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
“넌 계속 이 방에 갇혀 있을 거니까. 영원히.”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는 오싹한 전율을 줬다. 소희는 애써 목을 가다듬고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조슈아, 그거 범죄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러자 그녀의 말을 비웃듯 낮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뒤이어 빠르게 끌어당겨 시야가 빙글 돌았다.
반 바퀴 뒤집힌 풍경에 소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그렇게 조슈아의 몸 위에 올라와 누워 있는 꼴이 되었다.
하체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감 때문에 분위기에 더 압도당한다고 느꼈는데 위치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의 몸 위에 있는 건 자신이었지만 허리를 꽉 감싸 안은 탄탄한 팔에 갇혀 무력하기만 했다.
조슈아는 왼손으로 다시 소희의 뺨을 잡아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아리아드, 그거 알아? 널 가둬 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뭐?”
“이곳에서 법에 선악은 없어. 그저 강한 사람이 만들 뿐.”
뺨을 살살 어루만지던 손이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너른 가슴에 기대게 했다. 쿵, 쿵, 쿵 일정한 박자로 여유롭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예전에는 여성이 순결을 지키지 못하거나 외도를 하면 처형당하는 법이 있었어. 지금 황후인 비앙카 매킨리가 그 법을 없앴지.”
뜀박질 치는 심장 고동 위로 나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아리아드에 빙의한 소희는 괜히 뜨끔하여 뱉는 말소리가 조금 떨려 왔다.
“…그래서 다시 그 처형하는 법을 만들겠다, 뭐 그런 소리야?”
“글쎄.”
겁에 질린 듯 점차 하얘지는 안색을 지켜보며 조슈아가 킥킥거렸다. 그와 반대로 소희의 머릿속에는 아리아드가 처형당해 죽는 꿈이 무한 반복되었다.
“날 죽이려고?”
위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멈췄다.
“그럴 리가.”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해.”
“법은 강자의 편이라는 걸 말해 주고 싶었던 거야.”
안심하라는 듯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부드럽게 매만지는 움직임. 간지러움은 위에서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닿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퍼지는 불안감은 더 깊어졌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따지고 싶으면 네가 나보다 더 강해져. 그러면 돼.”
친절하게 길을 제시해 줬지만 그게 너무도 터무니없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헛웃음이 목 끝까지 찼다.
이 세계에서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너보다 내가 어떻게 더 강해지겠어.
소희의 속마음에 대꾸하듯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난 황제가 될 거야.”
대수롭지 않은 사실. 숨 쉬듯 쉽고, 너무도 당연한 순리였지만.
“네가 원하는 걸 다 줄게.”
이 모든 게 한 여자만을 위한 다짐이라는 건, 제 앞에 놓인 남자가 그저 나사 하나 빠진 기계처럼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계속 내 옆에 있어.”
“내가 자유를 원한다면?”
“내게서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결국 이렇게 내보였다.
소희는 자신의 허리를 꽉 붙든 그의 팔처럼 제 아래에 놓인 허리를 둘러 안았다. 그러자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멈춰 섰다.
“불안해하지 마. 네 옆에 쭉 있을 거라고 했잖아.”
차분히 달래는 말에 조슈아가 얇은 허리를 감은 두 팔에 더 힘을 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문장이 있었다.
‘아리아드가 지금은 너에게 잘해 주는 듯 보여도 조만간 네 곁을 떠날 거야.’
왜 그 말이 여태 그리 뇌리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지.
제 예상이 언제 한 번 틀린 적은 있었던가.
* * *
켈리는 아리아드의 방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케이크 상자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마지막 케이크.
로잘린과 에리카가 만든 과일이 듬뿍 들어간 케이크는 최근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달콤했다. 그리고 이 달콤함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켈리 유레시아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시녀의 목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상자를 잡은 두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켈리의 고민이 깊게 묻어났다.
이제라도 그만두자.
“아니에요. 그냥 다음에 찾아올….”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고, 마주한 연보랏빛 눈동자. 켈리의 손가락에 힘이 서서히 풀렸다.
언제나 그랬듯, 저 여자를 마주하면 자연스레 이성적인 사고가 멎는다.
‘뭘 망설여, 켈리. 쉬운 길이 여기 있잖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속삭임.
결국 그녀는 보랏빛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 * *
소희는 아침부터 찾아온 켈리를 의아한 눈빛으로 찬찬히 훑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낯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평소보다 나지막한 미성이 울려 퍼졌다.
“전에 있던 일에 대해서 제대로 사과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예?”
오히려 사과라면 제 쪽에서 해야 할 것 같은데.
소희는 문득 집무실에서의 불편했던 삼자대면을 떠올리며 그리 생각했다. 결국 켈리를 난처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니까.
어리둥절해하는 얼굴 앞으로 불쑥 하얀 상자가 들이밀어졌다.
“죄송했어요. 이혼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먼저 말씀드렸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이렇게 사과드리네요.”
“아, 그거야…. 뭐, 괜찮아요.”
딱히 그녀에게 유감을 품진 않았지만, 일방적인 사과는 계속되었다.
“제 일기장을 보셨다고 들었어요. 보셨다시피, 제가 조슈아 님을 정말 많이 좋아해요.”
“아….”
무어라 대꾸할지 몰라 소희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너무도 진한 진심이 묻어나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어요. 질투에 눈이 멀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죠. 죄송해요.”
사과하는 사람치고는 꽤 덤덤하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었지만 소희는 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제 감정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마음씨가 꽤 멋있다고만 생각했다.
“그 감정을 언제쯤 접을 수 있을지. 노력은 해 보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말 뒤에 켈리는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를 소희의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놨다.
“앞으로도 저도 모르게 실례를 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사과드릴게요.”
당당한 어투와 묘한 문장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선선히 대꾸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앞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과일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가 멋스럽게 담겨 있었다.
“잘 먹을게요.”
역시 여주인공은 여전히 착한 것 같다며, 소희는 샐쭉 웃어 보이곤 협탁 위에 놓인 티스푼을 들었다.
“맛있을 거예요.”
그와 반대로 켈리는 웃지 않았다. 밋밋하게 일직선을 그린 입술로 안에 들어간 재료를 차분히 읊었다.
“시트 안에 여러 과일을 갈아 넣은 케이크예요. 사과, 블루베리, 산딸기, 키위, 오렌지….”
“아, 제가 다 좋아하는 거네요.”
소희가 들고 있던 티스푼으로 선뜻 케이크를 펐다.
그때였다.
“…그리고 파인애플이요.”
머뭇거리던 켈리의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희는 그대로 달콤한 향을 머금었다. 그에 앞에 놓인 얼굴이 일그러지며 낮았던 언성이 커졌다.
“파인애플이요, 아리아드 님!”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놀라, 소희가 들고 있던 티스푼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당황스러움에 씹을 생각도 못 하고 꿀꺽 삼키는데.
흐려진 금안에 서서히 눈물이 맺혔다.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 말과 함께 온몸 구석구석으로 작열감이 퍼져 나갔다.
“뭐야.”
서서히 극심해지는 따가움에 소희의 얼굴도 일그러지는데.
“…당신이 정말 미워요. 그래서 제가 자꾸… 이렇게 못나져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생크림이 묻은 입매가 살짝 떨렸다.
켈리,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구나.
말을 하려는데 기도가 띵띵 부어 낯선 헛기침만 커져 갔다.
아리아드는 술도 못 먹어. 심한 알레르기도 있어. 뭐야, 이 망할 몸뚱이는.
소희는 한탄 섞인 생각을 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기도가 점점 막혀 호흡도 힘들어졌다. 켈리에게 도움을 구하려 벌게진 얼굴로 손을 뻗는데 이미 눈물 젖은 얼굴이 매정하게 돌아서 멀어지고 있었다.
처연하게 떨리는 오른팔이 허공에서 머물다 툭 떨어졌다.
이내 찰랑이는 금발이 사라지고 눈앞이 흐릿해진다.
저… 망할….
소희가 속으로 욕을 읊조리다 익숙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축제의 마지막 날.
여전히 들뜬 바깥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미묘한 긴장감이 회의실 안에 감돌았다. 그들은 긴박한 현안을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다니엘 매킨리의 군사 충원 요청.
“저희는 전력이 그리 크지 않아서 도움이 될지….”
구석에 앉아 있던 후작 한 명이 조심스레 말문을 떼었다.
어떻게든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았다. 큰 숲을 보자면 전장에서의 승리는 프랭클린 제국에게 큰 이득이겠지만, 작은 나무만 보자면 자신들의 힘을 상징하는 직속 기사단이 목숨을 잃는 것은 실이었다. 그랬기에 서로 눈치만 살살 보고 있을 때.
전보다 더 병색이 짙게 내려앉은 황제의 얼굴이 설핏 구겨졌다. 쓴소리를 꺼내려 주름진 입매를 천천히 움직일 즈음.
펜을 들고 무언가를 한참 적던 조슈아의 손이 멈추고 대리석 테이블 중앙에 인장이 찍힌 종이를 올려 두었다.
“제 기사단의 충원 명단입니다.”
명단을 확인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큰 규모의 기사단을 지닌 황태자가 과반이 넘는 사람들을 명단에 올렸기 때문이다.
“저런, 저기 당신 아들도 명단에 올라가 있네.”
구석에 앉아 있던 칼리우드 백작이 옆에서 안타깝다는 듯이 뱉는 말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들끼리 돌려 보던 종이가 제 손에 쥐어지자 그는 가늘게 한숨을 뱉었다.
[휴온 칼리우드]
또박또박하게 적혀 있는 이름은 믿고 싶지 않아도 명백히 제 아들의 것이었다.
일평생 공부만 한 녀석이 무슨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냐며 더 크게 호통을 쳤어야 했는데. 합격했다며 맑게 웃던 아들놈의 얼굴을 떠올리며 칼리우드 백작이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일방적인 결정을 내린 황태자를 원망 어린 눈동자로 지켜보는 도중이었다.
구석에 서 있던 메이컨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조슈아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