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
프랭클린 제국은 보통 안건이 주어지면 상위 귀족들의 의견을 묻고 투표를 했다. 겉보기에는 꽤 민주적인 방법이었다.
필트모어 공작의 오르딘 지역으로의 좌천은 만장일치. 데온의 무효표 하나를 제외하면 결과는 그러했다.
쾅, 조슈아 옆 상석에 앉아 있던 재상이 서류에 국새를 찍었다.
정말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투표였다.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황태자의 돈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었으니, 실상은 독재라고 봐도 무방했다.
“…빌어먹을.”
데온이 낮게 욕을 읊조렸다. 그리고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던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는 어떻게든 이 결정을 번복하고 싶었다.
이곳에 남아 귀족들 사이에서 소외를 당해도 상관없었고, 투자금이 모두 빠져나가 필트모어의 가세가 기울어 가는 것도 그리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아리아드.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옆에 머무르고 싶었다.
구름에 가려졌던 태양이 드러나자 유리창 안으로 햇볕이 쏟아졌다. 테이블 위로 길게 뻗은 빛이 데온의 잿빛 눈망울에까지 닿자 그가 눈을 설핏 찌푸렸다.
그 사나운 눈길이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회의실 안에 혼자 남은 조슈아에게로 닿았다.
판도를 뒤엎을만한 마땅한 방도는 없었다. 시간을 내어 그것을 궁리할 뇌도 그리 똑똑하지 못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지금은 잠시 뒤로 물러나 추후를 기약하는 법. 한마디로, 일단 빌고 본다는 거였다.
서류를 모아 정리하던 조슈아와 눈이 마주치자 데온이 침묵 속에서 입을 뗐다.
“나랑 얘기 좀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조슈아가 그를 내려봤다. 다리가 수십 개 달린 벌레를 보아도 저런 눈빛이 나오진 않을 터였다.
이어지는 대답은 없었다. 조슈아는 빠르게 등을 돌려 회의실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문을 거칠게 닫고 사라졌다.
데온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분노를 삭이고 차분해지려고 해도 저 재수 없는 놈은 절로 욕을 나오게 했다.
하지만 이에 포기하지 않고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았다.
궁전 앞에 대기 중인 마차에 오른 그가 조슈아의 마차를 쫓을 것을 명했다.
한참을 달려 황태자 궁에 다다르자 데온이 마차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건물 내부로 사라지려는 남자의 등에 대고 참아 왔던 욕을 터트렸다.
“나랑 얘기 좀 하자고, 개새끼야!”
그 거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익숙한 여인이 궁전 입구로 불쑥 튀어나온 것은.
“조슈아! 이상한 사람이 내 방에 들어온 것 같아!”
소희가 조슈아를 보자마자 불쑥 제 손에 들린 것을 내밀었다.
“이것 좀 봐!”
일순 공기가 빠르게 얼어붙었다. 조슈아의 뒤를 따르던 사용인들과 그의 뒤를 쫓던 데온까지.
거대한 종이 속 그림은 그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종이 위에 담긴 살색 풍경, 특히 중요 부위를 부각하여 섬세하게 그린 그림이었다.
“어우, 사람이 많네.”
소희 역시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이 그림을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조슈아만 보이기에 달려왔더니 등 뒤로 이렇게 더 많은 사람이 있을 줄이야.
당황스러워 그림을 든 손끝이 곱아들었다. 그 앞에서 가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자연스럽게 제 팔을 등 뒤로 감춘 조슈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다들 눈 감아.”
민망한 상황 속에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던 소희는 뒤늦게 그 종이를 돌려 안았다.
그런 와중에 뒤편에 있는 데온과 눈이 마주쳤다. 조각같이 날카롭게 뻗은 코 아래로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쌍코피였다.
* * *
당황스러웠던 순간 때문인지 소희의 설명은 장황했다.
산책하는데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방에 도착해 보니 이 그림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창문도 열려 있었다.
그 구구절절한 설명 속에서 요점 파악이 끝난 조슈아는 급하게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그림은 시녀의 손에 들려 사라졌다.
소희는 그녀에게 당부했다.
“불결하니까 불에 다 태워 주세요. 흔적도 남지 않도록.”
사라지는 와중에도 언뜻 보인 그림은 다시 보아도 여전히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침실에 혼자 남은 소희는 이불에 제 얼굴을 묻었다. 조금 전 상황이 뇌리를 스쳤다.
딱딱하게 굳어 선 사람들의 낯과 한숨을 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조슈아, 그리고 화려한 쌍코피로 대미를 장식한 데온까지.
따지고 보면 진짜 제 몸도 아닌 것을, 왜 수치스러움은 제 몫인지 모르겠다며 소희가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새까만 시야 위로 떠오른 기억들이 일순간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빠르게 흩어졌다.
소희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들려오면 안 되는 곳에서 울린 노크 소리가 께름직한 기분이 들게 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직접 이름을 부른 적은 없지만, 머릿속으로 떠올리자마자 나타난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호랑이였다.
창문을 가볍게 뛰어 넘어온 데온이 창가에 위치한 티 테이블에 앉았다.
“어떻게 올라왔어?”
“벽을 타고.”
이젠 나무도 없는데 묘기에 가까운 일을 벌이고도 태연한 대답에 소희는 손뼉을 쳐 주고 싶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데온을 소희는 찬찬히 훑었다.
“코피는 멎었네.”
그러자 데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대체 그 이상한 그림은 뭐야?”
“나도 모르겠어. 누가 그려서 선물을 해 줬더라고.”
“대체 어떤 변태 새끼가.”
그의 콧잔등에 잔주름이 졌다. 범인이 눈앞에 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을 거 같은 기세였다.
그러다 마침 눈이 마주쳤다. 사나운 기세가 빠르게 가라앉았고 그 눈매가 한층 유순해졌다.
“아리, 보고 싶었어.”
나직하게 터져 나온 진심 어린 말에 소희는 눈을 끔뻑였다. 갑작스레 너무 진지해진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가까워지자 소희는 침대 위에서 주춤거리며 가까워진 만큼 멀어졌다.
결국 침대 헤드에 등이 닿고서야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데온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아리아드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깊은 잿빛 눈망울을 다시금 마주하자 소희는 문득 잊고 있던 사건이 떠올랐다.
조슈아의 팔을 다치게 한 것일 수도 있는 범인.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제 눈앞에 있었다.
“데온, 혹시… 너 사람을 시켜서 조슈아를 죽이려고 했어?”
방에는 둘 뿐이었는데 괜히 누가 들을까 소희는 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파도를 쳤다.
“…사람을 시켜서 조슈아를 죽여?”
소희의 말을 똑같이 따라 읊조린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거 아주 훌륭한 방법이네. 나중에 그렇게 해야겠다.”
그럼, 그렇지. 역시 데온이 범인이라는 발상은 그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사실 진짜 그런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범인이 이실직고할 리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진지하게 앞으로 그 방법을 써먹어 보겠다며 말하는 데온의 낯은, 범인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진정 누구일까. 소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에 빠져 있던 찰나였다.
어느덧 가까워진 커다란 손이 소희의 왼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놀라서 움찔거리며 빼내려고 하자 생각보다 그는 순순히 물러났다.
“아리, 잘 지내는 것 같네. 몸도 거의 다 나은 것 같고.”
데온의 쫙 찢어진 눈매는 아리아드를 마주할 때면 그 개성을 잃고 귀엽게 구부러지곤 했다. 그리고 지금 역시 그랬다.
“건강해 보이고, 또….”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상상으로만 그리던 백옥같은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데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목울대의 깊은 고민이 묻어났다.
그녀를 갖고 싶었지만 진정 쟁취한 것은 없었다.
탑에 갇혀 있을 때에도, 또 며칠 전에도, 조슈아에게 안겨 멀어져 갔던 뒷모습은 데온을 한없이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게 안겨 가는 아리아드의 모습이 또 마냥 나빠 보이지만은 않아서.
그래서 괜히 심술이 나는 것이다.
“아리, 그 말 아직 유효해? 날 사랑한다고 했던 거. 진정한 사랑은 나 하나라고 했던 거 말이야.”
결국 그렇게 심술 섞인 채근이 툭 터져 나왔다.
그에 소희는 망설였다. 어떠한 대답이 앞으로 소설의 전개에 적당한지 한참을 그렇게 머리 굴렸다.
그 침묵을 더 기다리지 못한 데온은 조급하게 대답을 갈구해 왔다.
“하나만 약속해 줘. 사랑한다고 말했던 게 거짓말이었어도 상관없으니까.”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리아드가 말하는 사랑에는 그 어떠한 진심도 없다는 것을.
열렬하게 서로의 몸을 바라며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서도 저 여인은 다음 날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알고 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옆에 있게 해 줘.”
그 간절한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진심 어린 언성에 잠시 혼을 놓은 소희가 정신을 차린 것은 어느덧 데온이 제 몸 위로 올라탔을 때였다.
“날 얼마든지 이용해도 좋아.”
바로 앞에서 데온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변한 구도에 소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의 손가락이 소희의 턱을 잡고 치켜올렸다. 금방이라도 두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그 앞에서 뜨거운 숨과 함께 나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버리지만 말아 줘.”
바로 앞에 놓인 입술을 삼키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데온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소희는 무의식중에 저도 모르게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긋난 시선이 다시 한 점에서 만났다. 데온은 애써 들끓는 마음을 억누르며 보랏빛 눈망울을 빤히 응시했다.
조슈아와 아리아드. 그 사랑이 쌍방이라면.
가정하고 싶지 않은 한 편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문을 닫아 놓아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퍼지는 연기처럼 그것은 속수무책으로 빠르게 번져 갔다.
너의 선택이 조슈아라면.
결국 비관적으로 다다른 결론에 데온은 왈칵 얼굴을 구겼다.
“아리, 나 버리지 마.”
그 선택이 내가 아니라 해도, 그렇다 해도.
날 버리지 마.
처량한 가락을 띠는 그 목소리의 끝이 잔뜩 갈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