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
켈리는 제 방의 손잡이를 돌렸다. 다른 방보다 비교적 좁은 면적에 허름한 가구들이 붙어 있었다.
여성 국제 학교 개회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로 황후 폐하를 알현하는 날이 많아져 켈리는 요즘 매일같이 저녁 시간에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면 습관처럼 확인하는 것이 있었다.
‘저녁 식사 직전에 책상 세 번째 서랍을 매일 확인하세요.’
아리아드 피어슨, 그 여자의 말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언과도 같이 담담하게 뱉던 말을 무시하자니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어 창가에서 들어온 주황빛이 낡은 나무 책상을 비췄다. 켈리는 자물쇠가 걸린 세 번째 서랍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 모퉁이에 있는 책을 옆쪽으로 치우자 열쇠가 드러났다. 하지만 세 번째 서랍을 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이구나.”
열쇠는 자신이 넣어 놨던 방향과 정반대로 위치해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들었다. 문득 아리아드의 목소리가 생각나 열쇠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 정보가 켈리 양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해요. 저를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소문대로 남자만 밝히는 못된 악녀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껏 자신이 직접 지켜본 행보로는 전혀 그런 모습은 없었다.
켈리가 열쇠로 세 번째 서랍의 자물쇠를 열었다. 구겨진 일기장과 조슈아의 신문 기사를 잘라 모아 둔 파일, 그리고 돈 몇 푼을 모아 둔 해어진 주머니 옆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석이 있었다.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였다.
도움이 되는 정보가 맞았다. 알지 못했다면 또 유레시아 무리에게 된통 당할 뻔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고마워해야 해?”
조용히 중얼거린 켈리가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은 아리아드를 죽이려고 했고, 그녀는 도움을 줬다.
그렇다면 이제 악녀는 누구인가.
하하, 켈리가 목걸이를 쥐고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구정물을 뒤집어쓴 구제 불능의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푸른 눈망울이 공중에 떠 있는 주황빛 먼지들을 찬찬히 훑었다. 그리고 켈리는 목걸이를 팔소매에 넣었다.
노크 소리가 울리자 그녀는 익숙하게 방 밖을 나섰다.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또래 귀족 영애들과 티타임을 즐기고 온 로잘린과 에리카는 화려한 행색으로 다이닝룸을 들어섰다.
에리카는 구석 자리에 제 외투를 벗어 놨다. 그것을 눈여겨보던 켈리가 그 자리를 지나치며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팔소매에 들어 있던 보석이 주머니 안으로 흘러내려 떨어졌다.
유레시아 공작의 등장에 자연스럽게 인사를 한 켈리는 지정석에 앉았다. 그렇게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대화의 주제는 예상했던 것이었다. 유레시아 공작이 저녁 식사에 끼게 되면 공작부인은 제 딸들을 치켜세우고 켈리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그리고 오늘 또한.
“듣기로는 황태자비 저하께서 켈리 네가 준 케이크를 먹고 쓰러지셨다고 하던데. 어쩜 그렇게 기본적인 상식도 없니. 선물을 하기 전에 잘 알아봤었어야지.”
스테이크를 썰던 유레시아 부인이 우아한 발음들로 켈리를 공격했다. 그에 켈리가 무미건조한 대응을 했다.
“언니들이 전하라고 해서 전했을 뿐이에요.”
“어머, 얘 좀 봐라. 그걸 우리 탓을 한다고?”
로잘린이 그 대화에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그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것이 케이크를 전한 켈리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유레시아 부인도 혀를 쯧쯧 찼다. 일대 다수, 슬프게도 공작은 소수의 발언에 힘을 실어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네가 가서 직접 사과드리는 게 맞는 것 같구나.”
나직한 목소리가 그리 명령했다. 그리고 힘없는 켈리는 스테이크를 턱이 아프도록 씹다가 겨우 삼키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로잘린과 공작부인이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바꿨다.
결혼식 때 공작에게 받았던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잃어버린 목걸이의 행방, 그리고 범인은 정해져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켈리가 어머니 보석을 훔친 적이 있지 않았나?”
“어쩜, 설마 이번에도 또 그랬겠어.”
“혹시 모르니까 시종들을 시켜 방을 뒤져 보는 건 어때요?”
로잘린의 대꾸에 공작이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냅킨으로 제 입술을 닦았다. 방관자는 언제나 그랬듯 조용한 침묵으로 허락을 표했다.
“어떻게 생각해, 켈리? 네가 당당하면 못 할 건 없겠지? 너로서도 이렇게 의심받을 바엔 확실한 게 좋잖아.”
켈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요.”
그래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공작의 앞에서 면박을 주기 위해 꾸민 일이 계획대로 끝날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또 금세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리고 식사가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리카가 외투를 들었을 때였다.
툭,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물건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 정체를 확인하고는 다들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특히 계속해서 눈웃음을 짓던 유레시아 부인의 눈매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 목걸이가… 내가 당신에게 선물했던 목걸이 아닌가?”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에 뒹구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살폈다. 그에 대꾸하는 유레시아 부인의 말소리도 떨려 왔다.
“어머, 에리카. 얘도 참. 그게 그렇게 탐나면 말을 하지 그랬니.”
“어머니, 이게….”
사색이 된 에리카의 얼굴을 보며 부인이 눈을 부라렸다. 더 이상 그 어떠한 말도 꺼내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주황색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당혹스러운 상황을 살피던 에리카는 때마침 켈리와 눈이 마주쳤다.
켈리는 그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밋밋하게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 열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고 짧게 묵례를 마친 켈리가 세 모녀를 지나쳤다.
“하.”
누군지 모를 한숨이 그녀의 뒤에서 터져 나왔다.
켈리는 제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가파른 계단을 꽤 많이 올라야만 나오는 방이었다.
조용히 살아왔다. 그래야 하는 줄만 알았다. 약하면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오늘에서야 깨달은 사실이 켈리의 심장을 세차게 뛰게 했다.
‘먼저 공격하면 당하지 않는다.’
그 말을 되뇌던 켈리의 몸에 짜릿한 전율이 올랐다. 이제야 이 더러운 귀족들 사이에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아리아드. 당신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파란 눈망울이 어둠이 길게 드리운 저택의 복도를 훑었다. 그 어둠 속에서 켈리의 눈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곧게 직시하고 있었다.
* * *
잠금장치가 없어진 건 아리아드로 사는 소희의 삶에 꽤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를 찾아온 손님을 침실 안에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
조슈아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은 똑같았지만 이 또한 큰 변화였다.
소희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벽난로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기운과 비슷한 색감을 가진 금빛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켈리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먼저 만나자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소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과하려고요. 어찌 됐든 아리아드 님이 죽을 뻔한 거에 저도 연관되어 있으니까.”
그 말과 함께 켈리는 장미 향이 나는 허브차를 입에 머금었다. 반대편에 앉은 소희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연관된 정도가 아니죠. 켈리 양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고의는 아니었어요.”
아무런 가책도 느껴지지 않는 대꾸와 함께 켈리는 매번 그랬듯 상자 하나를 그녀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죄송합니다.”
“뭐, 사과할 짓 해 놓고 선물을 건네는 변태 같은 취미라도 있나 보죠? 그런데 이건 선물로 해결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황당해하며 켈리가 들이민 선물을 쳐 냈다. 포장을 한 박스가 켈리의 앞까지 다시 미끄러졌다. 그걸 가만 들여다보고 있던 켈리가 고개를 들어 소희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때 말씀드렸죠. 실례를 많이 범할 거 같아 미리 사과드린다고. 아리아드 님은 괜찮다고 하셨고.”
“아니, 저기요. 당신이 범한 거는 실례가 아니라, 살인이라고요. 살인 미수라고, 당신.”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 케이크는 제가 만든 게 아니기도 하고요.”
“그럼 마지막에 나한테 한 말은 뭔데? 당신, 울면서 나한테 말했잖아.”
침착하자고 되뇌는데도 소희는 어이가 없어서 자꾸 언성이 높아졌다. 끝을 모르는 뻔뻔함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제일 당황스러운 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상하게 변해 버린 켈리의 모습이었다. 현실로 돌아갔을 때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돌아왔는데, 지금 보아하니 그 각오를 한참 뛰어넘었다.
“그래요. 어차피 계속 이렇게 말해도 믿지 않으실 거 같네요. 그렇다면 솔직해질게요.”
청량하게 느껴졌던 푸른 눈망울이 오늘따라 서늘한 겨울 바다를 연상하게 했다.
“저는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이 독한 년이었어요.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착한 줄로만 아는데, 아니요. 저는 제가 생각해도 참 독하고 욕심이 많아요. 그래서 여태 유레시아 가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이리저리 방황하는 소희의 동공과는 반대로 켈리의 것은 차분했다. 이미 무언가를 굳게 다짐한 듯한.
“저희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어요. 원하는 게 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고. 그래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비참한 삶을 면할 수 있다고. 창녀촌에서 몸을 팔며 살다가 내로라하는 가문의 첩까지 된 걸 보면 그 말이 다 맞는 말 같아요. 어머니가 자존심 때문에 매달리지 않고 포기했다면 전 똑같이 몸이나 파는 년이 됐겠죠.”
“그러니까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소희가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겨우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데 켈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데요, 아리아드 님. 저는 어머니보다 더 욕심이 많은가 봐요.”
찻잔을 드는 손길과 터져 나오는 말소리가 여유로웠다.
“첩으로는 만족 못 하겠어요.”
차를 마시는 동안 이어진 잠깐의 침묵. 소희는 어이가 없어 그사이를 메꿀 문장을 찾지 못했다.
고민하는 사이, 다시 켈리가 말을 이었다.
“두 번 다시 영혼 없는 사과는 하지 않을게요. 다 거짓부렁이니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온 상자를 들었다.
그것은 그대로 벽난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스테인리스 통 안으로 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전 당신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단호한 목소리만 남겨 놓고 켈리는 그렇게 응접실을 떠나갔다.
혼자 남은 소희는 여전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고개를 숙였다.
“어이가 없네, 진짜.”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 가 불길이 거세질수록 소희의 근심도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