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9
소희를 태운 마차는 다시 황태자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섶에 심어진 시든 화초들을 의미 없이 살피던 소희의 눈매가 점점 좁혀 들었다.
“트렌즈 페이퍼….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머릿속에서는 비앙카가 던졌던 신문지에 가장자리에 적혀 있던 신문사 이름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소희의 중얼거림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메리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저 그 신문사 알아요! 매킨리 황실에서 만들어 보급했던 신문을 제치고 이번에 월 판매량 1위를 기록한 신생 신문사 아닌가요?”
“신생 신문사?”
“네, 갑자기 엄청난 투자를 받아서 빵 뜬 회사요.”
엄청난 투자라는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비앙카를 떠올린 소희는 눈을 번쩍 떴다. 신문사 이름이 낯이 익다 했더니 본인이 시놉시스에 적어 놨던 이름이었다.
유레시아 가문에서 만든 신문사였다. 피폐한 이야기 속에서 고통받던 켈리는 비앙카의 도움을 받아 입지를 다졌고, 결국 자신을 무시하던 아버지가 잘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 그 신문사를 이용해 정치적 여론을 형성하고 자신을 괴롭히던 악역들에게 시원하게 복수하는 것이 이 장치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현재 그 신문의 역할은 아리아드를 매장하는 것에 있었다. 작가 본인이 만들어 둔 장치가 소설의 전개를 위협하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제보자가 비앙카였다면 그녀는 아리아드에게 사람을 계속 붙여두고 있을 터였다. 분명 필트모어 저택에서 나오는 아리아드의 흑백 사진은 소희가 빙의하기 전 아리아드였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따라붙는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골똘히 고민하던 소희가 갑자기 웃음을 씩 흘렸다.
“그래, 그냥 평탄하게 흘러가면 재미가 없지. 아주 흥미롭게 돌아가는구만.”
소희의 중얼거림에 메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이상하게 바라보는 메리를 앞에 두고도 소희는 자신의 세계에 빠져 계속 중얼댔다.
“아이, 참. 조슈아. 티 좀 내고 도와주지. 어떻게 그렇게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아주 든든한 방패구만. 으하하.”
어차피 이 세계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아무리 그렇게 괴롭힌대도 조슈아의 사랑만 받는다면 어려울 것이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계속해서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보는 메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저기, 아리아드 님.”
“응?”
“도착했는데… 밖에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제야 흠뻑 빠져 있던 생각을 떨친 소희가 마차에 난 창으로 황태자 궁전을 살폈다. 별다를 것 없이 이제는 너무 익숙한 건물이었는데 메리의 말대로 사용인들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분주해 보였다.
“왜 저렇게 다들 뛰어다니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리둥절하며 마차에서 내린 소희의 발걸음도 그들을 따랐다.
카펫이 깔린 바닥을 밟는 불규칙한 구두 소리가 점차 빨라지고 이내 집무실이 있는 삼 층에 다다라서는 뛰는 지경까지 왔다.
“아리아드 님, 아직 뛰시면 안 돼요!”
그런 소희를 메리는 숨을 헐떡이며 쫓았다.
조슈아가 머무는 층에 도착하자 작게 일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어 대리석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복도의 붉은색 자국이 집무실 문까지 길게 이어졌다. 사용인들이 열심히 물걸레질을 하고 있었지만 차마 다 닦이지 못한 핏자국이 소희의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소희는 걸레질을 하고 있던 시녀 한 명을 잡아서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저하께서 다치셨습니다.”
* * *
이 세계의 가장 강한 인물이 정체 모를 괴한의 습격을 받았단다.
소희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정확히는 심각하게 다쳐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그의 두 팔을.
“…너, 이 상처도 별거 아니라고 할 거지.”
작고 가늘게 터져 나온 소희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몸이 잘게 떨려 오는 그녀와는 다르게 저물어 가는 붉은 햇살을 등지고 있는 조슈아의 모습은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별거 아니라고 하기만 해 봐. 팔을 아예 못 쓴다잖아.”
조슈아는 아직 아무 얘기도 꺼내지 않았는데 소희 혼자 흥분해서 미리 그의 말을 틀어막았다. 그러한 소희를 가만히 주시하던 남자가 이러한 상황과는 맞지 않는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아예 못 쓰는 게 아니라, 한동안 못 쓰는 거.”
불필요하게 굳이 문장을 정정해 주는 느긋함까지 겸비한 채로.
황당함에 실소를 뱉고는 소희는 생각에 잠겼다. 이 시기에 맞춰 괴한의 등장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생뚱맞은 전개였다.
심지어 조슈아가 다쳤다는 건, 아주 커다란 중심 스토리일 텐데 그러한 이야기는 시놉시스에 한 자도 기록한 적이 없었다.
본인 덕에 시놉시스가 뒤틀렸다고 하면 그 괴한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일 테니, 거기까지 사고의 흐름이 닿은 소희는 아리아드와 엮인 사람 중에 범인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일단 비앙카. 티를 내지는 않지만 조슈아에 대한 사랑이 큰 인물인데 사람을 시켜 자신의 아들을 공격할 이유는 없으므로 패스.
다음은 켈리. 아무리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고는 하지만 짝사랑에 푹 빠져 있는데 소중하게 생각하는 남자를 공격할 이유는 없으므로 이 인물도 패스.
이 피폐물 속에서 조슈아에게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황제 자리를 놓고 싸우는 다니엘 매킨리뿐인데.
그는 현재 전쟁터에 있었고 기승전결 중에 전의 끝부분에서나 등장해 켈리와 조슈아의 사랑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다니엘도 패스.
그렇다면, 누가 남았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인물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내던 소희가 갑작스레 머릿속에 스친 인물에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데온?
그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얼마 전 조슈아의 도발에 넘어가 그를 실제로 죽이려고도 했고 이틀 전 곧바로 조사를 받으러 끌려갔으니 이미 풀려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시켜 사주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무모하게 군다고?
“범인이 곧바로 도망가서 잡지도 못했다면서. 누군지 알아내긴 정말로 힘든 거야?”
그에 조슈아는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했다.
계략 남주도 알아내기 힘든 범인이라. 데온이 들키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똑똑한 계획을 짰다는 게 조금 안 믿기긴 하지만 그나마 아리아드와 엮인 인물 중에서 그가 제일 가능성이 컸다.
“아리아드.”
하얀 붕대로 칭칭 감긴 그의 두 팔을 보며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던 소희가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창가로 넘어온 노을보다 더 짙고 붉은 눈동자가 소희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집중 좀 해 줘.”
“어?”
“나 아파.”
여유로운 낯은 어디로 가고 조슈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눈짓으로 팔을 흘깃 쳐다보곤 말을 이었다.
“너무 아파.”
항상 제 몸에 상처는 별거 아니라고 하던 남자가 웬일로 고통을 토로했다. 놀란 소희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그냥 팔이 다 아파.”
그 말에 조슈아의 옆자리에 앉은 소희가 붕대를 감은 팔 한쪽을 조심스레 만졌다.
“아.”
그러자 위에서 고통 어린 탄식이 터져 나왔다.
칼에 찔리고 나서도 단 한 번도 아픈 티를 낸 적 없던 남자가 이리 아파하다니. 얼마나 크게 다쳤길래 저러는지 상처를 확인하기 조금 두렵긴 했지만, 소희는 팔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만져 천천히 붕대를 풀었다.
“어떻게 다쳤나 보게 조금만 참아 봐. 대체 어떻게 다쳤길래 이렇게 아파하는…. 허어.”
말을 잇던 소희가 크게 한숨을 뱉었다. 붕대를 풀은 오른팔에 기다랗게 패인 상처가 있었다. 절개 흉터로 실밥 자국이 있었고 다 낫는다고 해도 자국은 영원히 남을 정도의 커다란 상처였다.
“대체 이게 무슨….”
소희가 울상이 되어 훌쩍였다. 내 남자 주인공이 이렇게 다치다니.
그녀의 시선을 따라 조슈아의 얼굴이 비스듬히 내려왔다.
“아프긴 한데 괜찮아. 죽을 정도는 아니야.”
누가 누굴 위로하는지.
깊은 심해처럼 차분한 눈동자가 소희의 표정을 살피다가 눈매를 접어 웃어 보였다.
“지금 웃음이 나와?”
“네 표정이 웃겨. 바보같이 일그러졌어.”
그 말에 소희가 매섭게 째려보자 조슈아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그 표정이 나은 거 같아.”
“농담할 때 아니야, 지금.”
인상을 잔뜩 찌푸린 소희가 그의 팔에 다시 조심스레 붕대를 둘러 주고 있었다.
“아리아드.”
미묘하게 뿜어져 나오던 화기가 그로 인해 끊겼다.
“아픈 건 괜찮은데 문제가 있긴 해.”
“뭐? 뭐가 또 문제야?”
“혼자서는 일하기가 힘들 것 같네.”
조슈아의 눈길이 집무실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 위에는 아직 다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그걸 훑던 소희가 주먹을 꽉 쥐고는 벌떡 일어났다.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못할 것은 없지.
조슈아도 본인이 아플 때 휠체어 노릇까지 할 정도로 각종 시중은 다 들어줬으므로 이제 그녀가 그 은혜를 갚을 때였다.
아, 물론 아직까지 아리아드의 몸이 완벽히 다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리아드는 다리가 불편하다면 조슈아는 팔이 불편했으니 딱히 도움을 주는 것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 터였다.
“가서 앉자. 내가 종이를 넘겨 줄게.”
굳은 의지를 다지며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의미 모를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하지만 소희는 그것을 아예 듣지 못하고 그를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에만 몰두해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조슈아가 그녀를 따라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그의 눈길이 부드럽게 소희를 훑어 내리다가 테이블 앞에 도착해 의자를 가리키는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자, 어서 와서 앉아.”
그 말을 따라 순순히 자리에 앉은 조슈아가 의자 옆에 선 소희를 올려 봤다. 주변을 둘러보던 소희는 자신이 앉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자를 끌고 오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조슈아가 붙잡았다.
“내 무릎에 앉아.”
“엥? 나는 환자 무릎에 앉는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아니야.”
“무릎에 앉는 게 내가 서류 보기 편할 것 같아서 그래.”
“아….”
그 말에 조슈아와 자신의 구도를 머릿속으로 그리던 소희가 나름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다시 한번 조금 전보다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소희가 보는 앞에서 숨기지 못한 웃음이었다.
“너 대체 왜 웃어?”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그녀의 미간이 제대로 좁혀 들었다. 저렇게 다치고도 실없이 웃는 남자라. 아무래도 팔과 함께 머리도 다친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다시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애써 웃음을 참던 조슈아가 예상치 못한 대꾸를 했다.
“재밌어서.”
이로써 소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머리도 다친 게 확실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