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
단상 앞에 선 소희가 입술을 뗐다. 일단 감사 인사로 말문을 열어 황후와 켈리가 했던 말을 비슷하게 흉내 냈다.
“이 학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모두 남은 개교식 일정을 즐겨 주세요.”
이가 드러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대충 넘어가는 줄만 알았더니만.
“행사 개요.”
단호한 비앙카의 목소리가 단상을 내려가려는 소희의 발목을 붙잡았다. 소희가 다시 중앙에 서고는 미소 지었다. 미소 짓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개요, 개요라.
행사에 관한 건 저들끼리 준비했으니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본인은 그냥 테이블 위에 놓인 마카롱이나 처먹다가 궁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 망할 놈들, 유치하게 진짜.’
소희는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비앙카와 켈리의 뒷모습을 잔뜩 흘겼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단상 위가 유독 거대해 보였다. 또한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이 몇 배는 불어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몰라, 웃는 얼굴에는 침도 못 뱉는다니까 일단 웃고 보자.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보통 행사를 치를 때의 순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결국 너무도 길어진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대강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구석 자리에 있던 장발의 남성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 것은.
“더러운 마녀 아리아드 피어슨은 물러가라! 매킨리 황실을 망하게 할 황태자비는 물러가라!”
그 거친 목소리가 쩌렁쩌렁 장내를 울렸다. 그 말이 신호탄이 되어 소희가 위치한 단상 위쪽 난간에서 무언가가 콸콸 쏟아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아리아드의 온몸을 덮어 진보랏빛 드레스가 벌겋게 물들었다.
소희는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비린내 나는 액체를 두 손으로 닦아 냈다.
깨끗하게 펼쳐진 시야에 서프라이즈 선물이라도 되는 듯,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있었다. 소희의 앞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말의 머리였다.
‘무슨 일이지?’
난생처음 겪어 본 일에 소희는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놀란 것도 있었지만 상황 파악을 위해서였다.
우두커니 서 있는 소희와는 다르게 정작 다른 사람들이 비명을 터트렸다. 아리아드의 욕을 했던 남자는 장정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정적이 휩싸였던 홀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소희는 그러한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스치는 시야 안에 잘린 말의 머리와 피 웅덩이가 있었고, 이내 시야의 끝에는 두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켈리와 비앙카가 아리아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짧은 찰나에 깨달았다. 이 피와 말의 머리가 의미하는 것을.
말 사업은 피어슨 가문이 힘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 초석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피어슨 가문에 대한 일종의 도발이나 경고라고 봐도 되는 건가.
소희가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 아래로 피가 뚝뚝 방울져 흐르자 그걸 가볍게 털어 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들었다.
이런 식으로 선전 포고를 한다?
“아주 새로워. 짜릿해.”
소희가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웃었다. 다 털어 내지 못한 핏방울이 그녀의 잇새로 스며 고였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켈리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미치광이를 보는듯한 눈길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랬다.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작가로서 이만한 희극은 없었다.
새로움에 눈이 반짝거리는 소희에게 누군가 소리치며 뛰어왔다.
“아리아드!”
단상 위로 급하게 올라온 조슈아가 소희를 안았다. 그로 인해 깔끔하게 차려입은 회색 정복이 붉게 물들어 감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자꾸 속눈썹에 맺혔다. 그래서 소희는 두 손을 들어 닦아 냈다. 또렷해진 시야 안에 조슈아의 새하얀 낯이 보였다. 얼굴을 잔뜩 구긴 채였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겁먹지 마.”
조슈아는 그렇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눈을 비비적거리는 걸 우는 걸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하는 남자가 그렇게 소희를 안아 들고 단상을 내려가는데.
아니,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상황은 조금 이상했다.
소희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그의 팔뚝을 훑었다. 정장을 차려입고 있어 붕대를 감은 두 팔은 가려진 채였다.
소희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우선 눈앞의 상황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단상을 내려오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어나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조슈아, 내려 줄래?”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조슈아가 그녀를 내려 주었다.
그 품에서 벗어난 소희가 망설일 것 없이 황후와 켈리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을 중심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어쩜 좋아.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아리아드가 밉보인 사람이 한두 명이어야죠. 이런 일이 한 번쯤 일어날 줄 알았다니까.’
‘황태자비 때문에 행사가 엉망이 됐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저들끼리 그리 수군거렸다. 그럼에도 소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목에 힘을 주고 황후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몰골이 이러해서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리고는 숙덕이던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하셔야죠. 저 때문에 행사가 엉망이 된 게 아니라, 어느 정신 나간 놈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그리 말하며 소희는 정신 나간 놈을 지명하듯 검지를 폈다.
그곳에 황후와 켈리가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리자 소희가 실수했다는 듯 급하게 남자가 나간 출입구 방향 쪽으로 손 위치를 바꿨다.
“아, 여기가 아니라 저기!”
옆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조슈아가 웃고 있는 듯했다.
소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주인공들에게로 걸어갔다.
홍해가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사람들은 소희와 닿지 않기 위해 비켜섰다. 심각한 피비린내와 그걸 뒤집어쓴 끔찍한 몰골은 모두에게 기피 대상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소희가 입을 뗐다.
“가기 전에, 열심히 준비한 행사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심심찮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거침없이 황후에게로 다가섰다. 피할 생각도 못 하던 비앙카가 그대로 소희의 포옹 공격에 당했다.
“이것은 위로의 포옹입니다.”
진주가 달린 새하얀 드레스가 소희의 드레스와 같은 빛깔로 얼룩덜룩 물들었다. 황당함에 비앙카가 눈을 끔뻑이다가 그녀를 밀어냈다. 하지만 드레스를 복구하기에는 늦은 대처였다.
소희는 웃으며 옆에 서 있던 켈리에게도 다가갔다. 켈리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부딪혔다. 그에 소희는 망설이지 않고 불쑥 다가가 꽉 껴안았다. 오래된 친우를 만난 듯 반갑게 말이다.
“켈리 양, 아주 재밌는 스토리가 만들어질 것 같아.”
“…뭐?”
귓가에 낮게 속삭이고는 소희가 몸을 떼어 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붉게 물든 드레스만큼이나 켈리의 얼굴도 엉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하, 이만 가죠.”
아리아드가 옆에 서 있던 조슈아의 팔짱을 꼈다. 그렇게 그들은 등을 보인 채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벗어났다.
켈리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아드와 같은 단상에 올라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섰다. 그놈의 깨끗한 핏줄이 무엇이라고, 유레시아 가문의 반쪽짜리 셋째 딸은 아리아드와 같은 자리에 서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같은 선상에 오른 것이다.
‘사생아보다 못한 황태자비.’
가끔 그리 들려오는 말소리가 켈리의 입꼬리를 씰룩이게 했다. 그리고 결국엔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저 여인은 엉망인 몰골이니 자신은 분명 통쾌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입안이 너무도 떫은 것이.
“…왜, 진 거 같지.”
켈리의 눈망울이 오래도록 남녀가 사라진 출입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마차는 황태자 궁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소희는 졸음이 몰려와 조용히 하품했다.
조슈아는 손수건으로 소희의 드레스를 닦아 주다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눈물이 맺힌 소희의 눈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울지마.”
“…안 우는데?”
“내가 범인을 찾아내서 몇 배로 갚아 줄게.”
“오우, 그건 좀….”
괜히 섬뜩해졌다. 아리아드를 아끼는 이 남자라면 정말 무슨 짓이든 할 것만 같았다.
사실 소희는 이번 일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리아드의 기를 죽이기 위해 애써 준비한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황태자비의 명예 실추 같은 것은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아니었다.
제 목적은 단지 여주인공이 되는 것에 있었으니까. 조슈아의 사랑만 있다면 자신의 자리는 영원할 테니, 방금 전 사건은 그저 소설을 맛있게 만들어 주는 조미료에 불과했다.
그러한 소희의 속마음을 이 남자는 알 턱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를 안아 들고 이렇게 정성스레 등을 토닥여 주고 있겠지.
다정하긴 또 더럽게 다정한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소희는 아무 말 없이 그 토닥거림을 받고 있었다. 미심쩍게 여겼던 부분이 뇌리를 스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난 일주일을 회상하는 소희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혼자서는 씻지도 못한다기에 씻기고, 숟가락을 들 수도 없다기에 밥까지 먹여 줬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리아드를 안아 들 정도로 멀쩡했다.
대체 이게 뭐람?
언제 팔이 낫냐는 말에도 하나같이 다들 이렇게 말했었다.
‘꽤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조슈아, 손은 대체 언제 나은 거야?”
그 말에 등을 쓸던 커다란 손이 멈칫 세워졌다.
“그래, 지금 내 등을 만지는 그 손 말이야.”
“어?”
“너 팔 멀쩡하잖아. 그런데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허리를 감싸고 있던 남자의 손가락에 설핏 힘이 실렸다. 그러다가 그가 다시 작게 읊조리며 하던 행동을 이어 갔다.
“아리아드, 속상했지? 괜찮아. 이번 일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테니까….”
“아니, 놔 봐. 너 그러고 보니까 진짜 웃긴다.”
“그래.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으니까 놔 봐.”
자꾸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실리자 소희는 버둥거리다가 그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건너편 의자로 가서 앉아 그를 마주 봤다.
정면에서 눈이 마주치자 조슈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소희는 그대로 그의 팔소매를 올려 붕대를 풀었다. 낮게 한숨을 뱉은 남자는 포기했다는 듯 그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붕대를 푼 살갗에 여전히 길게 그어진 상흔이 있었다.
“진짜 다친 건 맞고. 근데 팔을 못 쓰는 건 아니다?”
소희가 그 상처를 한참 바라보다가 얼굴을 들어 조슈아를 바라봤다. 그는 더 이상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담담히 말했다.
“내가 그었어.”
“뭐?”
“내가 그었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대답에 소희는 멍해져서 눈을 끔뻑였다.
궁지에 몰렸으니 그냥 뻔뻔해지기로 했는지 자해를 한 남자는 다시 황당한 말을 뱉었다.
“너한테 보살핌받고 싶어서 그랬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상형이 그거라며.”
“아니, 조슈아. 내 이상형이 환자라고 한 적은 없는데.”
그리 중얼거리던 소희의 머리에 불과 얼마 전에 그와 했던 대화 내용이 스쳤다.
‘이상형이 정확히 어떤 남잔데.’
‘뭔가 지켜 주고 보살펴 주고 싶은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그런 사람이랄까….’
그 기억을 떠올리고는 소희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툭 터트렸다.
그와 반대로, 앞에 있는 붉은 눈망울은 몹시도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