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44화 (44/120)

Chapter 44

여성 학교 개교식 당일이었다.

연갈색 벽돌로 지어진 기다랗고 낮은 건물 앞으로 마차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소희는 마차에서 내렸다.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진보랏빛 드레스와 조화로 만든 머리 장식이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아유,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인데.”

소희가 투덜거리고는 입구로 향했다. 여성 학교 개교식인 만큼 사교계에 꽤 이름을 날리는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아리아드는 여자들에게 완벽하게 소외당하는 존재였으므로 남자가 적은 이곳은 그녀에게 야생과도 같았다.

여태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 준 조슈아는 다른 일 때문에 소희와 동행하지 못했다. 대신 메리가 그녀의 에스코트를 도왔다.

“아리아드 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노려보는 걸까요?”

메리가 작게 속삭였다.

한 달 동안 아리아드로 살아온 소희에게는 익숙한 시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아드는 잘생겼다 싶으면 유부남도 꼬시는 대단한 캐릭터였으니까. 저 날붙이 같은 예리한 시선을 보아하니 한때 아리아드에게 제 남편을 빼앗겼던 여인들일 것이다.

“메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항상 견제를 받는 거야. 이걸 왕관의 무게라고 하지. 함께 이 무게를 견뎌 내자.”

더러운 치정 싸움을 대강 아름답게 포장하는 말에 메리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켈리와 비앙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소희는 지난 일주일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아리아드 님, 황후 폐하께서 전령을 내리셨습니다.’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었더라….

너는 몸이 좋지 않으니 켈리가 이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네 역할을 위임받는다, 또한 행사에는 오지 않아도 좋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러했다.

그땐 애초에 몸이 거의 다 나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은 딱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방치할 계획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계획은 그저 개교식을 통해 켈리의 이름을 알리는 것에 있는 걸까?

갈등을 만들고 해결하는데 도가 튼 작가 소희는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황태자비 역할을 모두 위임한다는 것에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하여 메리를 통해 수소문 한 결과, 소희의 직감은 정확했다.

그들은 초대장 발신인을 아리아드 매킨리로 적어 보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소희는 곧바로 깨달았다. 유레시아 부인이 켈리를 사교계에서 고립시키려고 써먹던 방법이었다.

유레시아 부인은 초대장의 발신인을 켈리로 써 놓고 몇 명의 인사를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다. 그리고 모임이 끝난 뒤 그들에게 따로 찾아가 제 여식이 많이 부족해 실수를 했다는 둥, 켈리를 깎아내리며 그들과 친분을 쌓아 갔다.

켈리 역시 자신이 당했던 방식을 이용하여 아리아드를 사교계에서 고립시킬 계획이었을 거다. 그렇게 두어선 안 되기에 소희는 며칠 전 그들에게 개교식에 참여할 것이라고 전달했다.

“난처하게 만들려고 열심히 꾸몄을 텐데, 안타깝지만 내가 만든 스토리네.”

소희는 행사장 입구에 서 있는 켈리와 비앙카를 바라봤다. 그리고 초대장 몇백 장을 일일이 다 작성하느라 저릿한 팔목을 두어 번 흔들었다.

“비저하,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누구지.

반사적인 반응으로 함께 웃었지만 당황스러움에 소희의 입매가 살짝 떨렸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인물의 정보를 알기 위해 찬찬히 뜯어보았다.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백발의 귀족 부인이었다.

“오벨린입니다.”

역시 세월은 무시하지 못한다. 노인은 소희의 표정만 보고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을 눈치챘다.

“아, 오벨린 부인. 반갑습니다.”

조슈아에게 주요 인물들의 정보를 듣고 온 소희는 곧바로 아는 척했다.

아리아드에게 유일무이하게 적대적이지 않은 귀족 여성이었다.

그녀가 낳은 많은 아들들이 출세하였고 그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딸을 가진 귀족 집안들이 매달렸다.

결혼 시장에서 명망 높은 부인이었다. 그 말은 즉, 여성들이 많은 이 자리에서 꽤 입김이 강하다는 소리였다.

조슈아에게 물어봐 공부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소희는 곧바로 그녀의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나름 사이좋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마침 오벨린 후작 부인 뒤 편에 있는 켈리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빛 눈망울에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켈리는 영향력 있는 몇몇 부인들의 초대장을 일부러 빠뜨렸을 거다. 그리고 저 낯빛을 보아하니 그 주인공 중 하나가 오벨린 후작 부인이겠고.

마차에서 내린 다른 귀부인이 와 물었다.

“안녕하세요, 아리아드 님. 필체가 다른 초대장이 두 개씩이나 왔던데 앞에 기사들에게 무엇을 보여 줘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혹, 왜 초대장이 두 개나 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제 이름을 대신해 편지를 보낸 일꾼이 있는데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어떤 분께 보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기에 제가 전체적으로 초대장을 다시 돌렸답니다.”

그랬다. 소희의 팔목이 저릿저릿한 이유는 그곳에 있었다.

애초에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어쩌면 조금 미련하다 싶게 대처했다. 백 장이 넘는 종이를 쌓아 놓고 일일이 수기로 작성했으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벨린 후작 부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 것이 누락 됐나 보군요. 저는 한 장밖에 오지 않았던데. 그런데 그 일꾼이 누굽니까.”

소희의 시선이 여전히 금발의 여인에게 닿아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그녀 주변에 있던 귀족 부인들이 고개를 돌렸다.

“황후 폐하께서 요즘 아주 아끼시는 인사랍니다.”

“저 아이는… 유레시아 가문의 셋째딸?”

“그 어미가 몸을 팔던 자라고 하던데. 황후 폐하께서는 어쩌다 저런 이를….”

켈리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에 귓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여전히 자신을 예리하게 노려보기에 소희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웃어 주었다. 그것도 아주 활짝.

작가 한소희를 얕보지 말라 이거야.

아리아드의 붉은 입매가 하늘을 향해 솟았다. 그와 반대로 켈리의 것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홀 안으로 들어서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2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강당이었고 곳곳에 샹들리에가 달려 있어 들어서자마자 주황빛 조명이 온몸을 감쌌다.

단상 주변으로 원형 테이블이 위치했다. 그 위에는 화려한 센터피스와 디저트들이 놓여 있었다.

소희는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유리 테이블들 사이 중앙에 깔린 붉은 융단 위를 비앙카가 밟았다. 그리고 새하얀 조명이 떨어지는 단상 위에 올랐다.

황후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소희는 당당한 여성의 완벽한 표본인 그녀를 바라보며 내심 멋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아드에게 적대적이지만 않다면 모든 것이 완벽할 텐데.

점차 길어지는 연설에 쓸데없는 상념에 빠져 있던 소희의 어깨를 누군가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흑발의 남자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슈아? 여긴 왜 왔어?”

소희가 그의 귀에만 들리게 낮게 소곤거렸다. 그러자 조슈아가 의자를 끌어 그녀와 몸을 밀착시키고는 똑같이 귓가에 속삭였다.

“일을 급하게 끝내고 왔어. 불안해서 혼자 보낼 수가 있어야지.”

“저는 다 큰 성인인데요.”

“머리를 다쳐서 기억이 아직까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잖아.”

소희는 대충 둘러댔던 거짓말을 나지막이 되짚는 목소리에 속이 뜨끔했다. 이 자리에 오기 위해 조슈아에게 귀족 부인들의 인적 사항을 알려 달라고 말하면서도 써먹었던 거짓말이었다.

이 거짓말의 유효기간이 얼마나 가려나.

힐끔 눈을 굴려 남자의 낯을 확인하니 그 입매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곳에는 다행히도 의심의 기운은 읽히지 않았다.

안심하며 소희는 다시 단상 위를 바라봤다. 기나긴 연설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테이블 중앙 조화가 꽂힌 장식물 뒤로 언뜻 켈리의 금발이 보였다. 소희가 앉아 있는 자리는 황실 사람을 위한 상석이었다. 하지만 이 강당에서 화려한 개교식이 진행될 수 있도록 일한 일꾼인 켈리는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리아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사생아인 켈리 유레시아는 그와 같은 위치일 수 없었다. 앞에 나설 권리와 힘, 그 어떠한 것도 없으니까.

그러한 켈리에게 힘을 실어 주는 내용이 이쯤이었는데.

“이 모든 걸 준비하며 저를 많이 도와준 감사한 인물이 있습니다.”

비앙카의 강한 언성이 거대한 홀을 메웠다.

“켈리 유레시아.”

막바지로 달리던 연설이 켈리의 이름으로 끝맺음하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인에게로 시선이 모여들었다.

순백의 구두가 붉은 카펫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걸이가 황후의 것과 닮아 있었다.

켈리가 비앙카의 옆에 섰다. 중앙의 조명을 받아 금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여주인공의 자태였다.

유레시아 가문의 피가 반만 섞인 셋째 딸, 몸을 팔던 어미를 가진 불우한 아이.

사람들이 그리 일컫던 여인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황후 폐하와 함께 이런 자리를 만들 수 있어서 영광스러웠습니다. 또한 오늘 참석해 이 자리를 빛내 주신 귀빈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켈리가 입은 드레스의 색감과 닮은 따스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레시아 무리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특히 로잘린과 유레시아 부인은 자꾸만 저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피려고 만면에 힘을 주었다.

앞에서 켈리와 비앙카가 서로에게 감사한 것을 읊으며 떠들고 있었다.

‘아주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 났네.’

소희도 괜스레 불퉁해져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앞에 놓인 디저트를 들어 우걱우걱 입에 쑤셔 넣고 있던 때였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태자비 저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일순 빠르게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케이크를 입에 넣고 마저 삼키지도 못한 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두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소희는 그대로 자신을 곧게 직시하는 눈동자와 마주했다. 켈리의 입꼬리가 조명이 달린 천장을 향해 솟았다. 아까 소희가 지은 미소와 유사했다.

“몸이 안 좋은 와중에도 이 행사를 위해 애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비앙카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황태자비의 한마디를 빼놓을 수 없겠죠. 앞으로 나와 주세요. 그리고 뒤이어 진행될 행사 개요도 황태자비가 함께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호라, 지금 앞에 세워 놓고 망신을 주겠다 이거지.

소희는 입에 구겨 넣은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일어났다. 부드럽게만 느껴졌던 시폰 케이크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뭐, 그래도 어쩌겠어. 일단 나가야지.

익숙하지 않은 구두를 신은 소희의 발걸음이 카펫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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