조슈아는 아리아드를 사랑하니까 그녀를 닮으면 그 가능성이 커지는 거 아니겠냐는 멍청한 생각까지 했었다.

성당 입구 옆 커다란 유리창에 제 얼굴을 멀뚱히 비춰 보던 켈리는 자꾸만 허탈한 웃음이 비집고 올라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아리아드의 짙은 이목구비를 흉내 낸 웃기는 화장이었다. 제 순한 이목구비와는 어울리지도 않는.

이젠 하다 하다 아리아드의 대타가 되어서라도 사랑받고 싶어 하는 제 모습이 꼴불견처럼 보였다.

“저하, 찾았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켈리는 들려온 말에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녀가 찾던 남자가 서 있었다.

켈리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무작정 쫓았다.

아리아드는 해가 저물어 갈 때쯤 페이트 성당 기도실에서 조슈아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하지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가 두 번 다시 이 성당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묘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조슈아를 쫓는 보폭이 점점 넓어졌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내려가다 자꾸만 초조해지는 마음에 두 계단, 세 계단씩 위태롭게 뛰어 내려갔다.

마음만큼 따라 주지 않는 몸이 쉼 없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앞을 막아섰을 때,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다소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아리아드 님을 찾으러 가시나요.”

이 남자는 그 여자가 품고 있는 것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모르겠지.

“먼 길 가지 마세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아리아드를 찾아갈 수 있을까.

“굳이 그렇게 시간을 투자할 가치 있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 더럽고 형편없는 모습도, 이 남자는 사랑할 수 있을까.

대답 대신 그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 하나에 켈리의 심장이 저 밑으로 쿵 하강하는 듯했다.

알고 있을 리 없겠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해서.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를 원하는 듯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어떠한 남자가 그 무도막심한 행태를 너그럽게 봐주고 넘어갈 수 있을까. 대단하신 위인을 불러온다 해도 그들 또한 쉬이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터무니없는 생각들이 켈리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리아드가 어떠한 여자여도 상관없다는 남자의 대답이 이어질까 봐. 겨우 움켜잡은 듯했던 희망 하나가 그대로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 싫어서.

그래서 아리아드의 비밀을 그 앞에서 고자질하기가 두려웠다.

목이 메어 와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자 어느새 조슈아는 그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간 채였다.

결국 켈리는 그런 그를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냈다. 허겁지겁 달려온 노력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멀어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다 일순 다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리아드의 말을 듣고 이곳까지 찾아온 제 모습이 너무나도 멍청해 보인 탓이었다. 가치 없는 여자라 칭하면서도 아리아드를 닮고 싶어 그녀를 흉내 낸 것 또한 그랬다. 정작 이 순간 제일 형편없는 건 본인이었는데.

그걸 깨닫자 켈리는 속이 몹시도 메스꺼웠다.

‘웃기게 들리겠지만 켈리 양의 짝사랑이 쌍방이 되길 바라죠. 진심으로.’

그 여유로웠던 언성이 뇌리를 스쳤다.

자신은 닿을 수 없어 끊임없이 발버둥 치는 와중에 저 혼자 참으로 고고한 여자. 감히 용기조차 내지 못할 만큼 어려워 보이는 그 남자의 마음을 손쉽게 쥐어 놓고 결국은 그 곁을 떠나는 선택을 한 여자.

한없이 쉽고 여유로운 행보들이 기를 쓰는 자신의 태도와 비교되어 불쾌했고 불편했다.

결국은 이렇게 열등감이 집채만큼 불어나 거대한 덩어리가 될 만큼.

‘저는 당신들의 사랑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길 바라요.’

불어오는 미풍에 아리아드의 언성이 실려 귓전을 맴돌았다.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사나운 어투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아리아드.”

켈리는 아리아드를 따라 했던 모습을 감추려는 듯 제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이지러진 만면 위로 아리아드의 입술 색을 닮은 새빨간 루주가 형편없이 번져 갔다.

* * *

조슈아가 도착한 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꼬박 하루를 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려왔을 정도로 도시와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거대한 저택의 정문 쪽으로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눈 부신 햇살이 파도의 포말 위로 부서져 내렸다.

그곳에 가까워지며 살핀 정경은 그렇게 안온했다. 그때까지 조슈아의 기분은 그 쾌청한 날씨와도 같았다.

“건물 내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이 와서 고하자 조슈아는 뾰족하게 솟아 있는 대문을 두어 번 흔들어 잠겨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직 봄인데도 불구하고 햇볕이 조금 따가웠다. 해변과 저택 사이 심겨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발견하고 그는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기서 기다리죠.”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무슨 말을 먼저 하지, 언성을 높여 화부터 내야 하나, 그냥 무작정 팔을 잡고 끌고 와야 할까, 그 삼 주간 수없이 상상했던 재회의 장면들이었다.

때마침 기다리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한 바퀴 더 돌면 안 돼? 날씨가 너무 좋아서 들어가기가 싫다. 딱 한 바퀴만 더.”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날씨만큼이나 청량한 말소리가 귓가에 또박또박 꽂혔다. 조슈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그 멀리에서 보얀 얼굴의 옆모습이 보였다.

여인의 하늘색 원피스 자락이 산들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물결치자, 그에 볼록한 배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 옆으로는 작은 손이 다른 남자와 꽉 맞잡은 채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조슈아의 이성은 새까맣게 물드는 듯했는데.

곧이어 그녀가 웃었다.

“그래도 서운해하지 마. 마음은 충분히 받았으니까. 생일에 누가 이렇게 챙겨 주기는 오랜만이거든.”

봄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살랑이는 보랏빛 잔머리 아래, 아름다운 얼굴 위로 참으로 해사한 미소가 띠어졌다.

“내 생일은….”

문득 조잘조잘 들려오던 말소리가 점차 희미해지다가 뚝 끊기는 듯했다. 분명 그들의 입술은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데 더 이상 그 어떠한 대화도 들리지 않았다.

난데없이 찾아온 망연함이었다.

시야에 닿는 모든 것들이 느릿하고 흐릿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상하게도 그 여자의 말간 미소만이 또렷하게 확대되었다.

일순 그녀가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금방이라도 그렇게 눈이 마주칠 것 같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나무 기둥 뒤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얼마 뒤, 그는 문득 제 꼴이 우습게 느껴져 피식거렸다.

난 대체 왜 숨은 거지….

자신도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뒤늦은 자책이 서렸다.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이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그는 메마른 한숨을 흘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분명 다짐했었는데.

가둬야지, 묶어 놔야지, 몸만이라도 가져야지. 그 여자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되찾아 오면 그만이라고.

그런데 갑작스레 왜 이 모든 다짐들이 까마득해지는 건지.

그가 나무 기둥에 가볍게 머리를 기댔다. 와이셔츠의 뒷면이 구겨지고 왁스로 고정한 칠흑빛 머리카락들이 흐트러졌다.

빽빽하게 자라난 나뭇잎들 사이로 드문드문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 줄기 빛이 눈시울에 와닿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오른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제 얼굴을 가리듯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거처럼 그리 망연해지는 것은, 아마도 껴들 곳 없어 보이는 그 안정감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버린 탓일 것이다.

그녀의 모습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행복해 보여서. 또 자신과 있을 때 자주 긴장하던 모습과는 달리 저 자리가 한결 편안해 보여서.

따사로운 햇볕 아래 웃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 아름다운 그림 속에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는 존재치 않는 듯했다.

그들은 그렇게 조슈아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저하, 대체 왜 가만히 있으십니까.”

초조한 마음에 기사단장이 재촉했다. 그러나 조슈아는 여전히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두 눈 위에 오른팔을 얹은 모양새로 굳어 버린 듯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적이 이어졌다.

그가 말문을 연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안 될 것 같아요.”

조슈아는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던 감정들이 점차 저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묶어 놓고 몸만 가져도 될 것이라는 너절한 소유욕이 저 여자의 미소 하나로 허물어졌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무너져 버린 다짐들 위로 다시금 인지한 사실이 견고하게 자리했다.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라서….”

그래, 애초에 그가 갖고 싶었던 건 저 진심 어린 미소였다. 나만 바라보는 찬란한 눈망울, 해말간 미소, 사랑해 주는 마음, 결국 강제로 취하면 절대로 얻지 못할 게 분명한 것들.

그걸 꽤 오래전에 깨달아 놓고도 그 여자를 원하는 강렬한 마음에 다소 충동적인 행동을 할뻔했다. 결국은 놓아 주어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라도 있는 것들이었는데.

제 손아귀 안에 욕심껏 틀어잡아 망가지는 것은 싫었다. 원하던 것들을 눈앞에서 직접 마주하고 나니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귓가에 흐릿하게만 들려왔던 파도 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망막에 맺힌 해말간 미소는 좀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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