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
소희의 턱을 가볍게 잡고 있던 손가락이 밑으로 떨어졌다. 데온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한동안 날 못 볼 거야. 그래도 금방 돌아올 거니까, 다시 돌아왔을 땐 옆에 있게 해 줘.”
그 말에 소희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데온을 죽이지는 않겠다던 조슈아의 소행이 분명했다.
떠나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휴온을 전쟁터로 보낸 것을 보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데온이 가는 곳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쉽지 않은 곳이겠지.
“대체 어딜 가는데?”
소희의 물음에 따라오는 답은 없었다. 데온은 그저 아리아드가 주는 확신만을 원했다.
“약속해 줘. 날 버리지 않겠다고.”
어깨를 잡은 손아귀에 점차 힘이 실렸다. 바로 앞에 놓인 잿빛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소희를 삼킬 것처럼 제 마음을 담아 출렁이고 있었다.
방문 밖에서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그들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그 앞에 펼쳐질 광경은 모두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안 그래도 바람기 있는 황태자비라는 소문에 그대로 기름을 들이붓는 이상한 자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이 방에 데온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문제였지만.
소희는 낮게 한숨을 뱉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알았어.”
어쩔 수 없이 한 대답이었다.
확신을 주지 않는다면 이 남자는 몇 시간이고 이 상태로 있을 위인이었으니까. 집착남이라는 설정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다행히도 원하는 답을 들은 데온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피할 새도 없이 이어진 스킨십이었다.
허리를 편 데온이 눈을 접어 웃었다. 사나워 보이기만 하던 남자가 천진하고 순수하게 보이는 이상한 순간이었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 아리.”
담백한 인사와 함께 그는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데온이 사라진 창문을 바라보다가 소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희가 아리아드로 빙의 한 파장 덕에 소설은 심각하게 뒤틀렸다.
켈리를 사랑했어야 할 조슈아는 아리아드를 원했고, 켈리는 조슈아의 손에 죽었어야 할 아리아드를 자신이 직접 죽이고 싶어 했으며, 막장 며느리가 그 자리를 꼿꼿이 지키고 있어 황후는 타지 않아도 됐을 속을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또 뭐가 바뀌었더라….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틀어진 와중에 이상하게 변치 않는 것이 있었다.
아리아드를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집착남.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는 캐릭터 설정은 데온뿐이었다.
“…정말 이상해.”
소희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데온이 가볍게 입을 맞췄던 자리에 계속해서 뭉근한 감촉이 남아 있었다.
* * *
꼬리가 길면 잡힌다지만, 이 황태자 궁에서는 그리 길지 않아도 잡힌다.
“찰스. 엔드로 가문의 외동아들입니다.”
메이컨이 조슈아에게 고했다. 조슈아는 멀리에서 철창 너머에 손이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소희의 말을 듣고 재빠르게 움직인 조슈아는 사람을 풀어 결국 저 남자를 잡았다. 멍청한 변태는 그런 대담한 짓을 저지르고도 황태자 궁을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남자를 훑던 날카로운 시선이 묶여 있는 손으로 향했다. 오른손에 여자의 속옷이 쥐어져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마침 고개를 든 찰스와 조슈아의 눈이 마주쳤다. 꽤 먼 거리임에도 적대감이 읽혔다.
“그 여자와 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입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 커다란 목소리가 옥 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런 미치광이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조슈아를 보며 메이컨이 침을 꼴깍 삼키고는 남은 정보를 읊었다.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작게 속삭였는데도 불구하고 귀가 좋은 미치광이가 대신 답했다.
“제정신입니다!”
메이컨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미묘하게 달라진 제 주인의 분위기를 그는 귀신같이 눈치챘다. 상당히 좋지 못한 기류였다.
“따로 길게 얘기하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차분하게 달래는 언성이 안타깝게도 조슈아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조슈아는 저 남자가 그렸던 그림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리아드의 몸을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리지 못할 정도의 아주 섬세한 손길이 숨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점의 위치 같은 것.
조슈아가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내 찰스 엔드로가 갇혀 있는 철창 앞에 도착했다.
“몸을 섞으면서 결혼도 약속하고 그랬나 보지.”
메마른 목소리가 지하에 울렸다. 나직함에도 그의 말끝이 돌로 만든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아리아드, 그 여자랑.”
마치 아예 남을 언급하는 듯한 어투였다. 조슈아를 따라온 메이컨만이 그 서슬 퍼런 기류를 읽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눈치 없는 찰스는 대꾸하기에 바빴다.
“맞습니다. 저하와 곧 이혼할 사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슈아가 불쑥 메이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감한 눈빛이 닿고 김빠진 웃음소리가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아주 제정신이네. 왜 이상한 거짓말을 해요, 메이컨.”
메이컨이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 모골이 절로 송연해졌다.
그가 조슈아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철창에서 조금 떨어져 복도 끝으로 향했다. 선선히 그를 따른 조슈아가 말을 해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엔드로 공작님은 아시다시피 따르는 가문들이 많습니다.”
“아, 엔드로 공작. 그렇지.”
헨리킨 엔드로, 귀족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부호였다.
조슈아를 따르는 사람이지만 그의 돈을 따르는 것이지 절대적인 충성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는 내용이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컨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특히 하나뿐인 아들이라 저분을 무척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심상한 대꾸가 이어졌다. 진정 메이컨의 말에 의문을 가지는 듯했다.
그에 굴하지 않고 메이컨은 더 덧붙였다.
“이번 철도 사업에 필요한 영토 대부분이 엔드로 공작 소유지여서….”
그래, 사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결국 이성적이지 못하게 나간다면 제 주인이 손해 볼 것에 대해서.
“저하,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평상시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랬기에 메이컨은 말하기 어려운 본론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
그 말을 곱씹으며 조슈아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철창으로 다가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열쇠로 감옥의 문을 열었다.
문턱을 넘으며 그가 읊조렸다.
“그거 좋죠. 이성적으로 대해 보겠습니다.”
위에서 찰스를 내려 보던 조슈아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속옷을 빠르게 뺏어 들었다.
조슈아는 그것이 무슨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곱게 접어 제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긴 찰스가 이를 아드득 갈았다. 불쾌감이 담긴 녹색 눈동자를 보고 불현듯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스토킹에, 도둑질에, 심지어 무단 침입까지.”
조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올라가 있던 입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제 이성은 이렇게 하라고 말하네요.”
까만 구둣발이 찰스의 오른손을 밟았다. 속옷을 쥐고 있던 손이었다. 묶여 있는 손이 거세게 밟히자 그 무력에 남자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단순히 밟는 정도가 아니었다. 돌바닥에 부딪혀 뼈가 조각나는듯한 기괴한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남자는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조슈아는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다른 발로 그의 얼굴을 거칠게 차 버렸다.
쾅, 남자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가 철창에 부딪혔다. 머리에서 피가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다.
“시끄러워. 입 다물어.”
싸늘한 일갈에 찰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꽉 물어 비명을 삼켰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이어진 발길질에 터져 나오는 소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광경을 철창 밖에서 지켜보던 메이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제 예감이 들여 맞았다. 불안했던 전조는 결국 이러한 사단을 만들어 냈다.
물론 찰스 엔드로가 잘한 짓은 없었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이미 꼭지가 돈 조슈아의 심기를 계속해서 건드려 댔으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피가 난무한 광경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주인의 사업 건에 대해 이익과 불이익을 셈하던 메이컨은 머릿속에 기다란 작대기를 계속해서 그려 나갔다.
마이너스 이십, 마이너스 오십, 마이너스 백.
비릿하게 퍼지는 선혈의 향이 말해 주었다. 엔드로 가문과의 관계는 여기까지라고. 미래를 점치는 능력은 없더라도 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저하, 이제 그만하시는 게….”
조슈아가 애써 곱씹던 이성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붉은 눈망울에는 살벌한 감정만이 불타고 있었다. 그랬기에 당연히 메이컨의 말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한참을 그렇게 구타하는 소리가 잦아든 것은 남자가 기절한 뒤였다. 찰스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고 옷매무새를 고친 조슈아가 감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앞에 낙담하며 서 있는 메이컨에게 곱게 웃어 보였다.
“메이컨,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 * *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었다.
소희는 숟가락으로 크림 수프를 떠 조슈아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가 팔을 다친 뒤로부터 며칠 동안 일상적으로 이뤄지던 루틴이었다.
피곤하다며 침실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던 남자는 일주일 전 아리아드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 이불을 덮고 아기 새처럼 밥만 받아먹고 있으니, 모양새가 영락없는 환자였다.
“범인은 잡았어?”
“잡았지.”
“그래? 대체 누구야?”
포크로 음식을 집어 건네며 소희가 물었다. 그런데 음식을 받아먹는 조슈아의 입술이 도통 열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누구냐니까?”
“몰라도 돼.”
“나랑 관련된 일인데 그런 게 어딨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무척 단호한 언성이었다.
물론 그렇긴 하겠지.
소희는 포크로 샐러드를 휘적거리다가 제 방 창문에 힐끔 시선을 두었다. 휴온, 데온, 또 누군지 모를 변태 놈까지, 많은 이들이 타고 넘어온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 닫혀 있는 게 아니라 막혀 있었다. 사용인들을 시켜 창문 위에 철판을 박아 넣었으니까.
진짜 저렇게까지 한다고?
소희의 경악 어린 시선에 그는 덤덤히 말했다.
‘다 너를 위해서야.’
불과 삼십 분 전 일을 회상하다가 소희가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한참을 그렇게 식기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릴 때였다.
“이제 네 어장에 나 하나만 남았네.”
조슈아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그렸다. 소희는 그 기괴한 말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괜히 말을 돌렸다.
“팔은 언제 다 나으려나.”
그녀의 시선이 붕대로 칭칭 감긴 조슈아의 팔을 응시했다.
“글쎄.”
제 몸에 무신경한 남자는 타인의 일을 대하듯 여전히 무심하게 말했다.
“꽤 오래 걸릴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