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51화 (51/120)

Chapter 51

약속했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나온 소희는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그 뒤를 메리가 빠르게 쫓았다.

“메리, 지금 시녀장에게 이것 좀 전달해 줄 수 있을까?”

품에 넣어 놨던 편지를 꺼내 메리에게 건네자 그녀는 활기찬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소희는 멀어지는 메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의 방향을 틀었다. 자신이 향할 곳은 아리아드의 방이 아니었다.

홀로 일 층으로 걸어 내려와 주방에 들어섰다. 사용인들이 황태자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헐레벌떡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허리를 굽혔다.

깔끔하게 정리된 내부를 살피다가 소희가 말했다.

“혹시 식료품 창고가 어디 있죠?”

“창고는 이쪽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가 불쑥 튀어나와 흐릿한 대꾸를 했다. 공손한 자세를 갖추려고 두 손을 모았지만 계속해서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단순히 높은 사람이 들이닥쳐 나오는 당황스러움이 아니었다. 소희는 그것까지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당신이 주방장인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창고로 안내해 주세요.”

한껏 초조해 보이는 뒷모습을 따라가며 소희는 제 계획을 다시 상기시켰다.

일단 창문의 통로는 봉쇄당했고 황태자궁의 정문과 후문 역시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황성의 입구까지 갈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숨어서 나가는 것.

소희는 식료품을 운송하는 마차에 타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설정해 둔 시간에 따르면 식료품을 실은 마차가 들어오는 것은 12시였고, 떠나는 시간은 30분 뒤였다.

이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짜 놨던 켈리의 에피소드 덕이었다. 황태자비가 된 켈리는 주방장의 비리를 잡아내고 황궁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다.

주방장은 황실에서 지정해 준 식료품 업체가 아닌 자신의 친척이 운영하는 곳으로 업체를 변경하였다. 그리고 음식 재료에 쓸 돈을 조금씩 빼돌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희가 식료품 마차에 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이거였다.

협박.

[켈리는 식료품 창고 오른편 서랍에서 조작된 장부를 발견했다.]

소희는 자신이 써 놨던 구절을 떠올리며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서랍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비, 비저하! 잠시만요!”

주방장이 황급히 커다란 덩치로 소희와 서랍 사이를 막아섰다.

“뭘 숨겨 놨길래 이렇게 발발 떠실까나?”

“그게 아니라….”

“제가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와서 이러는 거 같아요?”

소희는 그 앞에서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내부 고발자가 있어서 이미 다 알고 왔다 이겁니다.”

“…내부 고발이요?”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리고 곧장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육중한 소리가 창고를 흔들었다.

“비저하, 선처 부탁드립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걸린 적이 있어서… 이번에 발각되면 정말 잘립니다. 저에게는 부양할 가족이 있습니다. 한 번만 눈 감아 주시면…!”

어찌나 절절하게 빌어 대는지 비벼 대는 손바닥에 불이 피어오를 지경이었다. 남자의 작은 눈에 눈물까지 맺히려고 하자 소희는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당황한 채였다.

“아니, 일단 일어나 봐요….”

곧이어 남자가 아리아드의 드레스 밑단을 부여잡고 매달렸다. 이대로 두다간 멀쩡한 드레스가 걸레짝이 될 것만 같았다.

“알겠으니까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드디어 남자의 험악한 손길이 떨어졌다.

“…눈 감아 주시는 건가요?”

남자가 눈물을 훔치며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힐끔힐끔 아리아드의 눈치를 보는 것을 느끼며 소희는 본론을 꺼냈다.

“눈 감아 드릴 테니 부탁이 있어요.”

열두 시 십 분 전.

창고에 식자재들이 배달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들은 그 십 분 사이에 많은 이야기를 끝마쳤다.

마차를 탈 시간과 위치 파악이 끝난 소희는 튀지 않는 허름한 옷으로 곧장 갈아입었다.

나갈 준비가 그렇게 끝이 났다.

* * *

몇 달 동안 이 세계에 살아오며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었던 허름한 광경이었다.

식자재가 담겨 있는 자루들 틈에 끼어 탄 소희는 낮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식료품이 그저 채소류로만 이루어져 있어 냄새는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엉덩이에 고스란히 충격이 전달되었다. 그렇지만 소희가 오로지 신경 쓰는 건 자신의 배였다. 혹여나 작은 충격에도 잘못될까 두 손으로 제 배를 감싸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었다. 소희의 옆에 있던 문이 열리더니 어두운 공간에 서서히 빛이 드리웠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에 소희는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쨍한 햇살이 보랏빛 눈망울 위로 흠뻑 쏟아졌다. 새까만 공간에서 자신의 선택을 반추하며 마음을 졸이던 소희는 번득 정신이 들었다.

황성의 입구 앞, 여러 사람이 오가는 통로 오른편에 누가 보아도 눈에 띄는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말의 고삐를 잡은 채였다.

깔끔한 까만 정복에 포마드 머리, 또 부서지는 햇살 아래 유독 반짝이는 조각같이 날카로운 이목구비까지. 멀리서 보아도 데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소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초라한 행색을 한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한껏 꾸민 데온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리아드의 앞에서 잘 보이고 싶었겠지.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다.

챙이 넓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써 다행히 아리아드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또 각자의 사정으로 급히 발걸음을 재촉할 뿐 유독 돋보이는 남자를 신경 쓰는 일도 없었다.

“데온.”

작게 속삭였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기가 막히게 그 소리를 잡아냈다.

마주한 시선 속에서 데온의 놀라움이 읽혔다. 그는 낡은 갈색 드레스 위로 티가 나게 나와 있는 아리아드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소희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네 아이야.”

데온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말의 고삐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서서히 풀렸다. 그리고 그는 곧장 소희에게로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포옹이 이어졌다.

거대한 품에서 서늘한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바닐라 향이 풍겼다. 소희는 잠시 그대로 우두커니 안겨 있다가 운을 뗐다.

“나는 너를 이용하는 거야. 내 마음이 편해지자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소희는 물었다.

“그래도 괜찮아?”

이 또한 제 마음이 편해지자고 하는 질문인 것이 조금 우스웠다.

데온은 역시 고민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말했잖아. 상관없다고.”

그리 말하며 아리아드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실었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게.

소희는 어느 새부턴가 이 현실감 있는 가상 세계가 무겁게 다가왔다. 그래서 끊임없이 머릿속에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고 새겨 넣어야 제 계획을 이행할 수 있었다.

희미했던 자책은 커져 마음 한편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그것은 마주한 캐릭터들이 자신이 짜 놓은 상황 속에서 얼마나 현실감 있게 살아가는지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한 탓이었다.

누구보다 아리아드에게 진심인 남자가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고 손을 겹쳐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말 위에 올라 황성이 있는 라트베아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듯 따스한 바람이 양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리, 네가 한 선택 절대 후회할 일 없게 만들게.”

또 나직한 목소리가 그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소희도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할 리 없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었고, 소설을 만들어 가는 지금 또한 그 선택이라는 연속적인 쳇바퀴 속을 달리고 있었다.

타인이 봤을 때 그 선택들이 모두 옳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희는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내린 선택들을 옳은 선택이라 믿고, 결국 그렇게 만들고 싶었으니까.

훗날 지금을 돌이켜보면 이 결정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그렇게 끊임없이 되뇌었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성벽이 멀어져 점처럼 보였다.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소희는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했다.

* * *

황태자비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걸 제일 먼저 알아챈 것은 그의 직속 시녀인 메리였다.

시녀장이 그녀가 전달한 편지를 받자마자 호통을 칠 때부터 메리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바쁜 사람 불러 놓고 뭐 하는 거예요!”

잔소리가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메리가 전달한 봉투 속 편지는 글씨 한 자 쓰여 있지 않은 백지였기 때문이다.

기나긴 불호령 뒤에 아리아드를 찾아 나선 메리는 텅 빈 방 안을 보고 깨달았다.

아리아드 님이 자신을 떼어 놓기 위해 아무 의미 없는 편지를 전달하라고 시킨 것을.

허탈한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발만 동동 구르던 그녀는 결국 윗사람에게 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라졌다고만 했을 뿐, 의심스럽게 들릴 사항들은 더 덧붙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황태자비가 지난 일주일 동안 필트모어 공작의 행방을 찾았다는 내용 같은 것. 물론 그것을 도와준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 또한 평생 숨겨야 할 사항이었다.

‘메리, 만약 나를 도와줬다는 걸 누군가에게 말해서 조슈아의 귀에 들어가면 너는 정말 잘리게 되는 거야. 알아듣지? 또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는 내 일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듯이 굴어야 해.’

단호하게 말하며 제 일자리 걱정을 해 주던 사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궁이 한층 더 소란스러워진 건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궁의 주인인 황태자의 등장 때문이었다.

당연히 제일 먼저 추궁이 닿은 곳은 메리였다.

번쩍이는 붉은 눈망울이 닿자 그녀는 입술이 달달 떨림에도 제 주인이 명심하라고 했던 사항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저는 그때 시녀장님에게 심부름을 다녀와서 잘 모르겠습니다. 돌아왔더니 이미 아리아드 님은 사라진 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다행히도 메리에게 더 이상 난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녀장과 함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아리아드가 사라진 것에 메리가 일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공범인 메리는 그렇게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황태자를 보며 한숨을 돌렸다.

메리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소희가 궁리해 낸 방법이 제대로 먹힌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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