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
딸꾹.
야속한 소리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항상 그랬듯 당혹감을 주고는 조슈아는 소희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져서 달래었다. 그리고 그녀의 밑에 위치한 오른팔을 빼 상반신을 일으켰다.
협탁 위에 놓인 물컵을 쥔 손이 천천히 다가선다. 그에 소희도 몸을 일으켜 컵을 받아 들고는 물을 삼켰다.
“무슨 의미야?”
다행히도 떨림이 차츰 잦아들어 뱉는 말소리는 차분했다.
다 먹은 물컵을 받아 든 조슈아가 그것을 치우고는 생긋 웃었다.
“저번에 네가 그랬잖아. 다쳐서 기억을 잃었다며.”
“아아.”
소희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별 의미 있는 말도 아니었는데 괜히 혼자 긴장해서 난리였다.
침대 헤드에 가볍게 등을 기댄 남자가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옅은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가 오롯이 아리아드만을 담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매일 나랑 같이 있어. 불안해서 혼자 못 두겠으니까.”
그러면 나야 아주 땡큐지.
또 가볍게 터져 나오려는 대답을 소희는 꿀꺽 삼켰다. 그리고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다음으로 드는 의문.
“그렇다면 17일 날도?”
그에 조슈아가 눈매가 예쁘게 접혔다. 그는 한 폭의 명화와도 같은 아름다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만 빼고.”
쩝, 입맛을 다시는 소희를 그가 여유롭게 내려 봤다.
* * *
새삼스럽지만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갔다.
창문 새로 흘러넘치는 청명한 햇볕은 여전히 굳건하게 붙어 있는 쇠창살의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오늘, 몇 분 뒤에 이 그림자는 사라질 것이다.
“사람이 죽기엔 날이 너무 좋아.”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을 살피던 소희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곧 마주할 손님을 예상했다.
우듬지에 도착한 휴온이 감청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생글거렸다.
소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쓰는 근육들이 힘없이 늘어져 흐물댔지만 고통이 전보다 덜한 것을 보니 병세가 호전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창가 앞으로 다가가 두꺼운 벨벳 커튼을 잡았다. 바로 앞에 매번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청년이 서 있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좋아서요. 또 이렇게 불러 주셨잖아요.”
어후, 내 심장아.
심정지가 올 것 같은 귀여운 얼굴 뒤로 후광이 비췄다. 그에 소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말씀하셨던 대로 작업은 해 놨어요.”
찾아오지 말라 해도 그 말을 듣지 않던 휴온은 조슈아가 없는 빈 시간을 쏙쏙 잘 찾아와 소희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손을 봐둔 창살을 가볍게 한 번 흔들자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것이 손쉽게 창문에서 분리됐다. 이내 직사각형 창문이 가림막 없이 시원하게 트였다.
소희가 그 앞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휴온, 내가 당신도 살려 줄게요.”
“네?”
의미 모를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쇠창살같이 단단한 조슈아라도 작가인 나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다며, 소희는 휴온이 들고 있던 창살 하나를 뺏어 들고는 가볍게 창문 아래로 던졌다.
“일단 오늘, 다른 사람부터 살린 뒤에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녀를 가만 지켜보다가 휴온이 손을 뻗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꺼이 도울게요.”
그 팔을 잡고 소희는 기나긴 시간 갇혀 있었던 방을 빠져나왔다. 창문을 넘자 오랜만에 직접 마주한 쨍한 햇살에 눈을 설핏 찌푸렸다가 내려가야 할 길을 천천히 훑었다.
이 층인데도 땅과의 거리가 꽤 멀어 보여 아찔했다. 소희가 휴온의 품에 안겨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조슈아보다는 상대적으로 얇은 팔목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괜찮은 거 맞죠?”
“그럼요!”
휴온이 소희의 무게를 견뎌 내느라 벌게진 얼굴로 겸연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녀를 도와 나무를 내려온 휴온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소희를 단단히 지탱한 팔은 여전했다. 그리고 휴온은 준비해 둔 말 위에 그녀를 올리고서야 숨을 돌렸다. 그에 소희는 민망해할 그를 위해 애써 모르는 척 눈을 돌리고 제 뒤에 올라탄 휴온에게 긴장감 있게 말했다.
“명심하세요. 저를 내려 주고 바로 자리를 떠나야 해요.”
조슈아에게 이미 제대로 찍힌 것 같지만, 더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단호하게 뱉은 말씨에 그녀 머리 바로 위에 보이던 턱 끝이 끄덕였다. 아리아드 허리에 왼팔을 감고는 그의 오른손이 말의 고삐를 잡았다.
하지만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듯 뒤에서 거대한 목청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드 님!”
기사 한 명이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말의 속도에 한참은 못 미치지만 그녀를 잡으려고 쫓는 모양새가 매서웠다.
“휴온, 빨리요!”
일단 무작정 출발하고 본 덕에 기사는 점차 저 멀리에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초조함에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소희가 외쳤다.
“서쪽 탑 근처로 가 주세요!”
조급한 목소리에 답하듯 휴온이 더 속력을 올렸다. 그러자 보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꼈다.
* * *
말에서 내려와 땅을 밟는 남자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차가운 바람결에도 쨍한 햇살이 온몸을 휘감아 바깥 활동을 하기에 나쁘지 않은 초겨울이었다.
“날씨가 좋아. 마음에 들어.”
조슈아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기사단장이 그에 긍정했다.
그들의 주변으로 수십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대부분이 황태자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이었다.
그 틈에 섞여 든 남자 한 명이 조슈아와 눈이 마주치자 티가 나지 않게 미세한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복면을 쓴 남자의 손에는 사진기가 들려 있었다.
탑 입구 앞쪽에는 필트모어 공작가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마차가 있었다. 그 마차를 끌고 온 수행인 중 한 명도 조슈아와 눈이 마주치자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다.
소문을 내는 것에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적절하게 섞어 주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필트모어 공작가의 수행인은 조슈아에게 진실을 알려 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착실히 해냈다.
조슈아는 그렇게 자신이 차려 놓은 오찬을 찬찬히 훑다가 입매를 슬쩍 올렸다. 화사한 날씨 덕인가 근래 들어 기분이 가장 좋았다. 이제 이 오찬의 손님만 등장하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가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매만지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가 말하기 전까지 나서지 마세요.”
나직한 어조에 기사단장은 그 의미를 묻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얼마 뒤, 나무로 된 거대한 문이 열리고 꽤 오랜 시간 그곳에 갇혀 있었던 남자가 흙바닥을 밟았다.
날씨를 철저히 무시하는 듯 얇은 리넨 셔츠를 대충 걸쳐 입은 데온이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찢어진 눈매가 가늘어졌다. 웬 구경꾼들이냐며 낮게 욕을 읊조리고는 필트모어 사용인이 준비한 마차에 오르려던 찰나였다.
“…조슈아?”
그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데온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눈매를 더 날카롭게 치켜떴다.
“저 새끼는 왜 또 여기 있어.”
인사 대신 지체하지 않고 터져 나온 욕설과 함께 그는 마차에 오르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이어 성큼성큼 걷는 보폭이 점차 빨라졌다.
누구 하나 죽일 듯 살기를 뿜어내는 진회색 눈동자에 주변 사람들은 움츠러드는 반면, 조슈아의 입술을 더더욱 호선을 그렸다.
느긋한 낯의 남자 앞으로 데온은 제 얼굴을 바짝 붙여 세웠다.
“우리 황태자님께서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직접 행차를 다 하셨을까.”
조용히 빈정거리는 데온을 보며 조슈아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필트모어 공작, 당신이 반역을 주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네가 꾸민 짓이라는 거 다 들었어, 이 새끼야.”
데온은 어금니를 물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그에 조슈아가 데온의 왼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친우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모양새였다.
“며칠 동안 조사를 받는 건 피할 수 없을 거야.”
데온이 제 왼쪽 어깨에 닿은 손을 거칠게 쳐 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주먹을 간신히 허리 아래로 내려 꽉 쥐었다.
이미 그의 인내심은 한계점을 넘어섰다. 둘만 있는 공간이었다면 데온의 주먹질로 벌써 두 장정은 흙바닥을 구르고 있을 것이었다.
와 닿는 시선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그는 아랫입술을 꽉 무는 것으로 제 분노를 대신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필트모어 저택에 위로금을 전달해 놨어.”
“뭐?”
“조사를 받고 돌아가면 지하 어딘가에 돈이 잔뜩 쌓여 있을 거야.”
사납게 찢어진 눈매 바로 앞에서 조슈아가 싱긋 웃어 보였다.
“아, 그런데 대내적으로는 네가 황실의 재산을 손댄 것으로 되어 있을 거야. 원래는 반델리 후작이 훔친 것인데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했거든. 그러니 이제 그건 온전히 너의 몫.”
“개새끼가…. 네가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권력을 잡고 있을 거 같아?”
귓전을 사납게 할퀴는 목소리에도 조슈아가 킥킥거렸다. 데온은 들끓고 있던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결국 밑에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조슈아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 행동 하나로 주변에서 탄성이 나왔다. 찰칵, 기다렸다는 듯 셔터음도 터졌다.
부아가 치미는 것을 참아 내느라 데온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살기를 띤 눈빛을 코앞에 두고도 조슈아는 근처 상황을 찬찬히 훑었다.
조금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애초에 반델리에게 그의 계획을 전달하라 했던 것은 데온을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아리아드에 의해 다 타 버린 증거로 당연히 반역죄는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진실이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명성에 오물이 묻은 자는 무슨 행동을 하든 그 꼬리표를 떼기 힘들었다. 조슈아는 그것을 잘 알았고, 이용할 줄 알았다.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보던 붉은색 눈망울이 다시 제 앞에 쌍심지가 선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아, 쌓여 있는 건 돈만이 아니겠구나.”
멱이 닿는 셔츠의 옷깃이 매섭게 조여 옴에도 조슈아는 굳이 그 손길을 떨쳐 내려 하지 않았다.
“서신도 잔뜩 쌓여 있겠네. 너와 함께 사업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고하는.”
그 거센 손길에 의해 조슈아의 몸이 무기력하게 흔들렸다. 그에 허리에 대충 차 놓은 검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여기까지, 그의 계획대로였다.
데온이 목에 핏대가 솟아 노기 서린 목소리를 뱉었다.
“사람들이 네 역겨운 실체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서 네 새끼를 묻어 버릴 거야.”
“그래, 얼마든지. 항상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바람결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조슈아가 뒤로 쓸어 넘겨 정리했다.
“그런데 필트모어 공작. 안타깝게도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사람들은 진실 따위 궁금해하지 않거든.”
그리고 나긋나긋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러니 멍청한 너는 영원히 내 발밑에 있을 거고.”
뒤이어 차분함만 담고 있던 붉은 눈망울에 서슬이 올랐다.
“결국에 아리아드는 오롯이 내 거라는 소리야.”
퍽, 그 문장의 마침표에 타격음이 더해졌다. 몸에 힘을 풀고 있던 조슈아는 멱을 잡고 있던 손이 제 얼굴을 때리자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이내 또 셔터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