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
조슈아 옆에 있는 브릭스도 우연히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아리아드 님이 쓰러지셔서 의식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그는 종이에 인장을 대충 찍어 넣고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조슈아와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첫 번째 든 생각은, 흥미롭다.
궁 안을 그리 넓은 보폭으로 뛰는 조슈아를 보면 모두가 기함할 일이었으니까. 또 무슨 재밌는 장면이 연출되려나 싶은 마음뿐이었다.
단순히 그러한 재미를 뒤쫓아 그곳에 도착했을 때, 두 번째 든 생각은.
“저기… 저희 언니들이 만든 케이크인데, 아리아드 님께 전해 달라고 해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 그리고 금발의 여인.
자신의 앞을 막아서서 해명하는 켈리를 조슈아는 본 체도 하지 않고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브릭스는 방 안에 따라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복도에 울고 있는 여인을 마주했다.
왜, 당신이 여기에.
그녀의 손끝에 떨림은 멎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애써 그것을 감추려는 듯 꽉 오므린 주먹이 꿈틀거렸다. 브릭스는 그것을 가만 쳐다보다가 다가섰다.
열린 문틈 사이로 조슈아가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차분한 언사가 오고 갔지만 아리아드의 손을 꽉 붙들어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에서 초조함이 엿보였다.
다시 시선을 돌린 곳에 사과 향이 날 것 같은 여인이 그런 조슈아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이렇게 될 걸 모르고 준 건 맞아요?”
대뜸 뱉어 낸 질문에 켈리의 얼굴이 그에게로 돌아섰다.
딱딱하게 굳어선 낯. 그리고 꿈틀거리던 주먹도 멈춰서 치맛자락을 바스락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무슨 의미예요.”
브릭스가 아무 말도 없자 켈리가 다시 바들대던 입술을 열었다.
“그럼 제가 지금 일부러 선물했다는 거예요?”
“글쎄.”
흥미를 잃은 브릭스의 만면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뭉개진 케이크로 어지럽혀진 침대 위, 그리고 쓰러져 이리저리 흐트러진 보랏빛 머리카락. 직접 보지 못했으니 무엇이 정확한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만.
“모를 수가 있나.”
이번 연도 초에 열린 다과회에서 파인애플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고는 쓰러져 사경을 헤맨 아리아드의 이야기는 금세 알려졌다. 일단 그녀의 평소 행실이 여자들에게는 질투와 선망의 대상으로, 남자들에게는 집착과 갈망의 대상으로 유명했기에, 그녀의 그런 유명세가 더욱 빠르게 소문이 퍼진데 한몫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다과회에 당신도 있었잖아.
푸른빛 눈망울을 마주한 브릭스의 눈동자가 점차 차갑게 식어 갔다.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방황하던 켈리의 입술이 열렸다.
“정말 무례하시네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전에 쿠키를 전해 준다고 했던 것도 빼돌리시고…. 너무 무례하세요.”
브릭스가 제 눈을 찌르는 연금발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제가 그걸 왜 빼돌리겠어요. 쿠키가 너무 먹고 싶어서? 제가 쿠키에 미친 사람이어서?”
그리고 설핏 미소 지었다.
“아니요. 당신 마음이 너무 잘 보이니까. 그리고 그걸 들고 그 방 안에 들어갔으면 난처했을 상황도 빤히 보이니까요.”
“무례하신데 오지랖이 넓기까지. 최악이네요.”
바르르 떨리던 켈리의 눈망울이 일순 사납게 뒤틀렸다. 그에 브릭스가 가볍게 한쪽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재밌고 좋아하는 거에는 자연스럽게 오지랖이 넓어지더라고요.”
그 말에 그녀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담긴 흐릿한 저의를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가벼워 보이기만 하는 남자의 말을 그리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기에 켈리는 이내 흘려버렸다.
“그런데 더 이상 오지랖 부릴 일은 없을 거 같네요.”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 묵직한 어투로 뇌까렸다.
“재미가 없어졌어요, 당신.”
* * *
소희는 시원한 공기를 들이켰다.
“으악!”
그리고 목 언저리를 두 손으로 잡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 쉴 구멍이 꽉 막힌 끔찍한 괴로움 속에서 겨우 벗어났다.
익숙한 방 안.
들숨 날숨, 허파에 공기를 몇 번이고 충전하고 나서야 안정이 되었다.
“죽음은 계속해서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네.”
이렇게라도 돌아온 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소희는 켈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리아드에게 독극물과도 같은 케이크를 건네고서는 오히려 자신이 울 것 같이 일그러졌던 만면. 그리고 그와 상이하게 무심하게 찰랑이며 떠나간 금빛 뒷모습.
“나 참. 착하긴 개뿔.”
뒤틀린 전개 속에서 캐릭터들은 제 고유한 성격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 또한 전혀 아니었다. 켈리의 행동에 모두 너그러울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짜 놨던 설정을 크게 맹신한 것에 있었다.
천사 같고 올곧은 여주인공을 만들어 놨던 소희는 이렇게 어그러진 켈리가 너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내 소설 속 인물들이 생각보다 너무 입체적이네.”
소희는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조금 더 켈리를 경계해야겠다고 다짐한 뒤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았다.
이 얼마 만에 확인한 댓글 여론인지.
소설 내용이 멀쩡하기만을 기도함과 함께, 앞으로의 전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차분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소설 속에 갇혀 있던 시간이 많았던 만큼 풀린 회차도 많았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많은 댓글들이 조슈아를 찬양하고 있었다.
[조슈아만 나와도 재밌음. 데온 버려.]
[으악 집착 남주 맛있어요. 데온 생각도 안남.]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소희의 입매에 애매한 미소가 그려졌다.
남자 주인공을 이토록 좋아해 주니 좋긴 한데, 데온을 버리라니.
꿈속에서 단상 위를 데굴데굴 구르던 데온의 머리통을 생생하게 보고도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소희가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던 인물이었다면 냉정하게 버릴 수 있었을지도.
이미 나와 같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인 것을 확인했는데 어떻게 죽도록 내버려 두냔 말이다.
소희는 무섭도록 다정했던 조슈아의 언성을 떠올렸다.
‘17일 날 서쪽 탑 앞에서 데온이 풀려나길 기다리다가 그가 나오면 바로 죽일 거야. 내가 직접.’
가증되는 불안감을 느끼며 빠르게 관련된 부분을 읽어 나갔다.
반델리를 불러서 무언가를 꾸미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데온 필트모어한테 가서 전하세요.”
“무어라고… 전할까요….”
그 핏빛 눈동자에 남은 건 번들거리는 살기였다.
“조슈아 매킨리가 너를 죽이려고 판을 짜고 있다. 나는 협박을 당해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만 전달하면 될 것 같아요. 아주 쉽죠.”]
소희가 내용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고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의미심장하게 떡밥만 던져 놓고 핵심적인 내용은 없었다.
“젠장, 왜 이렇게 전달하라는 건데! 왜!”
제일 중요한 것은 탈출이었다. 날짜와 위치를 알고 있으니 방 밖으로만 나가게 된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가지?
문득 쇠창살 하나를 잡고 밑으로 떨어진 휴온이 생각나자 소희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려쳤다.
“그래, 쇠창살이 뜯겼었잖아!”
나갈 통로가 있다. 또한 도와줄 협력자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을 막는 것이 그리 막막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소희는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소설을 다시 읽어 나갔다. 그리고 다시 충격에 빠진 건 얼마 안 가서였다.
[갑자기 사랑이라는 단어를 계속 되뇌던 여자는 웅얼거리다가 이상한 말을 툭 던졌다.
“사랑…. 휴온 칼리우드 너무 사랑스러워. 개귀여워.”
“…뭐?”
휴온 칼리우드. 그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 꽉 틀어박힌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술주정을 하는 아리아드를 바라보다가 조슈아가 한쪽 눈썹을 크게 치켜올렸다.
“걔가 누군데.”
“내 이상형…. 최애….”]
침착함을 찾아가던 심장이 다시 발광했다. 소희는 그대로 지체하지 않고 제 뺨을 때렸다. 철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절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안 돼!”
데온에 이어 살려야 할 인물이 한 명 더 늘어났다.
조슈아가 운영하는 기사단에 뽑혔다고 했을 때부터 어째 불길하다 했었는데. 느꼈던 그 서늘함은 어두운 미래를 똑똑히 암시하고 있었다.
소희는 마우스를 쥔 손에 애써 힘을 주어 계속해서 읽어 갔다.
휴온과 조슈아가 둘이 대면한 상황이었다. 뜬금없이 이어진 칼 대련과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이는 남자의 말.
[“이대로라면 전쟁터에서 죽기 딱 좋을 테니까.”]
“에이, 조슈아. 설마 아니지? 이거 아니잖아.”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조슈아는 기어코 그를 전쟁터로 내몰았다. 심지어 검술 능력도 아예 없는 사람을.
“내 연예인, 내 포켓 보이 어떡해.”
소희가 울상이 된 얼굴을 두 손 위에 묻었다.
댓글은 온통 조슈아의 칭찬뿐인데 그를 직접 겪는 소희는 보는 이들과 같은 즐거움을 공유할 수 없었다.
본인이 겪는 건 로맨스 스릴러였으니까.
안 그래도 조슈아는 휴온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가 자신을 도와준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그 막막한 미래를 그리다가 소희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의 전개를 제 예상처럼 쉽게 끌고 갈 자신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현실로 돌아와 다른 인물들의 내용과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이점이었다.
그러니 엉망진창인 소설이라도 흐름은 아직 작가인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소희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 * *
처음 느껴지는 건 안온감. 이제는 현실의 제 방보다 익숙해진 체취와 너른 품.
아무리 조슈아가 미친 사람처럼 굴어도 아리아드에게 따뜻한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일어났어?”
소희의 작은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머리 위에서 비단결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고운 얼굴 위로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아리아드, 너 죽을 뻔했어.”
근심이 가득히 묻은 어투에 소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난 안 죽어. 걱정하지 마.”
죽음의 문턱을 밟았던 게 이로써 몇 번째던가. 아리아드의 몸에 한소희가 들어와 있는 이상 크게 다칠지언정 요단강을 건널 일은 없었다.
하지만 조슈아의 입장에서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뱉는 머리가 텅텅 빈 발언일 뿐.
“제발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마. 이제부터 뭐 먹을 때 나한테 검사받아.”
“와, 이젠 식단 관리까지 해 주는 거야? 엄청난데.”
장난스러운 대꾸에 굵은 한숨이 퍼졌다. 조슈아는 오른손으로 제 눈을 찌르는 까만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겼다.
“너 지금 장난이 치고 싶어?”
그리고 그 손짓만큼이나 말소리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아리아드, 잘 들어. 너 파인애플 못 먹어.”
이어 단어를 하나씩 씹어 또박또박 뱉어 냈다.
“너 술도 못 마셔.”
“…알아.”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자 큼지막한 손가락이 소희의 턱 끝을 잡았다.
“아니, 넌 몰라.”
“내 몸이야. 내가 더 잘 알아.”
“아버지 이름도 모르는 네가 아리아드에 대해서 뭘 알아.”
뭐야.
소희는 그 말에 너무 놀라 숨을 멈췄다가 딸꾹질을 터트렸다.
딸꾹, 딸꾹.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 그녀가 급히 두 손으로 제 입술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당황스러움은 전혀 감춰지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