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소희는 고민했다.
대체 내가 캐릭터 설정을 어떻게 했기에 이런 사고를 하는 남자가 탄생했을까.
보살펴 주고 싶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남자가 이상형이랬더니, 직접 팔을 그어 환자 역할을 자처하는 그 사고방식은 명백히 제정신인 사람이 할 법한 일은 아니었다.
아, 물론 제정신 아닌 건 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고?
소희는 상상을 초월하는 행태에 충격을 받아 잠시 말을 잃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조슈아는 태연스럽게 설득하려고 했다.
“네가 날 걱정해 주는 게 좋아서 계속 거짓말했어.”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우겨도 믿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목소리이긴 했지만, 그녀는 도리질하고는 정신을 잡았다.
“조슈아, 난 네가 다치는 게 싫어!”
버럭 언성을 높인 소희가 자신을 빤히 보는 눈길에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 애초에 정상적인 사고를 바라진 않았다.
심지어 이 남자는 사랑과 관련된 쪽으로는 아주 무지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를 감금해서 가지려고 했으니 뭐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무작정 다그쳐서 될 일이 아니었다. 가르치고 달래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소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조슈아, 여자들은 이런 식으로 굴면 무서워해. 이것 봐. 소름 돋은 거 보여?”
소희는 팔을 불쑥 내밀었다가 너무도 반들반들한 피부를 보고 급하게 드레스의 팔소매를 내렸다.
“어쨌든. 또 결국 우린 이것 때문에 말다툼을 하고 있잖아. 네가 벌인 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거지. 이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들키지 않게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고 생각해.”
“…뭐?”
“너를 안아 들지만 않았으면 들키지 않았을 텐데.”
“야!”
가르치고 달래긴 개뿔. 소희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벌게진 얼굴 앞에서 조슈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았잖아, 우리. 나만 좋았어?”
“대체 뭐가?”
“욕실에서.”
그 말에 소희의 머릿속에 일주일간 욕실에서 있었던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래, 좋긴 좋았지.’
과거를 회상하던 머릿속이 번뜩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 남자한테 완전히 말리고 있었다.
“야! 지금 그 말이 왜 나와!”
분노인지 민망스러워서인지 자꾸만 피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러한 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남자가 팔을 내밀어 소희를 끌어당겼다.
덜커덩, 돌길에 마차가 흔들려 소희는 균형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조슈아의 품속에 다시 돌아와 안긴 채였다.
“그만 화내. 내가 미안해.”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팔목을 잡았던 손이 얇은 허리에 엉켜 단단하게 휘감았다. 조슈아는 소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방법이 잘못된 거 알아. 이제 이러지 않을게.”
“…정말?”
“정말.”
글쎄, 이 남자를 한 달 동안 지켜본 결과 그의 행동에 도통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야속하게도 차분하게 읊조리는 말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사람의 심장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힘 말이다.
“조슈아. 이러지 않아도….”
소희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바라보다가 그 위에 작은 손을 겹쳤다. 그리고 핏줄이 올라온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내 이상형은 너야.”
“…뭐?”
평소에 거짓말을 잘하지 못함에도 이상하게 지금은 그런 말이 잘도 나왔다. 어쩌면 이 남자의 눈을 보지 않고 얘기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소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널 좋아해.”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등 뒤에 닿는 남자의 가슴만이 오르내렸다. 목덜미에 한층 달아오른 뜨거운 숨결도 계속해서 와 닿았다.
침묵 속에서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와 불규칙한 심장 박동.
아무런 대답 없이, 그게 다였다.
* * *
가죽 소파와 책상 사이 공간에 낯익은 장발의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남자를 가볍게 훑고는 조슈아는 소파 쿠션에 몸을 기댔다.
뒤따른 메이컨이 가까이 와 고했다.
“페트린 후작 부인이 사주한 것이라고 합니다.”
“페트린?”
“페트린 후작이 외도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상대가 아리아드 님이라고….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둔 모양입니다.”
메이컨은 눈치를 보며 잠시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조슈아에게 딱히 놀라운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익숙해지는 제 처지가 조금 우스워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뻔한 외도 사실 따위가 아니었다.
붉은 액체가 아리아드의 몸을 뒤덮는 장면은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외려 제 심장이 저 아래로 낙하하는 듯한 아찔함이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조슈아의 눈초리는 예리했다. 그는 2층 난간에서 피를 뿌린 범인의 얼굴을 그 짧은 순간에 잡아냈다. 개교식 행사에서 자리를 안내하던 사용인 중 한 명이었다.
“페트린 후작 부인이 혼자 꾸밀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개교식의 총책임자인….”
황후 폐하.
그 이름을 꺼내려다가 메이컨이 다시 말을 멈칫 세웠다. 그의 아들 앞에서 함부로 단정 지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뒷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당일, 자신이 주최한 행사에 그러한 큰일이 벌어졌음에도 태연자약하던 모습은 확실히 이상했으니까.
조슈아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일간지를 펼쳤다.
바로 어제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세간은 벌써 아리아드의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그 사건에 따라오는 것은 당연지사 황태자비의 자격 논란이었다.
첫 여성 학교 개교식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이런 식으로 돌리다니.
홀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기자들을 떠올리고는 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조슈아가 일간지를 대충 구석에 던지고는 말했다.
“우리도 기사 하나 띄우죠.”
그 의미를 파악한 메이컨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어젯밤부터 소희는 잦은 두통에 시달렸다. 그래서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침대에 있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누워 있다 보면 졸음이 몰려와 또 잠을 자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한 와중에 오래간만에 꾼 꿈도 기가 막혔다.
단두대의 칼날, 단상 위를 구르는 잿빛 머리통, 사방으로 번지는 핏방울과 웃고 있는 조슈아.
‘조용히 살면 될걸. 눈앞에서 자꾸 심기를 건드리니 죽는 거야.’
꿈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소희는 피가 잔뜩 묻은 단상 위를 엉금엉금 기었다. 그리고 조슈아의 새까만 제복 바지의 밑단을 잡았다.
‘조슈아, 왜 그래. 나도 널 좋아한다니까?’
소희의 그러한 말에도 조슈아의 대사는 똑같았다. 원래의 꿈 내용에서 전혀 바뀐 게 없었다.
‘아리아드, 남 탓할 필요 없어.’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 보는 시선 또한 그랬다.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데온이 죽은 것도, 곧 네 부모가 죽을 것도.’
‘조슈아, 난 소설을 살려야 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이렇게 죽을 수 없어!’
‘그리고 네 아이가 죽는 것까지. 모두 다 네 탓이야, 아리아드 피어슨.’
곧이어 그때의 그 꿈처럼 칼날이 떨어졌다. 이내 어룽거리던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었다. 아리아드로 빙의한 소설 속 소희의 최후였다.
긴 어둠 끝에서 소희가 벌떡 일어났다. 입이 잔뜩 말라 목이 타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마침 메리가 간단한 점심 식사를 챙겨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그걸 올려놓고는 창백하게 질린 소희의 낯을 보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냥 좀 이상한 꿈을 꿔서 그래.”
“저하를 부를까요?”
“아니!”
갑작스레 소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메리가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누가 봐도 이상한 반응이었다.
소희는 한쪽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다.
“아니, 그, 많이 바쁘잖아. 별것도 아닌 걸로 부르기는 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메리가 다가와 손수건으로 잔뜩 젖은 그녀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뒤이어 점심 식사에 함께 들고 왔던 신문 두 개를 그녀의 무릎에 내려놨다.
“이건 어제 거고, 이건 오늘 일간지예요. 아리아드 님이 메인에 딱 올라와 있어서 몰래 들고 왔어요. 사진 좀 보세요. 진짜 너무 예쁘게 나오지 않았나요? 이 궁전에 신문을 다 없애라고 명하셔서 진짜 어렵사리 챙겼잖아요.”
“신문을 다 없애?”
“네, 저하께서 눈에 안 보이게 다 치워 버리라고 명하셨거든요.”
대체 왜?
짧은 의문과 함께 소희는 접혀 있는 어제자 일간지를 펼쳤다. 그리고 사진 아래 내용을 읽자마자 의문이 해소되었다.
온통 아리아드 피어슨에 대한 안 좋은 내용이었다. 심지어 개교식을 준비하는 사용인들에게 폭언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는 둥,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여 있었다.
황후의 투자로 굴러가는 신문사니 별로 놀라울 것도 없었다.
“메리, 너 내용은 아예 안 읽어 봤구나.”
“아, 네. 글 읽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메리가 해맑게 답했다. 소희도 마주 보고 그냥 똑같이 웃어 주고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일간지는 조슈아의 투자로 굴러가는 신문사였다. 똑같이 아리아드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지만 내용은 극히 달랐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러했다.
‘권력 싸움에 이용당하는 아리아드. 개교식 사건은 황태자를 음해하는 세력이 꾸민 일. 개교식 사건에 중심에 있던 의문의 남자는 황후가 사주한 일이라고 자백하며 사건은 미궁으로 빠짐. 어쩌면 이번 사건은 매킨리 황실의 분열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름.’
이로 인해 자국민들의 혼란이 야기된다며 이야기를 끝마치고 있었다.
아리아드 피어슨 개인의 논란을 황실의 분열로 옮겨 와 초점을 비앙카와 조슈아에게로 돌려놓았다. 단지 아리아드에게로 향하던 비난이 이제는 둘에게로 번질 것이다.
“한마디로 개싸움이구만.”
소희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알 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 아까 꾸었던 꿈 때문에 두통이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했다.
신문을 접어 구석에 치운 메리가 그녀의 무릎 위에 트레이를 올려놨다.
“땅콩 호박 수프에요. 얼른 드셔 보세요.”
메리가 수저를 들어 소희의 입가로 가져갔다.
갑작스레 콧구멍으로 음식 냄새가 들어차자 소희가 입을 막았다. 토기가 올라와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왜 그러세요?”
“메리, 나 화장실….”
“네?”
소희가 덮고 있던 이불을 던지고 침대에서 급하게 뛰쳐나왔다.
그로 인해 트레이가 엎어져 위에 있던 수프가 침대 위로 몽땅 쏟아졌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