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50화 (50/120)

Chapter 50

금요일, 결전의 날을 하루 앞두고 소희의 심장은 크게 요동쳤다.

이 떨림은 단순히 계획의 실패를 염려하는 데서 기인 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특별한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계획이 틀어질 일은 없었다.

첫째 주 토요일로 날을 잡은 것은 조슈아가 정기 회담으로 궁을 오랜 시간 동안 비우기 때문이었고, 탈출의 통로였던 창문은 막혀 있었지만 소희에게는 궁을 빠져나가 황성 입구로 갈 그럴듯한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 것인지.

오랜만에 볕이 따스하여 산책을 나온 소희는 천천히 정원을 거닐면서도 가끔씩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조슈아가 있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한껏 진지한 낯으로 바라보다가 아리아드의 등장에 금세 표정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나가지.”

“네가 늦게 올 줄 알았어. 그 종이는 뭐야?”

소희의 질문에 그가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침대로 향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남자가 아리아드의 배에 살며시 손을 얹고는 종이를 펼쳐 보였다.

하얀 종이 위로 까만 글씨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태어날 아이의 이름 후보였다.

그녀의 뒤에서 조슈아는 나른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이건 남자아이의 이름, 이건 여자아이의 이름. 이 이름의 뜻은 무엇이며 자신은 이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한참을 그렇게 설명하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자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서야 그가 입술을 뗐다.

“다 마음에 안 들어? 리스트를 다시 뽑아 올까?”

소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괜히 이름을 집중해서 찾는 척 바로 앞에 놓인 종이에 얼굴을 갖다 댔다.

이러지 않아도 그는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소희는 제 표정이 아주 엉망일 것이라 예상했다. 낮부터 계속된 떨림이 이제 얼굴로 옮겨 온 듯했으니까.

조슈아가 차분하게 미래에 대해서 읊을수록 그 감정은 점차 격해졌다. 표정 관리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종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그가 불쑥 앞에 놓인 종이를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소희를 자신의 무릎 아래로 내리고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아무런 미동 없이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침대에 앉은 소희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의 손가락이 지체 않고 그녀의 턱 끝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드디어 시선이 마주쳤다. 들키고 싶지 않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아리아드.”

가끔 이런 식으로 조슈아가 나지막이 아리아드의 이름을 부를 때면 그가 느끼고 있을 여러 감정들이 불현듯 가까워졌다.

난생 느껴 본 적 없었던 과분한 사랑, 가끔씩 비치는 초조함 같은 것들.

“말해 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도 여럿 섞인 감정의 덩어리들이 소희에게 와닿았다.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잘 비춰 주지 않는 남자는 아리아드 앞에서만큼은 이런 식으로 유일하게 솔직했다.

“아리아드,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몰라.”

선택의 결과로 비롯된 이익을 셈하던 소희는 가끔가다 조슈아라는 남자를 마주할 때면 멍해지곤 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올곧은지, 또 그 크기가 얼마나 커다란지, 그것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러했다.

문득 낮부터 시작된 떨림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소희는 깨달았다. 곧 자신의 진심을 외면당하고 절망을 맛볼 남자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럼에도 소희는 이 길을 걸어야 했다. 작가가 아닌 소희는 아무리 소설 속 세상이라고 해도 자신이 품고 있던 아이를 죽일 수 없었고, 아리아드가 살아남아야 아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소희가 데온의 아이를 가지게 되는 장면으로 처음 빙의한 순간부터 아리아드는 여주인공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한없이 커다랗게 보이는 조슈아의 사랑이 그 어떠한 순간에도 영원할 것이라고 소희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부모에게 버림받으며 그 어린 시절부터 뼛속 깊이 새겨 넣었으니까.

전날 어린 소희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웃던 여자는 경제적인 이유로 소희를 보육원에 버렸다. 애석하게도 소희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버려졌다.

그렇다면 지금은.

소희는 제 앞에 놓인 붉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과거에 겪었던 경험들은 난감한 문제를 마주할 때면 정확한 정답을 내려 주곤 한다. 마치 지금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 남자도 영원할 리 없다.

잘못 한 적 없는 어린 소희도 버려졌던 마당에, 남의 아이를 밴 아리아드가 버려지지 않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러니 소희는 아이를 지키기 위한 제 선택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다 마음에 들어서 고민 중이었어.”

엉망이었던 얼굴 위로 애써 미소를 만들어 냈다. 이미 소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조슈아의 표정은 오묘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알라즈네. 나도 네가 고른 이름이 마음에 들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자 조슈아는 다시 침대로 올라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겨 있을 때마다 느껴졌던 불규칙한 심장 박동은 오롯이 그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제 감정을 부정하지 못하는 듯 소희의 심장도 계속해서 콩닥거렸으니까.

그러니 과거의 경험을 대입하면 손쉽게 고를 수 있는 선택도 자꾸만 망설여 몇 달을 질질 끈 것일 테지.

“곧 꽃이 필 거야.”

조슈아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들이를 나가자.”

곧 불어올 봄바람처럼 따스한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을 미래를 그려 나갔다.

“이번 연도에는 둘이지만, 내년에는 셋이서.”

소희는 조슈아의 너른 어깨에 얼굴을 푹 묻었다. 그 속에서 목소리는 최대한 밝게 꾸며 내려 노력했다.

“응, 좋아.”

결국 소희는 솔직해지지 못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제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던 것들이 몽땅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사실 조슈아, 나는….

끝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 대신 마음속으로 다른 말을 읊조렸다.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설령 이 소설이 너무 평탄해져 재미가 없어질지라도.’

* * *

토요일 일정은 매우 빠듯했다.

다행히도 조슈아는 오전부터 궁을 비워 소희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일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만날 인물은 켈리였다. 소희가 이런 만남을 결정한 것은 조금 충동적이었다. 어젯밤 조슈아의 행복을 빌어 주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오랜만에 응접실에 마주한 두 여인 사이에 그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소희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아이를 가졌어요.”

뜬금없는 첫마디에 켈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미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으니 더욱이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다음 이어지는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그 아이가 조슈아의 아이가 아닌 것 같아요.”

켈리는 충격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잃었다. 그와 반대로 소희의 언성은 매우 담담했다.

“켈리, 저는 떠날 거예요.”

“…네?”

분홍빛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켈리의 입가에 금방 실소가 담긴 곡선이 번졌다.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척 이야기하는 게 웃기네요. 사실은 이대로 있다가 들키면 아리아드 님은 무사할 수 없으니까 도망가는 거잖아요.”

“맞아요. 그게 정확하겠네요. 비겁하게도 사실 그래요.”

“이런 이야기를 저한테 대체 왜 하시는 거예요? 저는 아리아드 님의 비밀을 지켜드릴 생각이 없어요.”

“애초에 그런 걸 바랐으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을 꺼내서 저한테 얻으려는 게 대체 뭐예요.”

“그런 건 없어요. 아, 웃기게 들리겠지만 켈리 양의 짝사랑이 쌍방이 되길 바라죠. 진심으로.”

“제 사랑을 응원한다고요?”

켈리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빈정거렸다.

“아리아드 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그녀는 만면을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항상 그렇게 여유로운 태도로 사람을 참 잘 깔아뭉개세요. 그거참 대단한 능력이에요. 당신은 그 어느 것에도 진심이지 않네요. 배려하는 척하지만 저하의 마음도, 제 마음도, 그 모든 것이 아리아드 님은 참 쉬운가 봐요.”

쉽다, 그 단어에 소희의 뇌리에는 불현듯 악몽 속 조슈아가 떠올랐다.

‘그래, 너는 모든 게 쉬운 사람이었지. 내가 그걸 잠시 잊고 있었네.’

쉽지 않았다.

자신은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서 꽤 오랜 고민을 함에도 이들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 이들로서는 결국 쉬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사과했다. 자신이 쉬워 보이는 것에 대해서. 사실은, 어젯밤 조슈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미안해요. 저 몹쓸 짓 한 거 맞아요. 조슈아의 사랑을 알고도 그걸 받으면서 이용했고, 켈리 당신도 제 목적을 위해 이용했어요. 그리고 조슈아의 아이가 아닌 걸 알아도 최대한 숨기고 살아가려고 했어요.”

찻잔을 들어 허브차를 입에 머금었다. 기어오르는 죄책감을 액체와 함께 삼키려 했다.

바싹 말라 가던 목이 축여지자 소희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악몽에 시달리면서 심리적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도망치듯 떠나는 거고, 제가 떠난 자리에 켈리 양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게 제 진심이에요.”

행복했으면 좋겠다. 원래의 시놉시스대로. 본래 아리아드는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그저 사랑에 빠졌던 두 남녀의 이야기로.

단순히 소설이 잘 되길 바라서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조슈아의 행복을 읊조리던 속마음은 그 무엇보다 진심이었으니까.

“저는 당신들의 사랑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길 바라요.”

담담히 뱉는 말에 켈리의 눈매가 딱딱히 굳었다.

“어쩔 수 없이 떠나는 마당에 그런 식으로 착한 척하지 마세요. 더럽고 가증스러워.”

귓전을 사납게 할퀴는 언성에도 소희는 굴하지 않았다.

어젯밤 선잠이 들기 전 계속해서 생각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켈리에게 건네려고 곱씹던 본론이었다.

“3월 27일, 해가 저물어갈 때쯤 페이트 성당의 기도실로 가세요. 조슈아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자신이 짜 놨던 켈리와 조슈아의 이야기.

본래대로 소설이 진행됐다면 선대 황제들에 대한 추모식이 거행되고, 조슈아는 기도실에서 울고 있는 켈리를 발견한다.

신비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의 고독한 모습은 조슈아의 마음 한편에 크게 자리 잡게 된다. 그의 마음이 점차 크게 불어나게 되는 중요한 이야기의 흐름 중 하나였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던 건 설정을 짜기 귀찮았던 소희가 그냥 자신의 생일로 설정해 둔 덕이었다.

덕분에 켈리와 조슈아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알려 줄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앞에 앉은 켈리는 미간을 좁힌 채였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사랑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장소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가고 안 가고는 켈리 양의 선택이지만요.”

켈리는 못마땅해하는 기색이긴 했지만 더 이상 불퉁한 말을 잇지 않았다. 저 예언과도 같았던 말이 과거에 한 번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었던 전적이 있으니까.

본론을 모두 꺼낸 소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아드는 구제 불능의 악녀로 남고, 본래 남주와 여주는 이어진다.’

소희의 머리가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 중에 가장 깔끔한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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