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
데온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을 빠르게 잡았다. 그리고 검을 뽑아 그대로 그것을 조슈아의 목 끝에 갖다 대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금방이라도 그의 목을 벨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군중들의 웅성거림은 커졌고 초조하게 지켜보던 호위 기사도 일순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저하!”
난장판인 상황 속에서 조슈아는 저 혼자 느긋하게 제 입가에 맺힌 피를 닦아 냈다.
“그래, 좋은 선택이야.”
“뭐?”
“지금 날 죽이지 못한다면 결국 내가 널 죽일 테니까.”
“…내가 못 할 줄 알아?”
목에 닿아 있던 칼날이 떨어져 허공으로 떠올랐다. 날의 끝이 반짝였다.
그를 죽일 만한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두는 것은 여기까지.
조슈아가 제 옆에 떨어져 있던 검집을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칼날을 막아섰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장내를 울리자 다시 한번 사람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왜, 막상 죽으려니까 겁나나 보지?”
거친 음성으로 빈정거리던 데온이 더 지체하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단순하고 무식하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는 데온이란 남자에 대한 조슈아의 평이었다. 그러니 제 뜻대로 휘두르기에도 손쉬운 남자였다.
어쩜 이리 예상한 대로 똑같이 움직이는지.
“멍청한 놈.”
그 말소리는 들끓는 감정에 먹혀버린 데온에게 들릴 리 만무했다.
서늘한 날이 목 언저리에 닿자 조슈아는 가볍게 몸을 비틀었다. 그럼에도 살을 베고 지나가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공격에도 살기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듯한 조슈아의 느른한 입가는 데온의 성질을 더욱 크게 긁어 댔다.
“저 재수 없는 낯짝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야지.”
으르렁거리는 말소리에 이어 다시 그가 거침없이 움직였다. 기다란 날이 새까만 제복을 꿰뚫고 들어왔다.
칼날은 조슈아의 복부를 빠르게 찌르고 빠져나갔다. 고통에 그의 미간이 좁혀 들었지만 이어질 막의 피날레에 오히려 후련한 미소가 그려졌다.
“잡아.”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덩치가 큰 데온을 잡기 위해 네 명의 장정이 매달렸다. 팔을 거칠게 휘둘렀지만 다수가 덤벼들자 별수 없이 그는 잡히고 말았다.
그가 잡고 있던 검을 놓쳤다. 그리고 기사들의 주먹질에 몸을 휘청거리다가 무릎을 꿇었다. 사납게 찢어진 눈시울 밑으로 피가 맺혔다.
“시X. 너는 할 줄 아는 게 네 개새끼들한테 명령하는 것밖에 없지?”
데온이 피가 맺힌 입술 밖으로 침을 뱉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조슈아에게 전혀 닿지 못했다. 그런 그를 비웃듯 붉은 입술이 열려 키득거렸다.
목에서 흐르는 뜨거운 선혈을 가볍게 닦아 낸 조슈아가 허리에 찬 물건을 빼 들었다.
“데온, 이게 뭔지 알아?”
“알 게 뭐야, 새끼야.”
정체 모를 물건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정확히 그의 머리를 조준했다.
“프랭클린 제국의 승기를 가져다줄 물건이지.”
시를 읽듯 매끄럽게 흘러가는 발음들이 현재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또 저 혼자 고상한 귀족인 척하고 있다며 데온이 욕을 읊조렸다.
그의 머리를 겨냥한 물건이 조슈아의 손에 의해 날카로운 소리를 뱉었다.
철컥.
“아직 손봐야 할 게 많지만 시험 삼아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뭐라 씨불이는 거야.”
데온이 정면에서 마주한 것은 작은 구멍의 입구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묘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남자들에게서 벗어나려고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흙바닥에 바지만 더럽혀질 뿐이었다.
“영광으로 알아. 이거에 죽는 사람은 네가 최초니까.”
조슈아가 웃었다. 그리고 검지에 힘을 실었다.
그때였다.
“안 돼!”
매끄럽게 움직이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총성이 요란하게 주변을 흔들었다. 손끝의 떨림은 전이되어 그의 눈망울까지 닿았다.
비명을 지르는 관중들과 그 중심에 있는 여자.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뛰어온 여인이 제 몸보다 몇 배는 더 큰 남자를 감싸 안았다. 그에 데온의 눈동자도, 또 조슈아의 눈동자도 커졌다.
“…아리.”
살짝 잠긴 데온의 목소리가 먼지가 뒹구는 공기 속으로 낮게 울려 퍼졌다.
화약의 냄새에 섞여 든 꽃의 향은 그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거대한 총성 때문에 떨려 오던 몸을 작은 여인에게 가볍게 기대었다.
그리고 반대로, 그 향기는 다른 남자에게 충격을 안겨 줬다.
“…왜.”
차마 뱉지 못한 말이 흐릿하게 번져 갔다. 그녀가 주저앉아 데온을 안고 있는 덕에 총구는 보랏빛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미끄럽게 올라가 있던 조슈아의 입매가 가늘게 떨렸다.
왜.
왜 이리 순식간에 처참한 기분이 드는지.
넋 잃은 눈망울이 처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 돼, 조슈아. 그러지 마!”
가냘픈 말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했다. 조슈아는 무언가에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근래 들어 제일 기분 좋았던 날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땅이 풀썩 내려앉아 그 아래로 끝없이 떨어지는 거 같은 추락감.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그 감정의 정체를 알기 위해 노력하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냈다.
비참하다.
이내 흐릿했던 핏빛 눈동자의 선득한 빛이 돌았다. 데온의 앞을 막아선 여인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내가 진정 죽이고 싶은 건….
이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조슈아가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아리아드.”
선택받지 못한 자를 조롱하듯 아리아드의 어깨를 두른 데온의 팔. 순식간에 뒤바뀐 위치에 데온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쳤다.
“이리 와.”
그 새끼한테서 떨어져.
입안이 퍼석하게 말라 겨우 요점만 뱉을 수 있었다. 한계에 다다른 정신을 넘노닐듯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를 요구해 왔다.
“약속해. 죽이지 않겠다고. 그럼 네 곁으로 갈게.”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손을 펼쳤다. 들려 있던 총이 흙바닥에 툭 떨어져 분리되었다.
“어서.”
웃음기 없는 채근.
이게 그의 한계였다.
* * *
점차 차갑게 식어 가는 얼굴에 소희는 깨달았다. 그에게 돌아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어깨에 둘러진 굵은 팔은 절대 아리아드를 놓지 않겠다는 듯 강고하기만 했다.
“데온, 이러다가 너 진짜 죽어.”
조슈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속삭이자 데온이 피식거렸다.
“걱정 마. 내가 먼저 저 새끼를 죽일 거니까.”
이놈은 방금 전 자신이 정말 머리통에 구멍이 나서 죽을 뻔한 것을 알기는 하는지, 너무도 태연하기만 한 목소리에 소희는 잠시 얼이 빠졌다.
그리고 서늘하게 닿는 눈길에 초조해져 근육질의 팔뚝을 꼬집었다.
“아!”
고통 어린 소리와 함께 팔의 힘이 풀리자 소희는 비치적거리며 그 품을 빠져나왔다. 앞에 놓인 낯짝이 엉망인 것을 보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상처 치료 잘하고. 나중에 또 보자.”
너를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나에게 감사하며 살도록.
진실 된 마음의 소리는 묻어 두고 돌아가야 할 자리를 훑었다. 조슈아가 팔짱을 끼고 데온과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젠장, 험난한 미래가 예상되는구만.
소희가 씁쓸한 표정을 하고는 절뚝이며 걸었다.
제게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던 조슈아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여전히 아리아드만 담은 눈망울로 올곧게 그녀를 주시할 뿐.
바로 앞에 서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쨍한 햇볕과 살결에서 느껴지는 온기에도 불구하고 어째 서늘한 바람이 더 크게 와 닿았다.
남자는 더 이상 그녀에게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정리하고 돌아오세요.”
명령할 뿐이었다.
* * *
모닥불이 타고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 더불어 소희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서쪽 탑에서 아리아드의 침실로 오기까지 둘 사이에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소희는 그저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괜히 입을 열어 헛소리를 했다가 그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으니까.
“아리아드.”
흙먼지로 엉망이 된 붕대를 갈아 주던 조슈아가 입을 뗐다.
“창문을 넘어서 직접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상당히 재밌네.”
재미를 언급하면서도 웃음기 하나 없는 말에 소희가 콧물만 훌쩍 들이켰다.
조슈아는 아직 갈아입지 못해 더럽혀진 그녀의 드레스 밑단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다시 이어진 침묵과 천의 미세한 움직임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 간질임이 평소와는 달리 썩 유쾌한 감정은 아니어서 숨이 턱 막혀 올 무렵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면 넌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못 굴 거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소희가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침대 가장자리에서 여태껏 쭉 그녀만 지켜봐 왔던 남자와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식어 있는 하얀 낯 위로 제 할 말만 뱉고 다물린 입술, 차분해 보이는 눈매 안에 위치한 눈망울은 어두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데?”
눈치를 보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는데 수백 마디를 지껄인 사람처럼 목이 말라 왔다. 웃는 가면조차 벗은 얼굴을 보아하니 조만간 창문에 철판을 못으로 박아 넣을 기세였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 누굴 탓할 길도 없었다. 그래, 현실로 가서 댓글 반응을 보니 감금물에 대한 반응이 꽤 좋던데. 뭐 이렇게 갇혀 사는 것도 내 돈벌이에 나쁘지 않겠다며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넌 날 너무 비참하게 해.”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절로 정신이 들었다. 단전에서부터 긁어 온 듯 내리깔린 언성이 소희의 심장도 긁어 댔다.
발밑에 있던 그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러자 갈라진 목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닿았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그 새끼를 죽이진 않을게.”
죽이진 않는다. 그 말이 풍기는 묘한 뉘앙스에 작은 불안감이 일었지만 소희는 이거라도 어디냐며 안도했다. 그리고 전보다 한결 편안하게 말문을 열었다.
“조슈아, 좋은 생각이야. 내가 전에 네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싫다고 그랬었지. 피는 피를 부른단 말이지? 데온을 죽여서 너한테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고. 내가 다 널 생각해서….”
제 뜻대로 전개가 시원스럽게 흘러가자 소희는 신나서 조잘거리다가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눈망울을 마주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너무 들뜬 기분을 드러내며 방정맞아졌나 싶어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비참해할 필요 없어. 결국 나는 네 옆에 있잖아. 이렇게.”
장난스럽게 두 팔을 펼쳐 보여도 딱딱하게 굳은 낯은 여전했다. 조슈아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다가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손길이 참 곧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또한.
“이제 그거로는 안 되겠어.”
“응?”
“마음도 줘.”
기어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남자의 목소리는 도리어 편안해졌다.
이제는 흔들림 없이 정확한 목적지를 찾아서.
“아리아드, 네 몸하고 마음.”
직선적이며 단순하게.
“나는 이제 그게 다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