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
한 시간째 대가 없는 종이 넘기기 노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소희는 맞은편 벽면에 붙어 있는 괘종시계를 확인하고는 조용하게 하품을 했다. 어느덧 여섯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피곤해?”
소리 내지 않았는데도 귀신같이 눈치챈 조슈아가 말을 건네 왔다.
“아니, 안 피곤해. 너는?”
피곤하다고 해라, 제발. 더는 못 하겠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웃으면서 심중으로는 그렇게 빌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궁금해서 함께 읽던 서류들이 현재는 그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의 나열로 지루함만 남아 늘어지게 하품이 나왔다.
하지만 그러한 소희의 바람과는 다르게 지친 기색이 전혀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난 평생 이러고 있어도 괜찮을 거 같아.”
“정신이 나갔구나.”
“팔을 영원히 못 써도 괜찮을 거 같고.”
“그래, 제대로 정신이 나갔네.”
그리 대답하고는 소희는 다시 서류 종이를 한 장 넘겼다. 팔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아니다.”
“….”
“팔이 없으면 널 못 만지네. 그건 안 되겠다.”
이러한 기습 공격에 아직까지 면역이 없는 소희는 또 콜록, 사레가 들렸다. 노곤하게 몰려오던 잠이 한꺼번에 달아난 기분이었다.
소희는 무슨 말을 이어 가야 할지 몰라 민망함에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이 정도면 나 돈 받고 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넘기라는 말도 없었는데 당황스러움에 제멋대로 종이를 넘긴 소희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읽히지도 않는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자신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결국 그 깊은 시선에 패배한 귓불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붉어지고 있었다.
“한 시간에 그래도 많이 쳐 줘야겠어. 난 좀 비싼 몸이라….”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또 헛소리를 주절주절 뱉는 입술 옆으로 말캉하고 따뜻한 감촉이 닿았다. 그리고 쪽, 달콤한 향기를 남기고는 금방 떨어졌다.
놀란 소희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로 굳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남자는 또 그 얼굴에 걸맞은 요망한 말을 뱉었다.
“내 돈, 다 네 거야.”
그렇게 소희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게 만드는 일들은 그 후로 쉼 없이 일어났다. 그것은 전혀 의도치 않아도 조슈아가 팔을 쓰지 못해 계속해서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했다.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도 쉬고 저녁을 먹자던 남자와 함께 다이닝룸으로 가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 앞에 앉았다.
보살펴 준 그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수족을 자처한 소희는 조슈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음식을 하나하나 먹여 주었다.
딱히 큰 불평 없이 소희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던 조슈아는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속이 간질거렸는데.
더욱 낯부끄러워지는 사건은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아리아드의 방에 도착해서 발생했다.
“씻어야 하는데.”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침대에 앉아 그리 중얼거리는 조슈아의 시선이 소희에게 제대로 꽂혀 있었다.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천천히 깨달음을 얻은 소희가 뒤늦게 반응을 터트렸다.
“씨, 씻겨 달라고?”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피식 웃음을 흘린 조슈아가 협탁 위에 놓인 호출 종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저것 좀 흔들어 줄래?”
“…씻어야 하잖아.”
“그래, 씻어야 하니까 사람 좀 불러 줘.”
“…왜?”
제대로 고장 난 소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고의 흐름은 그저 ‘이 남자는 벗어야 하고 나는 씻겨야 한다’에 닿아 있었다. 왜냐하면 이 남자도 제 몸을 직접 다 씻겨 주었으니까. 그러니 본인도 기브 앤 테이크를 정확히 따지자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난 아직 이 남자의 근육질 몸을 섬세하게 만져 줄 자신이 없는데.
동공에서 지진이 난 소희가 빠르게 고개를 숙여 멍하니 대리석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리아드, 혼자 씻기 힘들 거 같으니까 시녀를 불러 줘.”
조슈아가 정신이 나가 있는 소희에게 요점만 정확히 짚어 말했다. 그제야 자신에게 씻겨 달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소희가 나지막한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종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것도 문제가 있는데.
종을 흔들어 시녀를 부르면 곧 벌어질 일에 대해서 떠올린 소희가 다시 굳어 섰다.
“너 그럼 지금 빨가벗고 외간 여자한테 온몸을 보여 주겠다는 거야?”
그렇게 경로를 이탈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리아드, 원래 씻을 때는 벗어야 하고 난 몸을 보여 주겠다는 게 아니라 씻겠다는 거야.”
조슈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삼천포로 빠진 대화를 본래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럼에도
곧 욕실에서 벌어질 살구색 영상이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소희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대체 뭐가.”
날 때부터 시녀에게 온갖 시중을 맡긴 남자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발언이었지만 그저 소희를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려 주었다.
한계 없는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친 소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그리고 결국 저 혼자 또 한 번 굳은 결심을 했다.
“…내가 해 줄게.”
“뭘.”
“내가 씻겨 줄게!”
팔과 함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확실한 조슈아가 아까와 같은 웃음을 흘렸다. 잔뜩 긴장한 소희는 더 이상 그 이상한 미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들려오는 선선한 대꾸는 확실히 이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드, 그러면 옷부터 벗겨 줄래?”
* * *
그렇게 혼란의 연속이었다.
근육이 적절히 자리잡힌 흉터투성이 복부에 닿은 손가락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주체할 수 없이 뛰어 대는 심장을 붙잡고 소희는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슬립만 입은 소희의 맨다리에 그의 몸을 닦아 주다가 튄 거품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럼에도 소희는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시선은 그의 상체에만. 밑은 내려다보지도 말 것.
그것을 쉼 없이 되뇌던 뇌 회로와 커다란 상체를 담은 눈동자, 그리고 모든 팔과 다리가 고장이 난 듯했다.
욕조에 기대앉은 조슈아는 그런 소희를 여유롭게 훑었다. 느른한 눈길이 천천히 닿자 소희가 체감하는 주변 온도가 후끈 올라갔다.
“언제까지 위에만 닦아 주고 있을 거야.”
“콜록.”
“이러다가 살갗이 다 벗겨지겠어.”
조슈아가 키득거렸다. 발가벗은 것은 이 남자인데 왜 수치스러워하는 건 자신인지 소희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아리아드.”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딱딱히 굳어 선 보랏빛 눈동자와 탁해진 붉은 눈동자가 만났다.
“목은 하나도 안 닦였어.”
“다, 닦을 거야.”
“그러려면 더 가까이 와야지.”
나긋한 재촉에 소희가 가늘게 숨을 뱉었다. 호기롭게 씻겨 주겠다고 나섰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는지 소희는 이곳을 벗어나 그가 없는 곳으로 숨고 싶어졌다.
욕조 안에서 겨우 팔만 뻗어 그 끝에서 남자의 너른 가슴만 문지르던 소희는 눈을 꽉 감고 그의 다리 위로 올라섰다.
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조슈아도 그녀와 몸을 밀착시켰다.
슬립 원피스가 허벅지 위쪽까지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믿고 싶지 않지만 소희는 계속해서 시선을 피해 부정해 왔던 그의 하체가 제 속옷 아래 닿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조슈아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왼쪽 목 부위를 드러내 보이며 그가 입매를 부드럽게 휘어 올렸다.
“자, 어서.”
떨림을 자제하려고 손끝에 힘을 줘 봤자 소용없었다. 조슈아가 하체를 살짝 움직이자 그로 인해 느껴지는 감각은 닿아 있는 살결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대로 모든 것이 빨갛게 달아올라 펑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리아드, 목 뒤도.”
슬립은 이제 거품이 잔뜩 묻고 젖어 제 기능을 해 주지 못했다.
나직한 목소리를 따라 절로 움직이는 손가락이 잔뜩 떨리면서도 그의 목 뒤에 닿았다. 그를 감싸 안은 거 같은 모양새가 되자 조슈아가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곳에 자신이 원했던 것을 찾은 듯한 만족감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바로 앞에 조각 같은 얼굴이 놓여 있다. 숨을 불규칙하게 내쉬던 소희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조슈아는 작고 탐스러운 입술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저녁 식사의 그 어떠한 것들보다 달콤한 먹거리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것들과는 다르게 아무리 삼키고 휘저어도 느끼기 힘든 포만감에 그는 그것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탐닉했다.
소희가 숨을 헐떡이자 조슈아는 잠시 떨어져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끊임없는 갈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는 본능적으로 다시 입을 맞추었다.
소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 위에서 하체를 부드럽고 천천히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행한 행동이었다. 아직까지 아릿하게 고통이 남아 있는 부상당한 다리의 감각은 잊힌 지 오래였다.
작은 손에 들려있던 샤워 타월이 옆으로 툭 떨어졌다. 그와 함께 조슈아가 멀어지고 욕실의 조명 덕에 다홍색으로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남자의 입술이 떼어졌다.
“이제 밑에도 닦아 줘야지.”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 문장을 한숨처럼 흘려보냈다. 조슈아의 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자 소희는 그것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로써 그가 원하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 어떠한 것에도 강압적인 것은 없었지만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천천히 타월을 다시 잡으려던 손이 그의 목소리에 의해 멈춰 섰다.
“손으로.”
천사의 얼굴을 한 남자가 상냥하게 명령을 내렸다.
동공에 미세한 떨림이 있긴 했지만, 소희는 더 이상 눈을 피하지 않고 그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아랫배가 빠듯하게 조여 오자 소희는 깨달았다. 자신의 몸도 그를 열렬히 원하고 있노라고.
조슈아는 그녀의 숨결을 잔뜩 흐트러뜨렸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젖게 했다. 그의 온몸에 방울져 흐르는 물기가 닿지 못하는 깊은 곳까지.
놀랍게도 그것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