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
집무실의 불빛은 시계의 시침이 세시를 넘어가도록 꺼지지 않고 있었다.
새롭게 시작한 무역 사업과 주변국들과의 날카로운 외교 문제가 몰려 그 여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팔소매를 걷은 조슈아 양팔이 주황빛 조명 아래 자유롭게 움직였다. 쌓여 있던 종이들이 쉼 없이 넘어가 드디어 밑바닥을 보이던 때였다.
그 맞은편 가죽 소파에 허리를 숙이고 앉아 몇 장의 서류를 검토하던 메이컨이 계속해서 삼켜 누르던 말을 꺼내었다. 괜한 오지랖이니 하지 말아야지 인내해도 걱정이 한숨과 함께 터져 나왔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조슈아의 팔에 그의 주름진 눈매가 고정되었다.
저것은 지워지지 못하고 영영 흉터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제 앞에 있는 완벽한 지배자는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생기면 자신의 몸까지 이용 수단으로 쓰는 상당히 정신 나간 짓을 자주 했었다. 그러니 저러한 종류의 미친 짓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틀림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에 무신경한 남자는 여전히 종이에 눈을 고정한 채로 열의 없는 대답을 흘렸다.
“사랑받고 싶어서요.”
사랑, 심지어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란다.
기가 차서 조용히 헛웃음을 뱉은 메이컨이 금세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그는 어이없는 명이라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두 팔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을 하던 남자.
‘저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고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리아드 앞에서 한동안 팔을 쓰지 못하는 겁니다.’
통보와 함께 비릿한 향이 집무실을 퍼져 나갔다. 아무렇지 않게 붉은빛 쇠붙이를 그에게 건넨 조슈아가 밖으로 선혈을 뚝뚝 흘리며 걸어가 사용인을 불렀다.
메이컨은 단검의 손잡이를 타고 흐르던 뜨거운 선혈의 감각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다시 집무실 책상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그의 두 팔을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하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인을 가르치려 드는 버릇없는 마음가짐이 아닌 그저 걱정스러움이 묻은 말이었다.
똑똑한 남자에게도 하얀 도화지 같이 그 어떠한 것도 적혀 있지 않는 무지한 부분이 있다. 진실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으므로 사랑하는 법 또한 알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저하, 사랑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메이컨은 참고 있던 말을 건네고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빠르게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무례한 발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종이를 놓은 조슈아가 다시 시선을 내려 제 팔을 바라봤다.
“다 알아요. 어떻게 보이는지. 저도 제가 충분히 미친 것 같으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방 안을 메웠다.
계속해서 부풀던 감정은 이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떠올리는 것은 무의미했다.
부정해 왔지만 이 감정이 점차 커지는 순간부터 조슈아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자신은 항상 패배자일 것이라고. 이제는 완벽한 을이 되어 그 패배감마저 싫지 않았으니 더 이상 이 감정의 출구는 없다는 것을.
“잠시라도, 아주 잠깐만이라도 관심받고 싶어지는 이 마음이 뭘까 매일같이 고민했어요.”
“….”
“그냥 사랑받고 싶다고 표현하면 되는 거겠죠.”
사랑받고 싶어요, 저.
그 말을 조용히 되뇐 조슈아가 다시 종이를 잡았다.
진심 어린 목소리에 메이컨은 그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다시 뜨겁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 * *
메리는 붙어 있는 시간이면 쉼 없이 종알거렸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걸 겨우 참은 소희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말했다.
“메리, 그 이야기는 삼십 분 전에 똑같이 했어.”
“아, 제가 했었나요?”
조슈아는 업무상 회의를 하러 나가고 혼자 남은 소희는 방에 누워 시체처럼 있는 것 대신 오랜만에 산책을 택했다.
그러한 선택에 수다쟁이 메리는 포함시킨 적이 없었건만 조슈아가 붙여 둔 시녀는 떨어질 틈을 주지 않았다.
“아, 제 동생이 기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하더라고요. 요즘 떠오르는 트렌즈 신문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는데 지금도 아카데미 수석이라 저는 동생이 충분히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그 이야기는 한 시간 전에 했어.”
“아, 그러면 제 둘째 동생 이야기는요? 제가 그것도 했던가요?”
더는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린 소희는 울창한 숲길로 이어진 정원의 출구를 빠져나왔다. 그 뒤로 메리의 동생 자랑이 배경 음악처럼 깔리고 있었다.
돌바닥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정원의 길과는 다른 흙바닥을 밟으며 느긋하게 걸었다. 푸르른 침엽수들이 사방에 둘러싸여 주변을 에워싸자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어젯밤 결국 일을 치렀다. 심지어 그 밤을 함께한 남자는 팔을 쓰지도 못하는 상태였는데 말이다.
조슈아는 손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을 소희가 진행해 나갔다. 그 일을 떠올리자 이내 창피해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걸 못 참아서. 아픈 사람을 데리고, 결국.
조슈아도 원하는 눈치였던 것 같기는 했지만 소희는 괜히 환자를 데리고 몹쓸 짓을 한 것 같은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어깨에 두른 숄을 여민 소희가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왼편에서 여태 눈치채지 못했던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우거진 나무 기둥 뒤로 사람인지 커다란 짐승인지 모를 무언가가 훅 지나쳤다.
“메리, 저기 뭔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조잘거리던 메리의 음성이 멎었다.
“어디요?”
메리는 그녀를 따라 목소리를 낮추고는 소희가 바라보는 곳으로 눈길을 두었다.
“잘못 봤나?”
“네, 아무것도 없는 거 같은데요.”
짹짹, 고요함 속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오자 소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분명 뭔가 이쪽을 쳐다본 거 같은데.
“여기서 나가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소희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아 숲길을 빠져나가는 것을 택했다.
어쩌면 예전부터 계속해서 아리아드를 감시했을 수도 있는 비앙카의 수족이거나, 궁전에서 꽤 멀리 걸어왔으니 조슈아가 붙여 둔 호위 기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자인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으므로 소희는 그 시선을 조슈아의 호위 기사로 정의 내렸다.
가지런히 정돈된 정원을 지나 궁에 다다랐다. 그리고 불안이 눈앞에 하나의 형체가 되어 제대로 나타난 것은 불과 얼마 뒤의 일이었다.
“어느 미친놈이.”
소희가 작게 욕을 읊조렸다.
아리아드의 침대 위에 커다랗고 두꺼운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꽤 훌륭한 솜씨로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벽에 걸린 각종 명화에 버금가는 그림체였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 아리아드 님. 이게 대체 무슨….”
뒤늦게 그것을 발견한 메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 그림의 주인공은 아리아드 피어슨.
아름다운 여자를 이 종이에 모두 담아내겠다는 열정이 돋보였다. 그녀의 알몸까지 하나하나 섬세하게 그린 것을 보면 보통 열정은 아닌 듯했다.
비앙카의 수족도 아니고 조슈아가 붙인 호위 기사도 아닌, 방금 느낀 그 시선의 정체는.
“아리아드 주변에 스토커가 있나?”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아리아드가 많은 남자들을 거느리고 놀았던 만큼 이상한 놈들도 수없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뇌쇄적인 표정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그림 속 여자를 보며 소희는 양팔에 소름이 돋아 팔을 쓸어내렸다.
방은 어떻게 들어 온 거지?
괜히 으스스해져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본 소희는 열려 있는 창문에 시선이 닿았다.
* * *
회의실 안에 단연 돋보이는 두 명의 주인공이 있었다.
스무 명 가까이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정중앙에 앉은 조슈아와 그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데온을 반복적으로 흘끔거렸다.
조사를 받고 그대로 처형당할 줄 알았던 미친개가 풀려났다.
황태자를 때려 폭행죄로 탑에 갇히기 무섭게 데온이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포티어스 후작의 증언은 귀족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소문이 거의 확실시되다시피 했던 것은 미친개가 풀려나자마자 황태자에게 칼을 겨누고 달려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엄청난 기사 내용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횡령 건까지 이어졌다. ‘황실의 돈을 훔친 도둑은 누구인가.’라는 대문짝만한 제목 밑에 데온의 얼굴이 커다랗게 담겨 있었다.
실상은 조사로 데온이 아닌 그 밑에 수행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세한 내막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그 헤드라인 밑에 사진 속 인물을 주목할 뿐.
회의실 안 사람들은 그 요주의 인물을 바라봤다.
붉은색 쿠션이 놓인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몸을 기대고 다리를 떨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 심각한 사안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늘게 이어지고 있는 긴장감에 그들이 조금씩 숨이 막혀 올 무렵이었다.
“데온 필트모어.”
침묵 속에서 종이만 넘기던 조슈아가 그를 부르자 모든 이들의 동공에 당혹감이 서렸다. 직접적인 언급이라니, 곧 무슨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류였다.
그러한 불안정한 기류와는 다르게 조슈아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일주일 뒤에 오르딘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일방적인 통보가 끝나기 무섭게 잿빛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저하께서 무슨 권리로?”
“권리 행사가 아니라 필트모어 공작께서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을 설명했을 뿐입니다.”
사무적인 언성과 함께 더는 그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데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제 할 일을 하기 바쁜 모습이었다. 그에 데온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딱히 그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저를 치워 버리고 싶다고 말씀하시죠. 그편이 솔직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매서운 목소리에 주변 이들의 어깨만 움츠러들고 있었다.
데온의 이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오르딘 지역이 필트모어 사유지이긴 했지만 현재 그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폐쇄된 지역이었다. 던마크 제국과 맞닿아 있는 지역 중 하나로 침입이 잦은 지역에 역병까지 도니 황제가 관리를 포기하고 역병을 잠시라도 막을 심산으로 폐쇄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곳에 관리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역병으로든 침입으로든 계속해서 죽어 나갔고 현재 그 자리는 공석이었다.
“많은 죄를 지은 자에게 내리는 형벌치고는 꽤 괜찮은 편인 거 같은데.”
조슈아가 펜대를 돌리며 무심하게 답했다. 그러자 데온이 책상을 쾅 내려치고 일어났다.
“그건 네 새끼가 꾸민…!”
사람들의 경악 어린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데온이 숨을 한 번 크게 뱉고는 제 분노를 다스리려고 했다.
이렇게 발버둥 쳐 봐야 이제 모든 이들의 눈에 자신은 황태자에게 대드는 미친놈이었고, 저 앞에 앉은 황태자는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살려 두는 너그러운 위인처럼 보일 것이었다.
개 같은.
작게 욕을 읊조린 데온이 위압감 느껴지는 여러 시선에 굴복하고 자리에 거칠게 앉았다.
“필트모어 사람들을 보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면 마땅히 가주가 가서 해결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아리아드 옆에서 치워 버리겠다는 거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데온을 마주한 조슈아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