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48화 (48/120)

Chapter 48

이 세계의 신은 아리아드를 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잔뜩 뒤틀린 시놉시스 전개 속에서 아리아드의 임신만 이렇게 정확할 수는 없었다.

소희의 심경 변화는 다채로웠다. 처음에는 닥쳐온 현실에 쓸데없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아이가 조슈아의 아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말이다.

데온과 몸을 섞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시기에 조슈아와 몸을 섞었으니 터무니없는 기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이 점차 조금씩 무너졌던 것은 ‘아리아드는 데온의 아이를 가진다.’라고 자신이 기록해 두었던 명백한 사실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 소희가 아리아드로 빙의한 순간부터 시놉시스대로 진행된 것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데온과 잠자리를 가진 것.

그러니 점화되었던 기대감은 점차 시들해져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결국, 소희는 데온의 아이를 가진다는 가정으로 상상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데온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정말 조슈아의 앞에서 그의 아들인 척 연기할 수 있을까? 연기를 하더라도 눈치가 무섭도록 빠른 남자는 금방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뒤이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이 꾸었던 꿈으로 연결되었다.

눈치를 챈다면 그는 정말 아리아드를 죽일까, 아리아드에게 만큼은 다정한 그 남자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러한 가정에는 생각보다 쉬운 결론이 나왔다.

소희는 여태껏 그저 제 소설 속 전개를 명목 삼아 조슈아를 쉽게만 대했었다.

애증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잘 알았고, 분노라는 것은 층층이 쌓여 오다가 한 번에 터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는 이미 많은 순간을 억누르며 참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보고 최종적으로 터진다면.

조슈아라는 캐릭터는,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들 친절하게 웃으며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을 수 있는 잔인함을 겸비했다.

분명 작가인 한소희가 설정해 놓은 캐릭터는 그러했다.

소희는 철판을 깔아 빛이 들어오지 않는 창가로 걸어갔다. 시간상 중천에 걸려 있던 해가 점차 기울어져 가고 있을 것이다. 회의를 하러 간 조슈아가 곧 돌아올 시간이었다.

한기가 묻은 철판을 손으로 만지다가 문득 무의식중에 사고가 이상한 곳으로 도달했다.

‘차라리 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아이가 유산된다면…?’

그러한 제 생각에 화들짝 놀라 소희가 창문에서 손을 떼어 냈다.

“소희야, 네가 미쳤구나.”

정말 끔찍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뱃속에는 아이의 태동이 너무도 생생히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가상 세계라고 해도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감각이었다.

“…이건 진짜 아니야.”

소희는 벽에 등을 기댔다가 천천히 다리에 힘을 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 배에 손을 갖다 대어 쓰다듬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행동이었다.

오른편에 놓인 벽난로에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세차게 타오르는 불꽃들을 그렇게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했던 많은 가정이 다시 그 불길 위로 떠올랐다.

걸리적거리는 것은 뭐든 일단 치우고 보는 남자와 그의 눈에는 한없이 눈엣가시 같을 아이. 결국엔 남자의 옆자리에서 버티다가 아이가 그 손에 치워진다면.

설마, 혹시, 만약에라도 그렇게 된다면….

“아이가 죽는 건 정말 다 내 탓인 거야.”

최종적으로 소희의 심경 변화는 그러했다.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다가 침통해지길 반복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허망하게 손 놓고 이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무언가를 결단해야 할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 먼저 시선을 두었던 조슈아가 미간을 구기고는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결국 창이 있는 벽에 기대앉아 있는 그녀를 찾았다.

“아리아드, 대체 왜 거기 있어.”

그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한층 무거워진 몸을 가뿐히 들어 올리며 다정한 잔소리를 했다.

“찬 곳에 앉아 있으면 안 좋아.”

소희가 그에 작은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은 남자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결국 그는 말을 삼킨 듯했다. 이후 밀도 높은 침묵이 흘렀다.

결국 그 정적을 깬 것은 소희였다.

“할 말 있어?”

그에 조슈아가 소희에게로 성큼 다가와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는 문득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생각 해?”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아니, 아리아드. 너 굉장히 생각이 많아 보여.”

이상했다. 제 뇌를 뜯어 찬찬히 훑어보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속일 사람을 속이라는 것처럼 모든 것이 훤히 꿰뚫리는 기분이랄까. 그가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소희는 변명했다.

“그냥 좀, 변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그리 말하며 살짝 부른 배를 내려 보자 조슈아의 시선도 그곳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갑작스레 아침에 있었던 일로 화제를 돌렸다.

“황후 폐하께서는 점점 변하실 거야.”

오늘 비앙카는 아침 식사에 그들을 초대했다.

그녀는 전처럼 독설을 쏟아 내지는 않았지만 아리아드를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그건 아리아드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오늘까지 고수했던 태도였다.

아무래도 아리아드가 고민이 많아 보이는 것에 조슈아는 그러한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정작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부분을 불쑥 언급했다.

“아리아드, 다 괜찮아. 정말이야.”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름다운 저음의 목소리는 한때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주곤 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괜찮지 않은 것도, 괜찮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매일같이 꿈속에서 서슬 퍼런 언성을 들어서 그런 것일까. 소희는 더 이상 이 목소리를 듣고 안정감을 얻을 수 없었다.

조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어 보였다. 그에 소희도 입꼬리를 한껏 올려 응해 주었다.

이렇게 환히 미소 지었으니, 언뜻 꿰뚫어 보는 듯했어도 그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제 속마음을.

* * *

소희는 다짐했다.

무려 석 달 가까이 고민했으니 한순간에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배 속에 아이가 거칠게 발길질을 했을 때 최종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소설은 다시 만들어 가면 돼.”

꽤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할 동안 제 마음이 계속해서 도달하는 방향이었다. 그것은 악몽을 반복해서 꿀수록 점차 강하게 굳어졌다.

아이를 살리고 싶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인한 뒤로부터 생각은 더욱 단단해져 아리아드가 여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본래의 목적은 점차 희미해졌다.

소설 내용만 재밌게 굴러간다면야 여주인공이 바뀌어도 제 돈벌이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합리화도 함께였다.

그렇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건.

“저기, 조슈아….”

조심스럽게 부르자 그가 소희를 바라봤다. 입술만 오물거리며 한참을 뜸 들이다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스트레스가 쌓였나 봐. 그걸 좀 풀만 한 놀이를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바람을 쐬면서 달리면 어떨까 싶거든.”

조슈아는 꽤 진지하게 소희의 말을 경청했다.

“…승마를 배워 보는 건 어떨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안 돼.”

그래, 이미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예상했다. 그랬기에 더욱 꺼내기 망설여졌던 것이었다.

“이제 조심해야 할 때는 지났고, 괜찮지 않을까?”

“안 된다고 했어.”

소희가 다시 대꾸하려 하자 그는 빠르게 수저를 올려 벌어진 입속으로 음식을 넣었다. 그에 말이 콱 막혀 버린 소희가 음식만 씹는 수밖에 없었다.

“승마는 나중에 내가 직접 알려 줄게.”

“….”

“아이를 낳고 난 뒤에.”

단호한 언성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지금 승마를 배우는 게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위험한 발상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할 만큼 위기를 타개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승마를 배워야겠다는 생각까지 가지도 않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슈아의 수족으로 보이는 메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일하러 떠나간 남자의 빈자리를 메리가 채웠다.

“글쎄, 제 동생 수업에 트렌즈 페이퍼 기자분이 오신 거 있죠. 그래서 동생이 친해지려고 엄청나게 애썼대요. 그런 동생을 그 기자분이 엄청 귀엽게 보셨나 봐요. 절 닮아서 좀 귀엽게 생기긴 했거든요. 아, 아무튼 친해지면 인맥의 힘으로 신문사에 들어갈 수도 있겠죠? 전 제 남동생이 너무 대견해요.”

그 이야기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소희는 그럴듯한 두 번째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시놉시스대로라면 이 배 속 아이의 아빠일 데온 필트모어, 그의 존재가 이 순간 간절했다. 그런데 데온은 떠나갈 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리지 않았으니 연락을 할 방도조차 없었다.

현실로 돌아가면 알 수 있을 텐데 임신한 몸으로는 불가능한 소리였고.

소희는 결국 조슈아의 수족으로 보이는 자의 속을 떠볼 수밖에 없었다.

“메리.”

조잘조잘 말을 이어 가던 메리는 말을 멈췄다.

“넌 누구 편이야?”

그 질문에 메리는 황당하다는 듯 빠르게 답했다.

“당연히 아리아드 님 편이죠. 아리아드 님 시녀인데요.”

“조슈아의 편이 아니고?”

“대체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메리가 진정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에 소희는 애처로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사실… 방금 조슈아와 말다툼을 했거든. 궁전에 내 편이 하나도 없잖아. 너도 결국 내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문득 좀 많이 외로워져서.”

“어머, 아리아드 님. 무슨 그런 소리를 하세요.”

꽤 그럴듯한 연기에 메리가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사방이 꽉 막혀 있어 듣는 사람도 없는데 누가 들을세라 낮게 속삭였다.

“사실 조슈아 님 때문에 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 것도 맞지만… 저는 저하가 조금 무서워요.”

“아, 그래?”

“네. 처음 면접을 볼 때 저한테 협박 아닌 협박을 하셨거든요. 원래 아리아드 님 곁에서 일하던 분이 일머리가 없어서 쫓겨나셨다고요.”

소희는 그 말을 듣고 반색하려는 것을 참아 냈다.

“어머, 어쩜…. 걔가 가끔 그런 구석이 있다니까. 정말 많이 냉정해. 나도 방금 그것 때문에 말다툼을 한 거거든.”

“맞아요. 그래서 저는 좀 첫인상부터 무서웠어요. 그 말을 웃으면서 하시더라니까요.”

이제 메리는 막힘없이 말했다. 대화가 잘 통하자 신난 탓이었다.

“그렇다면 메리, 너만큼은 내 편인 거야? 내 첫인상은 어땠어?”

“아리아드 님의 첫인상이 사실 좋진 않았어요. 저를 보고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셨거든요.”

소희는 메리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땐 뭐든 없애고 보는 조슈아에게 조금 신경질이 나 있었으니까.

이 아이는 아주 솔직했다. 그건 이 순간에 아주 감사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여느 높으신 분들처럼 화내지도 않으시고 제 이야기도 너무 잘 들어 주시니 지금은 천사와도 같다고 생각해요.”

“메리,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마워.”

“고맙긴요. 아무튼 전 아리아드 님 편이랍니다.”

초석을 다졌으니 소희는 본론을 꺼냈다.

“그럼 내 편으로서 한 가지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조슈아에게도 말이야.”

“그럼요. 당연하죠.”

선선히 대꾸하는 메리를 보며 소희는 미소 지었다.

두 번째로 세운 계획의 도입부가 나쁘지 않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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