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49화 (49/120)

Chapter 49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데온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딱히 어려운 게 없는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걸 알아다 줄 메리는 생각보다 훌륭한 정보통이었으니까. 그녀의 수다 떠는 취미가 또 이런 부분에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순조롭게 보이던 시작에 금방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리아드 님, 죄송해요. 여기 사용인들에게 조심스레 물어봤는데 다들 먼 지역으로 쫓겨났다고만 하지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그래?”

“아무래도 저하께서 궁에 있는 신문을 몽땅 치워 버리라고 명하셔서 다들 세상사와 멀어진 탓이에요.”

메리는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와 함께 소희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자신이 나서서 정보를 알아보고 다닐 여건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조슈아의 수족들이 깔린 이곳에서 제 계획이 금방 들통날 테니까.

방의 잠금장치는 없어졌어도 타인의 시선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신세였다. 결국 소희는 방구석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소희가 골똘히 생각했다.

공작 작위를 가진 자가 사라졌는데 이렇게 아무도 그 소식을 모르긴 힘들었다. 신문을 치워서 다들 세상 소식과 멀어진 것이 정보를 알 수 없는 이유라면….

“그러면 신문을 구하면 되는 거 아니야?”

“네?”

“데온이 떠난 당시에 신문에 그의 소식이 한 글자라도 적혀 있을 거 아니야.”

“그렇겠네요.”

다시 해맑게 손뼉을 친 메리가 말했다.

“신문을 구하는 거라면 문제없어요. 제 동생이 신문사에 들어가는 게 꿈이잖아요. 그래서 최근 발행된 모든 신문을 집에 다 모아 두고 있거든요.”

“그래? 그거 잘됐다.”

“그런데 그 신문을 다 챙겨 오면 양이 어마어마한데 거기서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그랬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다소 무식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신문을 다 쌓아 놓고 봤다가는 들통나기에 십상이었다.

“떠난 날짜만 대충 알고 있으면 추려 내기 쉬울 텐데….”

소희는 데온을 마지막으로 본 날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일이어서 날짜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데온과 만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개교식 행사가 있었다는 것.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무언가가 뇌리에 번득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메리. 신문을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네?”

갑작스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희를 메리는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협탁 서랍에서 꺼낸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메리가 아리아드의 얼굴이 잘 나왔다면서 들고 왔던 일간지였다.

개교식 행사 다음 날 발행된 신문이었으니 이곳에 어쩌면 데온의 소식이 적혀 있을지도 몰랐다.

소희는 아리아드의 이야기만 읽고 치워 버렸던 일간지를 펼쳤다. 작은 글씨들이 조밀하게 적혀 있어 한참을 읽다가 뻑뻑해진 눈을 비볐다. 그리고 마지막 장으로 갔을 때였다.

[오르딘 지역으로 간 필트모어 공작, 그의 손에 그 지역의 사활이 걸렸다.]

유레카!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삼키고 소희는 한쪽 손의 주먹을 꽉 쥐어흔들었다.

“그런데 오르딘 지역이 어디지?”

애초에 소설을 구상할 때 기록해 둔 적도 없는 지역이었다.

“역병이 심하게 돌아서 봉쇄령이 내려진 지역이에요. 치사율이 장난 아니래요.”

메리의 말을 듣고는 소희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는 자신이 죽이진 않겠다는 말을 지키긴 했지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에 데온을 던져 놓았다. 그러한 독한 모습을 다시금 확인하자 소희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 점차 확신을 얻었다.

“그런데… 그러면 들어갈 방법이 아예 없는 건가?”

“황실의 허가를 받으면 가능할 거예요.”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쉽게 풀리는 일이 하나 없었다.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허가받는 순간 동네방네 다 소문을 내는 꼴이었고, 한마디로 소희가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메리를 보내는 것도 썩 좋은 수는 아니었다.

마침 메리가 무언가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동생 말로는 수업에 오셨던 기자분이 그곳으로 취재를 나간다고 했어요.”

“그, 너희 동생이랑 친한 기자분?”

“아직 친한 건 아니고…. 그냥 귀엽게 봐 줬다고는 했는데….”

동생 자랑을 하며 신나서 떠들던 때와는 다르게 자신감이 없어진 말투였다. 하지만 소희에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미 빛을 보았으니까.

“메리, 넌 정말 훌륭해.”

“네?”

“이 세계에서 네가 제일 훌륭한 거 같아. 너무 사랑스러워.”

진심 어린 말에 메리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하며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모습조차 소희는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봤다.

“그 기자님은 언제까지 동생 수업에 오셔?”

“이번 주가 마지막이라고 했어요.”

데온과 연락이 닿을 방도가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소희는 어두웠던 미래에 한 점의 구멍이 생겨 사방으로 빛이 퍼지는 듯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연락망이 되어 줄 기자가 완벽하게 아리아드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소희는 그 점을 염두에 두었다.

협탁에 다시 신문을 넣어 두고는 그 위에 덮어 두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깃펜을 챙기고는 테이블로 향했다.

사각사각, 종이 위를 채워 나가는 소희의 팔놀림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한참 뒤에야 그 소리가 멎었다.

편지의 내용은 되도록 모호하게 적어 놓았다. 그 기자가 펼치더라도 정확한 정보를 유추할 수 없게 말이다.

“이 편지를 동생을 통해서 기자분한테 전달할 수 있을까? 오르딘 지역으로 갈 때 데온 필트모어 공작에게 전해 주기만 하면 돼.”

“네.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선선한 대꾸에도 소희는 안심하지 않고 더 미래를 내다봤다.

이거에 덧붙일 게 있다면 뇌물이었다. 사람은 믿지 못한데도 돈은 절대 배신하지 않으니까.

“메리, 이건 선물이야.”

“네?”

광채가 찬란한 진주가 달린 펜던트를 소희가 메리의 목에 재빠르게 걸어 주었다. 딱 보아도 엄청난 가격을 호가하는 장식품이었다. 그에 메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소희는 얇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냈다. 이 또한 보석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이 반지는 그 기자분의 몫. 사례금이니 돈으로 바꿔서 함께 전달해 줘.”

“네,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한껏 의욕이 넘치는 대답이었다. 메리의 얼굴이 전보다 한층 더 밝아져 있었다.

그 낯빛으로 보아하니 소희는 역시 이번에도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 * *

몇 달간 데온의 일상은 지겹도록 똑같았다.

오르딘 지역에 도착했을 때 나름 충격적이던 시체들의 무덤도 이젠 그저 처리해야 할 지루한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역병으로 도시 전역에 깔린 시체들을 치우고 밤에는 매장하다가 또 몇 명의 사상자가 나왔는지 보고를 받고 의료진을 배치하는 삶.

나름 다행이라 할 것은 겨울이 찾아오면서 감염자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리적 특성상 본디 침입도 잦았으나 날씨 덕으로 칼을 빼 들 일도 몇 번 없었다.

작은 집무실에서 남아 있는 서류를 뒤적이다가 데온은 제 모습이 우스워 피식거렸다.

작위를 물려받은 순간부터 여태껏 이토록 일에 열정적이었던 순간은 없었다. 공작 작위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모든 사업 권한을 밑의 사람들에게 돌려놓고는 온종일 유흥을 즐기는 것이 제 일과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지역에 밤낮으로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이곳을 정상화하고 빠르게 복귀한다.’

이러한 목표가 데온을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게 했다. 결국 몇 달 동안 열과 성을 다한 덕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총 여든 명으로 보고받았습니다.”

처음으로 감염자의 수가 백 명 아래를 기록했다. 데온의 광기 어린 집착에 승리의 깃발이 꽂혔다. 탈출이 머지않은 것이다.

보고를 마친 남자가 데온이 앉아 있는 책상 위에 편지 봉투를 올려놨다.

“오늘 라트베아 지역에서 온 기자가 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뭐야, 이건 또.”

“그리고 내일 점심에 인터뷰가 가능한지도 여쭤봐 달라고 했습니다.”

“여기가 무슨 놀이터인 줄 알아? 인터뷰는 무슨. 썩 꺼지라고 해.”

데온은 욕을 읊조리며 동봉되어 있는 편지를 거칠게 뜯었다.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에 잡힌 종이가 무자비하게 구겨져 금세 너덜거렸다.

성의 없는 눈길로 첫 줄을 읽은 그의 동공이 커졌다.

금세 그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는 심지어 편지지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코를 박고 읽어 내려갔다.

[안녕, 데온. 잘 살아 있지?

탑에 갇혀 있던 너를 찾아갔을 때 네가 내게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말에 이제야 대답해 줄 수 있을 거 같아.

좋아, 이게 내 답변이야.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네 도움이 필요해. 지금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른 시일 내로 이뤄졌으면 좋겠어.

기다릴게.

3월 6일 토요일 오후 1시, 황성의 입구 앞에서.]

제 손에 구겨져 일그러진 글씨들을 그는 다시 빳빳이 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읽어 내려가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편지 발송인의 존재를 유추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필체를 곧바로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뇌리에 각인된 듯 생생했으니 이 편지가 하고 싶은 말 또한 바로 알아챘다.

‘공작 지위, 지금 하고 있는 사업, 날 따르는 사람들, 다 버릴 수 있어.’

‘….’

‘나랑 떠나자.’

아리아드의 선택은 결국 데온이었다. 그걸 확인하고는 신경질적이기만 했던 그의 입매에 훤칠한 미소가 걸렸다.

한동안 그는 열패감에 시달렸었다. 어릴 때부터 쌓여 왔던 조슈아에 대한 열등감은 아리아드의 존재 여부 하나로 열패감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그가 아는 그 여인은 묶어 놓는다고 해서 순순히 곁에 머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태 조슈아의 옆자리에 있었다는 건 오롯이 그녀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

그걸 인정하고 깨닫기까지가 굉장히 힘들었지만.

‘아리, 날 이용해도 좋아. 그런데 버리지만 말아 줘.’

이미 이러한 말을 뱉었을 때부터 그 여인의 선택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든 걸 포기하고 차선책을 찾으려는 그의 손아귀에 예상치도 못한 결과지가 쥐어졌다.

그녀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할 뿐.

저도 모르게 종이를 들고 샐샐거리던 데온은 고개를 들었다.

이젠 정말 이곳에서 나갈 시간이었다.

“그 인터뷰, 하겠다고 전해 줘.”

욕만 읊조리던 입술 밖으로 난데없이 너그러운 어투가 튀어나왔다. 사랑스러운 메신저에게 이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