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
특별한 것이 없는 하루였다. 방 안에 어둠이 깔리고 달빛이 스미자 반나절을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인기척에 고개를 빼꼼 내밀자 소희는 조슈아와 눈을 딱 마주쳤다. 그리고 흐르는 묘한 침묵에 소희는 괜히 헛기침했다.
그녀를 지그시 살피던 남자가 협탁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라 마시고 침대에 몸을 누였다. 소희가 덮고 있던 이불을 그도 올려 덮자 조슈아의 시원한 체취가 코끝으로 훅 들어찼다.
소희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그의 냉정하고 이기적인 판단과 행동에 아직까지 심통이 나 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무색하게 큼지막한 손이 금방 그녀의 몸을 손쉽게 돌려 안았다.
“이제 그만해.”
“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조슈아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오늘 나한테 하루 종일 짜증 내잖아.”
“짜증 낸 적 없어. 내가 언제 짜증 냈다고.”
“온몸으로 짜증 내고 있잖아. 말도 걸기 힘들게 인상을 팍 쓰고.”
조슈아의 기다란 손가락이 소희의 좁혀 든 미간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네 이상형이 전쟁 나가는 거 때문에 심란한 건 알겠는데 이제 그만해.”
벨벳 커튼 사이로 들어온 달빛이 온화하고 상냥한 그의 낯을 밝혔다. 조슈아는 휴온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것이 자기와는 아무 관련 없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탈을 쓰고 있었다. 그게 또 짜증이 나서 소희가 덜컥 언성을 높였다.
“네가 전쟁터로 보낸 거잖아.”
“그건 그 기사가 아니었어도 다른 누군가가 갔어야 했어.”
“아니, 넌 작정하고 의도적으로 넣은 거잖아. 기사단에 휴온을 넣은 것도 나중에 이렇게 몬트롤 지역에서 지원 요청이 올 줄 알고, 넌 다 알고 휴온을 그때 딱 네가 손 쓸 수 있게 기사단에 넣어 둔 거 아니야.”
소희의 말을 가만 듣고 있던 조슈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 세계의 밖으로 나가 내용을 본 게 아니었다면 소희도 이런 식의 의심을 추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저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아쉬워하며 그녀의 연예인에 대해 걱정만 했겠지.
눈치 빠른 조슈아가 이상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긴 했지만 이것에 대해 변명을 할 기분은 아니었다. 소희는 그냥 그렇게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어떻게 알긴. 그냥 딱 봐도 보이니까. 네가 견제하고 의도적으로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소희는 그의 표정이 잘 읽히지 않았다. 조슈아는 그 말에 딱히 대꾸하지 않고 보랏빛 눈망울만 응시하고 있었다. 제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을 것 같은 기세와 딱히 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묻어 있지 않은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물론 소희는 너무 잘 알았다. 조슈아에게 인간이란 그저 제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 절대 죄책감 따위는 가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러한 거대한 벽에게 도덕심을 주입시켜 봤자 속 터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이 상황이 짜증 나고 답답한 걸 수도 있었다.
“어떻게 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데온 때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나는 네가 이러는 게 너무 싫어. 쭉 네 옆에 있을 거라고 내가 계속 말했잖아. 어떻게 해야 믿어 줄래?”
업보는 아리아드가 쌓고 그 죄는 한소희가 갚는다. 이거는 상당히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리아드가 여주인공이 되어야 했으니 고목나무에 매미처럼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다른 남자를 만날 일이 절대 없는 제 입장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도 없으니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화와 더불어 답답함까지 섞이니 소희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조용히 그녀의 눈동자만 바라보던 조슈아가 그제야 입술을 뗐다.
김빠진 웃음소리가 서두를 열고 높낮이 없는 음성이 단조롭게 이어졌다. 전보다 꽤 낮아진 목소리였다.
“왜 내 기분은 생각 안 해 줘?”
“…뭐?”
“부인이 그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본인 이상형이래. 그런데 알아봤더니 심지어 몸까지 섞었대.”
아리아드와 본인의 이력을 줄줄 읊는 설명에 소희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몸까지 섞은 걸 아는 줄은 몰랐는데 대체 누가 이런 정보까지 주는 건지. 자기 부인 뒷조사를 하는 남편이라니. 소희는 잠시 사고가 정지되어 말을 잃었다.
소희의 헛기침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타오르는 듯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그런데 내가 그 새끼를 그냥 내버려 둬야 해?”
차분하게 흐르던 목소리가 잠시 이탈하여 사납게 귓전을 할퀴었다.
“아리아드,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야.”
“아니….”
그래, 조슈아의 입장에서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충분히 화가 날 수는 있겠지만 소희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그의 분노가 아니라 잔인한 해결 방식이었다. 꼭 다 죽이고 없애 버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거늘.
자신이 남자 주인공 성격을 그렇게 설정해 놓고도 직접 마주하니 글로 쓸 때와는 다른 할 말을 잃을 정도의 괴이함이었다.
피폐물 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희는 이 상황에 너무 몰입하여 잠시 작가의 본분을 잊고 그를 설득하려 했다.
“조슈아, 그니까 꼭 이렇게 하지 않아도….”
조슈아의 팔을 잡자 예상치 못하게 그가 거칠게 빼냈다. 놀란 소희가 고개를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표정을 살폈다. 희미한 달빛이 보여 주는 조슈아의 만면에 평소와 같은 차분함이 깔려 있어 그 표정의 내막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작스레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갈래.”
“어딜?”
“내 방.”
“…어?”
조슈아는 그 말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를 빠져나가 기다란 다리로 방문 앞까지 다다랐다.
“아니, 이야기하다가 어디 가!”
버럭 지르는 고함에 맞서 들려오는 것은.
쾅, 매섭게 닫혀 요란스러운 문소리뿐이었다.
삐졌네, 완전히 삐졌어.
“애야, 뭐야. 유치하게 왜 저래? 참나.”
소희는 어이가 없어서 한숨 섞인 헛웃음을 뱉었다.
그를 따라가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본인도 자존심이 있었기에.
* * *
“오늘 일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쫓겨나고 싶지 않다던 시녀 메리는 아침부터 굉장히 의욕적이었다. 해가 뜬 듯 밝기만 한 얼굴을 소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지켜봤다.
“점심에 황후 폐하가 같이 식사하자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일단 씻으시고 집무실로 가시면 저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도록 준비를….”
그냥 듣고만 있던 소희가 빠르게 말머리를 잘랐다.
“아니. 안 갈래요.”
단호한 목소리에도 메리가 생글거렸다.
“안 가는 건 없습니다, 아리아드 님.”
사람이 이리 밝을 수 있는 것인가. 계속해서 미소 짓는 덕에 메리의 이가 조명에 번쩍거렸다.
“저하께서 명하셨고 안 가는 선택지는 없는 걸로 압니다.”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은 방패가 찾아왔다. 그것도 전보다 더 심한 조슈아의 수족이었다.
하하, 건조한 웃음을 흘린 소희가 그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려고 했다. 무의미한 반항이었지만.
눈 깜짝하는 사이에 여러 명의 시녀에게 둘러싸여 치장을 한 소희는 모든 것에 질린 얼굴이 되어 축 처졌다. 아리아드는 하는 것도 없이 먹고 자는데 치장은 무슨 몇 시간을 하는지.
또 정신을 차려 보니 부축을 받아 집무실 앞이었다. 어젯밤에 조슈아와의 말다툼이 생각나 눈을 가늘게 뜨고 문을 노려봤다.
그사이에 문이 열리고 소희는 그 안으로 던져졌다. 여느 때처럼 커다란 창을 등진 채로 앉아 있는 남자는 평소와는 다르게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서류를 넘겼다.
나 참, 지가 불러 놓고 무시하는 건 뭐야.
또 짜증이 일자 소희도 콧방귀를 끼고는 그와 조금 떨어진 가죽 소파에 털썩 앉았다.
침묵 속에서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가끔 펜으로 무언가를 적는 소리만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한동안 숨 막히는 공기의 흐름이 이어졌다.
그러한 끝에 펜을 책상에 소리 나게 올려 둔 조슈아가 그제야 그녀를 바라봤다.
“뭐 잊은 거 없어?”
바라는 거야 눈에 선히 보였지만.
“없는데?”
소희는 쓸데없는 기 싸움을 했다.
“그래, 그럼.”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시선을 옮겼다. 소희의 존재를 단단히 무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삐졌다고 해도 그렇지 다정했던 사람이 어쩜 이리 매정하게 구는지. 소희가 종이만 팔랑이며 넘기는 그를 흰자가 보이도록 노려봤다.
그가 소희를 본 체도 안 하는 사이, 십 분 간격으로 몇 명의 방문자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들은 조슈아를 노려보는 소희의 사나운 기세에 흠칫 놀라 슬그머니 그녀를 지나쳤다.
소희는 그들이 업무 대화를 하는 내내 아무 말도 없이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계속 헛웃음을 짓고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방문이 닫히고 다시 둘만 남자, 가죽 소파 건너편에 명화 속 여인과 눈싸움을 하던 소희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꼬르륵.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나가자 그 어떤 시계보다 정확한 배꼽시계가 울렸다.
그리고 소희는 생각했다. 자신이 배고픔에 지는 것은 아니라고. 단지 유치하게 구는 남자보다 자신이 훨씬 인자하고 너그러우니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제 밤톨만 한 자존심을 지키다 말고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그래, 미안해.”
결국 이 기 싸움의 승리자는 조슈아일 것을 알았다. 그의 무관심은 여주인공의 자리에 위협을 주니까. 결국 아쉬운 쪽이 사과하기 마련이다.
조슈아의 앞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가자 그가 그제야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 소희를 무시했냐는 듯 그는 금방 의자를 밀어 팔을 내밀었다. 소희는 익숙하게 그의 품에 자리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진심이 아닌 사과를 이어 갔다.
“미안해. 내가 전에 휴온이랑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던 건 맞아. 그건 네가 충분히 화날 만해….”
내가 벌인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데 내가 술 취해서 이상형이다 뭐다 그랬던 건 정말 헛소리였고, 그 기사를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거나 사귀고 싶고 그런 마음이 있는 건 전혀 아니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온화한 목소리가 넌지시 시비를 걸어왔다. 그럼에도 소희는 전처럼 짜증 내지 않고 인내심 있게 말을 해 나갔다.
그저 동경하는 연예인과 팬의 사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빙빙 돌고 헤맸지만 어떻게든 그 마음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를 이성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내가 네 이상형이 될 수는 없는 거야?”
이 남자가 거슬리는 포인트는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