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
소희는 응접실 테이블 위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때 마침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왜 이러고 있어.”
“조슈아?”
“점심 먹으러 가자.”
골치 아픈 신경전을 알 리 없는 남자는 태연하게 밥 타령을 했다. 소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은 조슈아의 백옥같은 낯을 대충 흘겨보고는 다시 테이블 위로 얼굴을 묻었다.
소설 안에서도 엉켜 있는 전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창작의 고통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우, 됐어. 입맛이 없어서….”
그 말은 뚝 끊겼다. 조슈아는 그녀의 말을 그리 경청하지 않고 손쉽게 안아 올렸다.
“그래도 먹어.”
소희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별다른 말을 더 덧붙이진 않았다. 유독 단호하게 말하는 부분에서는 그가 절대 물러나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간의 일들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익숙한 모양새로 안겨 응접실을 빠져나갈 때였다.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문 앞에서 등장하자 소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있으면 안 될 곳에, 막아서면 안 되는 곳을 막아서는 남자.
“할 말이 있습니다.”
휴온은 비장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상상치도 못한 삼각 구도였다. 소희는 내키지 않은 상황에 벌써 다 소화되어서 내려갔어야 할 아침에 먹은 토스트가 김치전의 형태로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시간 좀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이 상황을 반복해서 그린 휴온의 어투는 담담했다. 그리고 그를 마주한 조슈아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자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둘 다 무슨 생각인지, 그 틈에 낀 소희만 혼란스러웠다.
조슈아는 긍정의 뜻을 보이며 선선히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다시 소희를 안은 채로 응접실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몇 초 전 소희가 앉아 있던 자리에 그녀를 다시 내려 주었다.
“죄송하지만….”
뒤이어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드 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미친 게 아닐까.
소희는 휴온에 대한 짤막한 감상평을 속으로 읊조렸다. 그리고 흘깃 조슈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이 남자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응접실의 커다란 창을 타고 들어온 햇살이 부드럽게 휘어진 조슈아의 입매를 밝혔다. 그는 상냥히 웃고 있었다.
* * *
소희는 괜히 안절부절 시간을 살폈다.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오래도록 빙글빙글 돌 동안 휴온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조슈아는 밖에서 그녀를 기다릴 테고 지금 이 만남이 길면 길어질수록 휴온의 명은 짧아진다. 그냥 그렇게 소희의 직감이 말해 주었다.
“저기….”
“아리아드 님.”
마음이 조급해져 먼저 입을 떼자 휴온이 말허리를 잘랐다. 꽤 오랜 시간 서두를 떼지 못하고 헤매던 남자가 진지한 눈망울로 소희를 응시했다.
“저 내일 떠납니다.”
“…네?”
“몬트롤 지역으로 갑니다.”
그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해 소희의 눈이 크게 끔뻑였다. 그리고 몬트롤, 그 단어를 조용히 읊조렸다.
아는 곳이었다.
시놉시스에 직접적으로 언급했던 지역이었고, 문제가 있다면 그곳이 전쟁터라는 것.
“내일? 내일요?”
소희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테이블을 쾅 치고 일어났다. 그러자 흠칫 놀란 휴온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방 돌아올 거예요.”
아련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면서도 휴온은 그곳이 어디인지 말해 주지 않았다.
금방 돌아오긴 개뿔.
소희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하다가 겨우 삼키고 그저 절망 어린 탄식을 뱉었다.
몬트롤 지역은 격전지였다. 프랭클린 제국과 던마크 제국은 희귀 광물이 가득히 위치한 그 산악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얼마 전 직접적인 전쟁까지 불사했다.
그리고 소희가 짠 시놉시스대로라면 그곳의 주인은 프랭클린이 될 것이고, 다니엘 매킨리는 전장의 영웅이 되어 돌아온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 과정 중에 있었다. 그것이 손쉬운 승리가 아니라는 점. 다니엘이 이끄는 군대의 3분의 2는 사상자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크게 다치거나 싸늘한 시체가 되어.
승리한 다니엘 매킨리도 그곳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두고 와야 했다.
그리고 휴온 칼리우드.
소희는 앞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허망한 탄식과 함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이시여, 미친 남자 주인공이 기어코 사람 한 명을 또 죽이려고 합니다.
무교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을 목 놓아 부르고 싶었다. 그녀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휴온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길면 삼 개월, 짧으면 한 달. 금방 돌아올 겁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리아드가 당연히 모르리라는 생각으로 태연하게도 말이다.
쌍꺼풀 없는 눈매가 순하게 접혔다. 그 눈매를 보고 있노라니 소희는 단전에서부터 무언가가 올라와 부글부글 들끓었다.
당장 내일이라니.
그를 살리고자 직접 자신이 전쟁터로 나갈 수도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소희는 자신이 데온을 살렸으니 당연히 휴온도 살릴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것은 아주 오만한 생각이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조슈아는 그리 호락호락한 또라이가 아니었는데.
어쩐지, 방금 자리를 비켜 주면서 여유롭게 웃더라니.
그건 그저 검술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전쟁터로 내몰린 남자에 대한 애도, 그뿐이었다.
제 속에서 끓고 있는 것이 무언지 소희는 깨달았다. 무력한 자신과 꼭 이렇게까지 상황을 만드는 조슈아에 대한 분노였다.
분노를 삭이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소희의 연예인이 긴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리아드 님께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웃음기 없이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 이야기는 갔다 와서 하겠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해 주세요.”
“아니요. 갔다 와서 하겠습니다.”
의미 모를 말싸움이 이어졌다. 그를 살릴 방법을 계속해서 모색해 보겠지만 머리가 깨져라 고민해 봐도 결국 답은 없으리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희는 그가 돌아와서 하겠다는 말을 지금 꼭 들어야만 했다.
높은 확률로 휴온이 하고 싶다던 이야기는 나중에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몰라 주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담백하게 인사했다.
“아리아드 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길.”
살짝 젖어있는 감청색 눈망울이 돌아섰다. 그렇게 그는 응접실을 떠나갔다.
“제발 지금 당장 해 달라고오옥!”
애타는 소희의 외침을 듣고도 꽤 냉정한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이 세계의 신이시여. 저 가련한 엑스트라를 살려 주소서.
비척거리며 응접실을 빠져나온 소희는 속으로 그리 울먹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만든 주동자를 노려봤다.
문 앞 벽에 기대선 남자가 그녀를 보고 싱긋 웃어 보였다. 와중에 그 미소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본인 자신에게 소희는 묘한 짜증이 일었다.
조슈아가 다가와 안아 올리려는 듯 허리에 팔을 두르자 소희가 그를 살짝 밀었다.
힘을 써 충분히 제 뜻대로 할 수 있음에도 조슈아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꽤 인내심 있게 소희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안 먹을래. 배가 안 고파.”
마음에 들지 않는 말머리에 조슈아의 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죽음을 손 쓸 방도 없이 목도해야 한다니. 또한 그 일이 자신의 주사로 시작되어 만들어진 일이었기에 그 죄로 식음을 전폐해도 모자랐다.
처음 그저 조슈아에게로 향했던 분노가 결국 이 일의 씨앗을 심은 자신을 자책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그래, 난 뭘 먹을 자격이 없다.
“…방에 가서 쉬고 있을게.”
기력 없이 말을 뱉고는 소희는 그렇게 남자를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이란 게 참 얄궂기도 하지.
꼬르륵.
어쩜 그리 배꼽시계는 정확한지. 점심시간이 되기 무섭게 식사를 하라고 난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조용해진 복도에 아주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꼬르륵, 또 한 번 더.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은 소희는 마음을 다스렸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콧김을 거칠게 뿜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물론 바로 앞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붉은 눈망울을 보자 당장 눈을 감아 버리고 싶어졌지만.
“배가 안 고파?”
그가 눈을 접어 웃었다. 예쁘게 자리한 애교살이 소희를 놀리고 있었다.
“아니면.”
나직한 목소리가 한결 느려지고.
“그때처럼 화장실이 급한 건가.”
그래, 놀리는 게 분명했다.
소희가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화장실까지 또 데려다줘?”
“아니.”
“그럼 식사하러 갈까?”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를 몸소 시전하는 답정너 남자 주인공을 보며 소희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에 화답하듯 그도 맑게 웃어 주었다.
또 더럽게 예뻐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 * *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어영부영 대강 쑤셔 넣으며 깨작거리는 소희를 보고도 조슈아는 별말이 없었다. 그리고 식사하는 내내 그렇게 묘한 침묵만이 자리했다.
그리고 다시 아리아드의 방 안.
점심 업무가 있는 조슈아는 집무실로 가면서도 그녀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향하자 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고 보내 주었다.
이따 보자, 뭐 그런 형식적인 인사 없이 침묵 속에서 그들은 길을 달리했다.
소희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다가 문득 시선을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창살이 사라진 창문이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변화.
바로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가 없어졌다.
“뭐야.”
소희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도 여전히 나무는 없었다. 절뚝거리며 창문 앞에 서 고개를 빼꼼 내밀자 저 밑에는 잘린 나무 밑동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하. 이것도 잘라 버렸네.”
죄 없는 나무도 잘려 나갔다. 거슬리는 건 그냥 뭐든 없애 버리고 보는 남자 주인공다운 선택이었다.
소희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계속해서 실소했다.
사라져 버린 공간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 불쑥 화가 치솟았다. 그리고 그러한 기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안녕하세요. 아리아드 님.”
처음 보는 앳된 시녀가 노크하고 들어와 인사를 했다.
방긋방긋 잘도 웃는 여인은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고는 본론을 꺼냈다.
“오늘부터 아리아드 님의 직속 시녀로 새로 발령된 메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갑자기요?”
“아, 전에 일하시던 분은 다른 곳으로 전근되어 가셨습니다.”
메리라고 소개한 여자는 여전히 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쫓겨나신 거라고 하던데.”
소희는 황당해서 입술 끝만 벙긋거렸다. 메리는 그녀의 표정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저는 집의 가장이고 제 밑으로 어린 남동생 두 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가족사를 읊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는 쫓겨나고 싶지 않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명랑한 목소리로 제 할 말을 끝내고는 메리는 예의 바르게 다시 허리를 굽혔다.
소희가 그걸 보며 다시 실소했다. 그리고 사라진 것들을 되짚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친 남자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