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
“내가 네 이상형이 될 수는 없는 거야?”
소희는 잠시 얼이 빠진 사람처럼 눈만 깜빡거렸다. 시선을 잠시 피하자 그의 오른손이 손쉽게 그녀의 얼굴을 돌려세웠다. 마주한 눈동자가 그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상형이 정확히 어떤 남잔데.”
대답만이 힘이 실리는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인 듯했다. 소희는 잠시 적당한 답변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고뇌하다가 결국 자신이 좋아했던 연예인의 스타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뭔가 지켜 주고 보살펴 주고 싶은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그런 사람이랄까….”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마주한 백옥 같은 낯이 하던 말을 더 해 보라는 식으로 소희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빠 하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자 소희는 마음을 완전히 놓았다.
“내가 아주 멀리서 지켜보고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냥 그 사람이랑 휴온이 아주 조금 닮았을 뿐이야. 그런데 그건 과거의 일이고….”
그가 붉은 입술을 열어 말을 끊었다. 이어진 말은 또 예상치도 못한 부분을 콕 집어냈다.
“심지어 이상형이 두 명이야.”
나직한 목소리가 한숨처럼 터져 나왔다. 당황한 소희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알겠어.”
“…뭘?”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웬일로 대답이 참 고분고분했다. 소희를 안은 채로 조슈아는 다시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뭉치를 잡았다.
잘려 나간 나무 덕에 참새가 햇살 아래에서 한참을 맴돌다가 떠나갔다. 조슈아의 어깨너머로 그걸 지켜보던 소희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휴온은 떠나갔고, 높은 확률로 죽는다. 그 사실이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작가 한소희가 아닌, 사람 한소희는 그냥 그렇게 둘 수 없었다. 그랬기에 불편한 대화를 더 이어 가야만 했다.
“조슈아, 너 그거 알아?”
은근슬쩍 던진 말에 그의 시선이 다시 옮겨 왔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이길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은 못 이겨.”
짙은 검은색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더 말을 잇지 않아도 눈치 빠른 남자는 무슨 의미인지 이미 파악한 듯했다.
“난 정말 휴온에게 아무 감정이 없어. 그런데 이렇게 휴온이 죽는다면 오히려 죄책감 때문에 그를 평생 잊지 못하겠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릴 거야. 넌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휴온 칼리우드는 이미 내 손을 떠났어. 그냥 잊어.”
단호한 언성이 칼같이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그럼에도 소희는 꿋꿋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래, 이제 와서 빼 달라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안전한 구역으로 옮겨 주면 안 돼?”
“아리아드, 안전한 전쟁터는 없어.”
“위치만 바꿔 달라는 거잖아.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조슈아의 눈이 다시 서류로 향했다. 그녀의 말을 무시할 심산이었다.
이번에는 소희의 두 손이 불쑥 그의 얼굴로 다가서 뺨을 잡았다. 충분히 그 손길을 피할 수 있음에도 조슈아는 냉정하게 무시했던 때와는 다르게 선선히 그녀와 눈을 맞췄다.
“조슈아, 죽은 사람은 못 잊어.”
“….”
“죄책감은 영원히 남아 있을 거야.”
다시 한번 했던 말을 강조하며 제 마음을 담아 간절히 바라봤다. 잠시 흐르는 묘한 침묵에 소희는 성공을 예감했다.
“그래, 그럼 적당히 숨만 쉬게 해 주면 되겠네.”
대꾸의 내용을 들어 보니 완벽한 성공은 아닌 듯했지만.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겠다는 거지? 부탁 들어주겠다는 거 맞지?”
계속되는 질문 공세에 조슈아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놓인 마카롱을 잡았다. 소희의 디저트 취향을 확인한 뒤로부터 매일같이 그의 테이블 위에 놓이는 것이었다.
“이제 걔 이야기 그만해.”
“최전방 말고 구석으로 옮겨 주는 거야. 알겠지.”
“알겠어. 이제 그만.”
그리고 그는 달콤한 마카롱을 그대로 소희의 입술에 붙였다. 먹고 조용히 하라는 의미였다.
* * *
메리가 읊어 준 두 번째 일정이 시작되었다. 도착한 궁전은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머무는 곳과 비교했을 때 화려함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훨씬 더 큰 규모였다.
색유리를 뚫고 들어온 빛이 하얀 대리석 바닥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였다. 그 아름다운 색감을 찬찬히 밟으며 걷던 소희는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다이닝룸 앞에 도착했다.
비앙카 매킨리가 아리아드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따로 불렀을까.
소희의 심호흡에 맞춰 금빛 문양으로 수놓아진 커다란 문이 열렸다. 귀족들의 인사 예법, 그런 건 전혀 모르겠지만 그녀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기본적인 것도 못한다고 쓴소리를 들을 것이 걱정되었는데 맞은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예의 바른 인사는 성공.
소희는 만족하며 또 나름 자신이 생각하는 귀족 이미지에 맞춰 말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입을 떼기 무섭게 비앙카가 첫마디를 가로챘다.
“생일 선물은 잘 받았단다.”
안심하고 있던 소희의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선물? 준 적도 없는 선물을 받았다니.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는 축제 기간이었고, 그 축제의 이유는 추수 감사제와 황후의 탄신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것에는 마땅히 선물이 있어야 했고. 안타깝게도 며느리라는 작자는 잠깐이라도 선물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소희가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에 맞춰 비앙카가 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진하게 바른 버건디 빛 입술이 조명 아래에서 스산하게 빛났다.
“몸이 많이 안 좋다길래 너에게 크게 바란 적은 없었다만 그래도 잊지 않고 챙겨 주었더구나.”
“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니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뭘 받은 건지, 누가 대신 전달한 것인지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소희는 앞에 놓인 식전 빵을 입안으로 구겨 넣었다. 귀족들의 식사 예절, 그딴 건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준 적은 없는 선물을 받았다고 하지만 미움을 받는 것보다야 잠깐 당황스러운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합리화를 할 때쯤이었다.
“나에게 준 선물 말이다. 그건 어디서 구했니?”
수수께끼 같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체 선물이 뭘까, 그게 뭐지?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여러 단어들 중에서 소희는 제일 그럴듯한 단어를 골라냈다. 보석이 그나마 제일 보편적이지 않은가.
“하하, 사람을 시켜서 샀죠?”
“어디서?”
딱딱하게 굳어선 소희의 몸뚱어리와는 다르게 비앙카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여유롭게 들었다. 찻잔을 잡은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이 천장을 향했다. 소희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어… 저희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잖아요. 거기 아는 사람을 통해서….”
“뭘 준 건지 기억은 하니?”
“보석? 아마 보석이었죠?”
비앙카가 다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소희는 그 표정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녀의 심중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비앙카는 그녀를 떠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제 확신을 가진 듯 보였다. 그 선물이 아리아드가 준 것이 아니라는 확신.
“설마 했는데. 역시 너같이 멍청한 게 그 의미를 알고 보냈을 리 없겠지.”
비앙카는 드디어 저답게 독설을 뿜어 댔다. 한층 더 예리해진 시선이 아리아드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조슈아가 네 이름으로 보낸 거 같구나. 걔도 참, 내 아들이지만 한심스럽기 짝이 없지. 여자에 미쳐서 이리 지극정성이니.”
소희도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황후의 생일 선물을 챙길 리 없는 아리아드와 그런 그녀를 미워하는 비앙카.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리아드를 제 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 중재하는 조슈아가 있었다.
“죽은 모친의 고향에서만 나는 희귀 광물로 만든 펜던트란다. 네가 준 건 아니지만 조슈아가 너와 나의 관계를 생각해서 이런 선물까지 줬으니 너에게 고맙다고 이야기는 해야겠지.”
비앙카가 말을 하며 제 목에 걸린 펜던트를 툭 건드렸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빨간 장미꽃과 닮아 있는 색상의 펜던트였다.
그곳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긴 소희가 대꾸할 말을 찾다가 포기하고 그냥 어색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끝냈다. 괜히 더 말을 붙였다간 본전도 못 찾을 분위기였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너와 이혼을 하라고 하니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협박을 하더구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대화가 이어졌다.
“너는 그 아이를 사랑하니?”
“다, 당연하죠.”
왜 이런 중요한 순간에 꼭 말을 더듬거리는지. 거짓말을 못 하는 걸 동네방네 티 내는 제 입을 난타라도 하고 싶었다.
일순 비앙카는 제 옆에 있던 종이 뭉치를 꺼내 음식이 놓이지 않은 테이블 구석에 그것을 던졌다. 글씨들이 조밀하게 적혀 있었고 그 맨 위 1면에는 커다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매킨리 황실의 황태자비, 이대로 괜찮은가.]
그 밑에 세부적인 내용으로는 아리아드 피어슨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과 그녀에 대한 여러 남자들의 증언, 그리고 필트모어 저택에서 나온 황태자비의 흑백 사진까지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조슈아가 돈을 주고 이 신문사의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면 넌 이대로 1면에 실렸을 거야. 그리고 모든 이들의 먹잇감이 됐겠지.”
소희의 시선은 여전히 그 신문으로 향해 있었다. 내용을 보아하니 누군가 의도적으로 따라붙어 그녀를 끌어내릴 작정을 하고 쓴 기사였다. 결론적으로 아리아드 피어슨은 황후가 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기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비앙카는 온화한 표정과 목소리를 구사했다. 평소에 그녀와 조슈아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였지만 지금만큼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온화함으로 포장된 날카로움.
소희는 역시 이번에도 그랬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용서를 빌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과거의 일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과거라고 하기에는 한 달도 안 된 일이지 않니. 네가 필트모어 저택에 머물던 것. 그리고 궁 밖에 따로 지어 둔 너의 개인 저택에 남자들을 불러 모아 놀던 것. 내가 기억하기론 그게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던 것 같은데. 뉘우치고 있다라.”
소희의 말을 비꼬듯 비앙카가 그 말을 다시 되짚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얘야,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니?”
그리고 그 웃음은 금세 지워졌다.
“이 이야기의 제보자가 나란다.”
비앙카의 눈을 쳐다볼 생각도 못 하고 테이블 모서리만 응시하던 소희는 저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로 아리아드를 싫어할 줄이야. 이렇게 기사가 나가면 아리아드 피어슨이 먹잇감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매킨리 황실 사람들도 체면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그것을 감수할 각오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를 치우려고 어느 정도의 오물을 뒤집어쓸 작정으로.
“사회적으로 묻히고 싶지 않다면 네가 알아서 잘 정리하렴.”
이렇게 나온다면 소희는 이대로 굽신거리며 바닥을 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떤 것을요. 조슈아의 옆자리요?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조명 아래 보랏빛 눈동자와 붉은 눈동자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어느 때보다 소희는 강하게 말했다.
“저도 놓을 생각이 없긴 하지만 조슈아도 절 순순히 놔주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아리아드. 네가 순순히 놓게 만들어. 되지도 않는 명예 욕심으로 많은 것들을 망치려고 하지 말렴. 그렇게만 한다면 충분히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란다.”
우아하게 흐르던 비앙카의 발음도 점차 강해졌다. 한 글자씩 가슴 속에 똑똑히 새겨 넣으라는 식으로.
“여태 그랬던 것처럼 많은 남자들을 끼고 한심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