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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52화 (52/120)

Chapter 52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때 조슈아는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모습도 제 부인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사람치고는 느긋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사용인들의 증언을 들으며 그의 기다란 다리의 끝에 놓인 윤기 나는 까만 구두가 느릿하게 까딱거렸다.

“납치당했을 가능성은?”

“수상한 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궁 정문과 후문 쪽도 기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나가셨을 가능성도 적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 발로 직접 궁에 있는 몇십 개의 방을 거닐 때도 한없이 한가로워 보였다.

물론, 그를 잘 모르는 사용인들 눈에나 그리 보였을 것이다.

조슈아의 뒤를 쫓는 메이컨은 이미 그 상태가 나사 하나 빠져 있는 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산책을 하듯 넓은 궁을 돌고 정원과 숲길 사이도 거니는 발길은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도 멈춰 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하, 벌써 세 바퀴나 도셨습니다.”

“어디서 잠이 든 걸 수도 있어요. 임신하면 잠이 많아진다니까.”

사방이 어두워지자 그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결국 메이컨은 그의 팔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그에 의해 조슈아의 손에 들려 있던 등불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제 생각엔… 궁을 나가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나가요. 아무도 못 봤다잖아.”

“주방에 있던 사용인들이 그곳에서 아리아드 님을 마지막으로 목격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소라면 조슈아는 작은 단서 하나만 가지고 여러 가지를 유추해 내 결국 그중에서 정답을 골라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리는 작동을 멈춘 듯했다.

메이컨은 그의 상태를 알아채고 자신이 유추한 내용을 말했다.

“열두 시경에 주방에서 아리아드 님과 마주쳤다고 했으니 아마 식료품을 운송하는 마차를 타고 나가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체 왜요.”

“…네?”

짤막한 대꾸에 메이컨이 되물었다. 그러자 다시 심상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애써 현실을 부정하듯 그는 여유로운 낯을 꾸며 내고 있었다.

“나갈 이유가 없잖아요.”

“….”

“그러니까 직접 제 발로 나간 건 아닐 겁니다.”

조슈아는 허리를 굽혀 떨어졌던 등불을 주웠다. 그리고 다시 묵묵하게 제 갈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궁전과는 조금 떨어진 숲길까지 걸어 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출발지였던 집무실에 도착한 것은 두 시간 뒤였다.

아무런 소득 없이 다다른 곳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가 습관처럼 모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저하.”

주방장이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제가 아리아드 님의 행방을 압니다.”

* *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텅 빈 아리아드의 방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던 날들이 쌓여 가다가 결국 조슈아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스스로 나갔다.

식자재를 나르던 마부의 증언은 더 이상 현실을 회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초라한 행색인지라 황태자비님일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황성 입구 앞에서 내려 달라 하시기에 내려 드렸고, 그곳에 어떤 남성분과 만나시는 것까지 봤습니다. 정확한 외양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키가 대단히 크셨던 걸로 압니다.’

남자, 또 그놈에 남자.

마부의 말을 상기하다가 조슈아는 피식거렸다.

안정적으로 움직이던 펜대가 그의 손에 의해 흔들리자 종이 위가 새까만 잉크로 잔뜩 물들어 갔다.

곁에 영원히 있을 거라며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여자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제 정말 제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널 좋아해.’

그 여자의 말소리가 여태 귓가에 생생했다.

그런데 대체 왜 떠나, 아리아드.

쓴웃음이 자꾸만 그의 입매에 걸렸다.

당시에 그 언성이 설핏 떨려 왔던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그 말이 너무나도 달콤해 부정하지 않고 새겨 넣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자신이 상당히 멍청했다.

그 여자가 직접 머리를 굴려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리아드의 행방이 묘연해지기 하루 전, 분명 그들은 미래를 그리는 말을 이어 가며 서로를 안고 잠들었으니까.

아니, 사실 자신은 가끔 비추던 그녀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도 이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바보 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제 행동을 반추하며 후회하길 반복했다.

차라리 가둬 둘걸. 옆에 묶어 둘걸. 그냥 몸이라도 가질걸.

더 욕심만 내지 않았어도 애초에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다시 그 여자를 되찾아 오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달콤한 말에 속지 않고, 터무니없이 관대해지는 제 마음도 틀어잡고, 곁에 꽁꽁 묶어 두면 그만이었다.

마음? 이제 그딴 건 개나 주라 해.

펜을 쥔 그의 손에 잔뜩 힘이 실렸다.

메이컨은 실성한 사람처럼 자꾸만 피식거리는 조슈아의 눈치를 살피다가 정리한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분위기를 풀고자 가벼운 말을 던졌다.

“무얼 그리시는 겁니까? 그림에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밀린 업무를 뒤로하고 조슈아가 잡고 있었던 건 거대한 도화지였다. 아리아드의 나체가 담겨 있던 그림 위로 새까만 잉크가 덧대어 올라갔다.

“옷을 입혀 주고 있어요.”

조슈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뻐서 태우진 못하겠고, 추워 보이긴 해서.”

힘없이 늘어지는 말소리에 메이컨은 그저 말을 아꼈다.

사각사각, 정적만 이어지는 방에서 다시 그의 펜촉이 움직이는 소리만 오래도록 들렸다.

그렇게 살 색 풍경이었던 도화지 위로 엉성해 보이는 검은색 드레스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쯤이었다.

기사단장이 정보를 들고 왔다. 유쾌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예상하셨던 대로 오르딘 지역으로 갔던 필트모어 공작도 하루아침에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사라진 날이.”

“3월 4일 낮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오르딘 지역은 이곳 라트베아까지 말을 타고 꼬박 이틀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데온 필트모어가 사라진 날은 3월 4일, 아리아드가 사라진 날이 3월 6일.

인정하고 싶지 않던 사실이 기분 나쁘게 정확히 들어맞았다.

조슈아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제 실수를 자책하는 웃음이었다.

역시, 계속 가둬 두는 게 맞았는데.

조슈아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메이컨, 그가 최근에 거래한 부동산 매매 내역이 있는지 보고해서 올리세요.”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은 명확했다. 아리아드를 찾으면 예전과 같은 실수는 없을 거라는 다짐도 함께였다.

그렇게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여자를 다시 제 옆으로 데리고 올 수 있을 거라는 확신.

확고한 생각과 상상으로 조슈아는 몇 주를 버텨 냈다.

하지만 붙잡고 있던 가능성이 몽땅 산산조각이 난 것은, 정확히 삼 주가 흐른 뒤였다.

* * *

색유리를 통과한 무지갯빛이 성당에 모인 사람들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추모식이 시작되기 직전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문득 맨 앞자리에서 선대 황제들의 조각상을 살피던 비앙카는 정면만 응시하며 입술을 뗐다.

“아리아드가 많이 아프긴 한가 보구나. 이 중요한 날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비아냥거리는 어투에도 조슈아는 여전히 건조하게 답했다.

“임신을 하지 않았습니까. 한창 몸을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황실의 안주인 될 사람이 그렇게 매일 같이 아파서야 원.”

쯧, 비앙카가 혀를 차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그는 속으로 자신이 한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틀어막았다.

한창 조심해야 할 시기에 그 여인은 무얼 하고 있을까. 자신도 그 행방을 모르면서 되는 대로 지껄인 것이 우스운 탓이었다.

조슈아는 아리아드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꽤 오랜 시간 동안 감추고 있었다. 황태자 궁 밖으로 흘러 나갈 시에 큰 벌을 내리겠다는 명이 통한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를 다시 데려올 수 있다는 확신으로 무려 삼 주를 숨겨 왔다. 어차피 그녀를 찾기만 하면 본래 일상으로 돌아갈 텐데 굳이 일을 시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또 그렇게 되기까지 며칠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며칠 전 데온 필트모어의 부동산 매매 내역을 확보한 그는 자신의 목표에 가까워졌다고 여겼다.

반년 전 새로 구매한 저택이 세 채가 있었고 아리아드는 분명 그 세 곳 중 한 군데에 있을 테니까.

이제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상태였다. 벗어난다고 떠나갔겠지만, 모든 건 여전히 제 손아귀에 있었기에.

추모식이 끝나자 조슈아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성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냥한 미소로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당 입구를 빠져나오자 가파른 계단 아래에서 기사단장이 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기다리던 정보가 도착한 듯했다.

“저하, 찾았습니다.”

봄볕이 부드럽게 휘어진 조슈아의 입매를 밝혔다.

결국 제 손아귀였다. 이 정도의 일탈 정도는 용서해 줄 만하다는 너그러움마저 샘솟는 기분이었다.

‘아리아드, 넌 날 벗어날 수 없어.’

그녀의 생각 따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 여자의 표정이나 감정 따위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서든 다시 데리고 올 작정이었다.

느릿하던 그의 발걸음에 드디어 힘이 실렸다. 이어 속도가 붙어 계단을 내려가는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그곳에 여유로움을 가장한 초조함은 지워지고 희망만이 실려 있었다.

그렇게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였다.

곱게 반묶음을 한 금발의 여인이 그 앞을 막아선 것은.

“아리아드 님을 찾으러 가시나요.”

예상치 못한 이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그가 지나치려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수수했던 본래 분위기와는 다르게 힘을 줘 화장한 낯이었다. 켈리는 빨갛게 바른 입술을 열었다.

“먼 길 가지 마세요.”

“….”

“굳이 그렇게 시간을 투자할 가치 있는 여자가 아니에요.”

조슈아는 대답 대신 다른 것을 남겼다. 피식, 옅은 콧바람이 켈리에게 닿았다.

저 여자가 어떻게 아리아드가 사라진 사실을 아는지 다소 의문이 들긴 했지만 중요한 건 그따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제 앞을 막아선 이의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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