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34화 (34/120)

Chapter 34

“아리아드, 네 몸하고 마음. 나는 이제 그게 다 필요해.”

소희가 눈을 끔뻑였다.

그 발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속내를 모를 리 없었지만. 여태 쉽게만 뱉어냈던 사랑이라는 단어가 목구멍에 가시처럼 박혀 차마 나오지는 못했다.

이제는 왜인지 모르게 함부로 말하기에는 껄끄러운 단어.

“그니까….”

말끝을 흐리며 최선의 대답을 궁리했다. 그리고 소희에게 최선은.

“…노력할게.”

아리아드가 아닌 한소희로서 최선은 그거였다.

“마음도 줄 수 있게 내가 노력할게.”

노력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연구해 봐야 할 부분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수행하려면 그를 사랑하는 연기를 잘해야 할 테니까.

소희의 대답에 조슈아는 딱히 별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거짓된 사랑을 속삭이는 것보다 괜찮은 선택이었던 건 확실하다.

그리고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평온함.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 덕에 간질거리는 심장은 전처럼 기분 나쁜 감각을 남기지는 않았다.

어느새 그 고요함 속에 장작이 타는 소리와 초침 소리는 스며들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깊이감이 느껴지는 붉은 눈망울. 오롯이 둘만 있는 듯한 공간 속에 달콤한 언성이 메워졌다.

“아리아드.”

볼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내려와 그녀의 손등을 쓸었다. 이어 그의 손바닥이 자그마한 손을 덮고 꽉 움켜쥐어 살결의 온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 번 다시 그 새끼 감싸 안지 마.”

손에 왜 이리 집착하나 했더니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

소희는 어영부영 어색한 미소로 때우며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입꼬리가 굳어서 올라가질 않았다.

“둘 다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분명 조슈아의 손에 쥐어져 있던 건 총이었다. 소희가 시놉시스를 짰을 당시 전쟁 물자로 총을 보급하기 시작한 건 기승전결 중에 ‘전’ 부분에 해당하는 단계였고, 한마디로 지금 시점보다 훨씬 뒤에 등장해야 할 물건이다.

시놉시스가 뒤틀리는 거야 이젠 뭐 놀랍지도 않았는데.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총구가 향했던 위치였다.

데온과 조슈아의 사이를 막아서 마주한 총구는 꽤 오랜 시간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향해 있었다.

그 당시, 초점 없던 눈동자를 마주하며 소희는 자신이 꿨던 꿈을 회상했다.

‘조용히 살면 될걸. 눈앞에서 자꾸 심기를 건드리니 죽는 거야.’

아리아드라는 캐릭터가 절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소희는 낮에 그들의 사이에 파고들어 총을 든 조슈아를 마주하고선 그런 생각을 했었다.

조슈아가 팔을 들어 그녀를 꽉 껴안았다.

“아리아드, 널 미워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

“꼭 노력해 줘.”

그리고 그 생각은 그저 단순한 불안감이 아닌 게 문제였다.

* * *

자정을 넘긴 시각, 바쁜 일정을 마친 조슈아가 조심스럽게 침대에 몸을 누였다. 그 옆으로 등을 지고 누워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었다.

여인의 뒤로 쇠창살이 사라진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개방감이 조슈아의 가슴 언저리를 허하게 만들었다.

가둬 놓아도 가질 수 없다.

오늘 하루, 그 사실은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을 깨달은 뒤로부터 자꾸만 자조 섞인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자신을 너무나도 무력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더 강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둬 놓는다는 나쁘지 않은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는 진정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그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소유욕은 더 이상 작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눈, 코, 입, 손, 머리카락 또 그 이상을 원하다가 결국에는.

‘네 몸하고 마음. 나는 이제 그게 다 필요해.’

실없는 소리를 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제게 마음을 주도록 노력해 달라며 부탁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인가.

확실한 것은, 가둬 놓아 마음까지는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결국 조슈아는 사용인들을 시켜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느껴지는 잠금장치를 없앴다.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라벤더 향이 코끝에 스며 진해질수록 상념도 짙어졌다. 여러 상념 속에서 마지막엔 데온을 안고 있던 아리아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조슈아는 달빛이 흘러들어 오는 창가로 다가섰다. 그리고 양옆에 있는 암막 커튼을 당겨 창문을 가렸다.

그러자 방 안으로 진정한 어둠이 찾아왔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자 그제야 눈앞에 아른거리던 남녀의 모습도 그 속으로 사라졌다.

* * *

소희는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일인지 시녀가 일찍부터 방에 들어와 암막 커튼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황금빛 햇살이 대리석 바닥 위로 부서져 내렸다.

졸음을 깨지 못해 멍하니 앉아 있다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옆자리를 훑었다.

어젯밤, 조슈아는 언제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침실을 나갔다. 소희는 전처럼 그를 찾아가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그의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리아드 님, 일어나시면 집무실로 오라는 저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소희가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어리둥절해하는 얼굴 앞으로 더욱 이상한 문장이 놓였다.

“그리고 문에 잠금장치를 없앴으니 어딜 가시려거든 저에게 먼저 말씀해 주세요.”

“…잠금장치를 없앴다고?”

“그 또한 저하께서 명하셨습니다.”

전개가 이상하다. 화나서 더 가둬 두고 집착할 거라 예상했던 것이 완전히 빗나갔다.

다리가 거의 다 나아 가는 시점에서 자유를 찾았으니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 갈 생각을 하면 좋은 건 확실한데, 도통 그의 속내를 파악할 수 없어 조금 답답해졌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씻고 옷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부축을 받아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맨날 안겨서 들어오기만 했는데 직접 제 발로 찾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리아드 님께서 오셨습니다.”

문이 열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둘만 남은 공간에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그가 의자를 뒤로 밀어 일어났다. 그리고 앞으로 두 팔을 곧게 펴 내밀었다.

소희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고운 목소리가 그녀를 재촉했다.

“와서 안아 줘.”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만 서 있던 소희도 남자의 저의를 파악하고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절뚝이는 움직임에 맞춰 그의 손톱이 책상을 툭, 툭 치다가 그 찰나를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다가섰다.

소희가 두꺼운 허리를 껴안았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는 조슈아의 심장 부근에 닿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귓가에 울리는 심장 박동이 일정치 못했다.

“어때, 이 정도면 마음에 들어?”

소희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낯을 살폈다. 무표정했던 얼굴 위로 작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아직. 많이 부족해.”

나직한 투정과 함께 그는 그대로 소희를 안아 올렸다.

“그러면 이제 내가 어떻게 해 줄까?”

“앞으로 매일 와서 안아 줘. 365일. 꼬박꼬박.”

“너, 내 다리가 아직 멀쩡하지 않은 건 알고 하는 소리지?”

“주치의가 이제 어느 정도 다리를 쓰는 게 더 좋다고 하더라.”

조슈아가 안아 올려 그와 그녀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집무실로 매일 오면서 근육도 좀 쓰고. 그리고 겸사겸사….”

흐려지다 끊긴 말 뒤에 그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쪽, 당황할 틈도 없이 붉은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내 허전한 마음도 채워 주고.”

소희의 얼굴이 저도 모르는 사이 벌게졌다. 여태 했던 스킨십에 비하면 입맞춤이야 이제 별것도 아닌데.

왜인지 모르게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고 그의 목에 얼굴을 묻으려 할 때였다.

“…다쳤네?”

새하얗고 기다란 목 위로 기다랗게 딱지가 올라온 상처가 시야에 들어왔다.

“별거 아니야.”

항상 그랬듯 그는 제 몸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줬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그는 책상 앞으로 이동해 자리에 앉았다. 안겨 있는 소희의 시선은 여전히 상처를 향해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상처에 손을 갖다 대려는데 또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하고는 소희의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자신이 입은 베이지색 드레스 팔소매를 잔뜩 적신 핏물. 고개를 더 숙이니 그것의 출처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조슈아의 하얀 와이셔츠가 빨갛게 더럽혀져 있었다.

“여기도 다친 거야?”

어제 데온이 남긴 상처가 분명했다. 그런데 어제는 왜 몰랐지?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빠서 그랬던 걸까.

“별거 아니야.”

매크로 답변처럼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대꾸에 소희가 헛웃음을 뱉었다.

“피가 이렇게 흐를 정돈데 별거 아니긴 뭐가 별거 아니야?”

“치료했는데 다시 터졌나 보네. 별로 안 아파.”

곧바로 소희가 앞에 놓인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갑작스레 훤히 드러난 상체에 조슈아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 다쳐 놓고 안 아프긴 뭘 안 아파.”

전에 그가 직접 칼로 찔러 만든 상흔 옆에, 피가 잔뜩 묻어 붉게 물든 거즈.

복부가 엉망진창이었다.

소희가 상처를 확인하고는 따지듯 묻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테이블 위에 준비해 둔 마카롱을 집은 손가락이 소희의 입 앞에 다가왔다. 마카롱으로 그녀의 입을 막을 심산이었다.

소희가 작게 한숨을 쉬고 받아 들자 그제야 조슈아가 말했다.

“이런 상처는 하나도 안 아파.”

“그럼 아픈 상처가 뭐 따로 있어?”

소희가 투덜거리다가 마카롱을 베어 물었다. 달콤함으로 인해 감정이 중화되자 왜 자신이 이렇게 짜증을 느끼는 건지 의문이 따라왔다.

글쎄, 왜 이러지.

‘누구든 이렇게 다치는 건 보기 싫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소희가 조슈아를 올려 봤다.

“아픈 건 따로 있지.”

의문을 표하는 눈빛에 그가 답했다.

“어제 네가 다른 남자를 안으니까 아팠어. 여기가.”

조슈아는 태연스럽게 제 심장 부근을 가리켰다. 기다란 손가락을 따라 그의 맨가슴으로 시선을 옮긴 소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혹시 이거 장난치는 건가?”

“아니, 장난으로 보여?”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했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던 시선이 다리로 향했다.

“그리고 네가 다치면 나도 아파.”

“뭐 이러다가 나중에 직접 죽어 주기까지 하겠어.”

소희는 진중한 문장에 대고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무겁고 진지했다.

“못할 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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