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47화 (47/120)

Chapter 47

핏기 하나 없어진 아리아드의 낯을 보고 메리는 울상이 되었다. 그리고 기어코 조슈아를 부르러 가겠다며 야단법석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체한 것 같으니까 조금 쉬면 나아질 거야.”

그렇게 말해 혼자 방에 남게 되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저 체한 것 같은 몸 상태는 아니라는 걸.

사후 피임약을 처방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일어날 일들을 예상하며 그려 왔던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 일이 기적적으로 일어나지를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지금 또한 빠르게 다가온 현실을 부정 중이었다.

모시는 주인이 걱정된 메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이 방에 지금 소희가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아리아드.”

조슈아는 미간을 한껏 좁히고 그녀를 내려봤다.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주치의를 불러야겠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다시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결과를 알고 싶지 않았다.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희는 물을 먹고 누울 생각으로 협탁 위에 놓인 물컵을 잡았다. 그리고 한 모금 삼켰을 때였다.

“우욱.”

놀라운 일이었다. 물만 먹어도 이렇게 구역질이 올라오다니.

급하게 입을 틀어막은 소희가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놀란 조슈아의 표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소희는 욕실 안에 주저앉아 물로 채운 속을 한참 동안 비워 냈다.

“주치의를 불러오세요.”

문 바로 앞에서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사실 바닥을 붙잡고 토하기만을 반복해서 상황을 파악할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비저하께서 아이를 가지신 것 같습니다.”

소희가 침대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실핏줄이 잔뜩 터진 눈이 조슈아와 마주쳤다. 그는 임신 사실을 듣고도 꽤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 축하라.

입가에 애매한 미소가 걸쳐졌다.

부정하고 싶었던 소설 속 이야기가 그렇게 불쑥 전개되어 버렸다.

* * *

입덧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괴로웠다.

드라마에서 입덧을 연기하던 배우들은 보통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참아 내는 것에 그치지만, 그건 그냥 픽션이라는 걸 소희는 몸소 깨달았다.

한동안 토를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욕실에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하도 앉아 있었더니 올라오는 한기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불어 원체 심했던 보호도 더욱 과열되었다.

‘임신 초기에는 더욱 조심해 주셔야 합니다.’

주치의가 이렇게 했던 말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조슈아는 전처럼 그녀를 안고 다녔다. 최대한 조심할 테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소희의 말은 깔끔하게 묵살되었다.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 안겨 있던 시간이었다.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던 소희는 일순 바람이 거칠게 창문을 흔드는 소리에 잠이 달아나 고개를 들었다.

멀뚱히 정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이가 생겼다고 했을 때 조슈아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던 얼굴이 어쩌면 내내 거슬렸던 것도 같다.

“넌 어때. 아이가 생긴 거.”

지렁이 같은 글자에 시선을 두고 있던 남자가 그녀에게로 눈길을 옮겨 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좋아.”

짤막한 한마디 외에 더 딸려 오는 반응은 없었다.

소희는 그 대답에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갑작스레 토를 하며 입덧을 부정하던 순간부터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던 것이었다.

‘네 아이가 아니어도?’

어지간히도 멍청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소희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목 끝까지 차오른 갈고리를 눌러 삼켰다.

성인군자가 와도 긍정해 주지 못할 질문이었다. 그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저 자신에게 소희는 조금 답답해졌다.

조슈아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런 남자의 옆모습을 소희는 한참 동안 바라봤다.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올 듯 근질거리는 입술을 꽉 다문 채로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소희는 또 꿈을 꾸었다.

항상 그랬듯 데온의 머리통이 먼저 잘려 나갔다. 소희는 피로 물든 단상 위에 주저앉아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세 번째로 보는 장면이었다.

소희는 이것이 꿈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축의 머리를 베듯 잘려 나가는 사람들의 머리통은 아무리 보아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리아드 피어슨의 차례가 다가왔다. 두 명의 장정이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이내 단두대 앞에 도착하자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또 독설이 날아오겠지.

소희는 차라리 빨리 죽어 이 꿈에서 깨고 싶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몸을 맡겼다. 때마침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리아드.’

힐끔, 그 목소리에 한쪽 눈을 열자 핏빛 눈망울과 곧바로 마주쳤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예상치 못한 대사에 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그렇게 죽을 생각이야?’

꿈 내용이 달라졌다. 소설 속에 기록해 놨던 흐름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일 거잖아.’

소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는 붉은 눈망울이 더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초라한 아리아드의 행색을 찬찬히 훑다가 검을 빼냈다. 그리고 피식, 김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너는 모든 게 쉬운 사람이었지. 내가 그걸 잠시 잊고 있었네.’

그가 검을 위로 올렸다. 칼날 끝에 태양 볕이 반사되어 눈을 찌르자 소희가 얼굴을 구겼다.

이번에는 조슈아의 손에 직접 죽는 꿈인가. 참 다양하게 죽어 보네.

그리 실없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갑작스레 바로 옆쪽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끌려 소희는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아이였다.

위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이는 살려 달라고? 웃기는 소리.’

조슈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검이 향하는 방향은 자신이 아니었다. 칼날은 빠르게 아이의 작은 몸을 관통했다.

그에 놀란 소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아이가 죽은 건 모두 다 네 탓이야.’

석상처럼 얼어붙은 그녀에게로 조슈아가 다가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모두 다 네 탓이야, 소희야.’

난데없이 제 이름이 들려오자 심장 부근이 시큰거려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뒤이어 시야가 점차 뿌예졌다.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드.”

방금 들은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아리아드.”

소희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붉은색 눈동자였다. 꿈속에서 마주한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울지 마.”

그의 손등이 눈가를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정신을 차린 소희가 제 손으로 눈을 비볐다.

“…뭐야, 나 왜 우는 거야.”

꿈을 꾸다가 울어본 것은 또 처음이었다. 너무 과하게 몰입했다고 생각하며 소희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닿아 있는 눈길이 깊고 곧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닮은 것은 그러한 점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지금의 눈동자는 한없이 달콤한 데에 반해 꿈속은 그저 증오로 똘똘 뭉쳐 있었다는 것.

그리고 소희는 잘 알았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은 우습게도 종이 뒤집듯 손쉽게 증오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릴 적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부모에게 직접 겪어 본 감정이었다.

침대에 팔을 괴고 소희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남자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뽀얀 이마를 섬세하게 닦아 주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땀을 이렇게 흘려.”

“현실감 있는 악몽.”

소희는 그 이야기를 그렇게 간추렸다.

이마 위를 쓰다듬던 손길이 내려왔다. 조슈아는 두 팔로 소희는 꽉 끌어안았다.

“아리아드, 그건 그냥 꿈이야.”

큼지막한 손바닥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뒤이어 차분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꿈일 뿐이야.”

* * *

몇 달이 지나니, 평평하던 배는 금방 불러왔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아리아드의 눈매 주변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주치의의 검진이 있을 때마다 그는 조슈아에게 임신 스트레스로 낯빛이 많이 안 좋아질 수도 있다고 고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소희는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렸다. 갓난아이가 죽은 꿈을 꾼 뒤로부터 그와 똑같은 꿈을 매일 같이 말이다.

그 꿈은 항상 조슈아가 소희의 이름을 부르면서 막을 내렸다.

‘모두 다 네 탓이야, 소희야.’

어째 현실에서의 제 이름을 조슈아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기분이 더 찝찝해지는 악몽이었다.

소희는 잠을 잘 자지 못해 피곤해서 충혈된 눈 주변을 문질렀다.

“요즘은 입덧을 안 하셔서 다행이에요.”

트레이 위에 식사를 챙겨 온 메리는 평소처럼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불 아래 불룩 솟아 있는 아리아드의 배를 향해 있었다.

“아리아드 님, 저는 너무 기대되는 거 있죠. 아리아드 님과 저하가 워낙 미남 미녀시니까 두 분을 닮은 아이는 얼마나 예쁠까요? 딸이면 보통 아버지를 더 많이 닮고, 아들이면 어머니를 더 닮는다고 하는데, 딸이든 아들이든 모두 너무 아름다울 것 같아요.”

포크를 쥐고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소희는 그녀의 말을 흘려듣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조슈아를 닮을 수 있을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닮겠죠. 아, 가끔 뭐 할머니를 똑 닮는 경우도 있던데. 황후 폐하께서도 워낙 미인이시라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황후 폐하라도 닮을 수 있을까?”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기운 없이 중얼거리자 메리는 이상하다는 눈길로 그녀를 훑었다. 소희는 그런 그녀에게라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곧 태어날 이 아이는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일 수도 있다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쳤던 자의 심정이 이해되는 찰나였다.

“아이가 혼자 머리카락 색이 다르면 어쩌지….”

앞뒤 설명 없이 듣기엔 뚱딴지같은 말을 메리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왜 그런 걱정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아이 혼자 머리카락 색이 다를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그럴 수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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