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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29화 (29/120)

Chapter 29

잔뜩 지쳐 도착한 저택 안에 달콤한 향이 감돌았다. 부엌 쪽에서 로잘린과 에리카의 대화 소리가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켈리는 고단한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발소리를 낮췄다. 괜히 그녀들의 눈에 띄어 성가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켈리, 잠시만 이리로 와 볼래?”

부엌의 미닫이가 열리고 에리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켈리가 낮게 한숨을 쉬고는 그녀를 뒤따랐다.

원목 탁자 위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는 재료들 옆으로 예쁘게 장식한 조각 케이크들이 놓여 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정성스레 포장하던 로잘린이 켈리를 흘깃 바라봤다.

“네 일기장 내용이 얼마나 황당했으면 글쎄 어제 아리아드 님한테 가서 그걸 보여 줬다니까.”

들려오는 말에 켈리가 헛웃음을 삼켰다. 하루라도 괴롭히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는지 역시나 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내용은 익숙함에도 불쾌하다.

“아리아드 님이 뭐라고 하시는 줄 알아? 너 같은 건 상대도 안 된다는 듯이 정말 여유로우셨어.”

켈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조금은 신경질적인 어투에 로잘린이 콧방귀를 꼈다.

“뭐 어쩌라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말하는 거야. 아리아드 님이 하셨던 말씀이 참 인상 깊어서.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거든. 저는 괜찮아요. 짝사랑하는 마음이야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니까.”

이내 흥얼거리며 상자에 케이크를 모두 담고는 얼굴을 들어 켈리를 마주 봤다. 그리고 화장을 짙게 한 눈매를 접었다.

“정말 대단하신 분 같아. 어쩜 그리 너그러우신지.”

그 앞에서 켈리가 실소했다. 겨우 이딴 말을 하려고 부른 건가.

“아, 이 말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일순 로잘린이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포장한 케이크들을 켈리 앞에 놓았다.

“우리가 내일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너는 또 황후 폐하를 도우려고 황궁에 들어갈 테니 네가 이것 좀 황실 사람들에게 선물해 주지 않겠어?”

알 수 없는 행동에 미간이 좁혀 들었다. 자신이 한 행동을 어떻게든 뽐내려고 안달 내는 사람이 그 덕을 딴 사람에게 돌리겠다니.

“이건 네 거야, 켈리. 한번 먹어 봐. 맛있을 거야.”

로잘린은 저답지 않게 곱게 웃어 보였다. 또 꽤 친절한 어조였다.

그 검은 속마음을 읽어 내려 켈리의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

* * *

똑똑.

창가에서 고대하던 소리가 울렸다.

휴온은 창틀에 쪽지를 조심스레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손을 흔들자 소희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줬다.

그렇게 떠나기에는 아쉬운 듯 남자는 우듬지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 순간, 거세게 이는 바람에 휴온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휘청휘청 위태롭던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려 급히 쇠창살을 잡았는데.

툭.

“으악!”

뜯겨 나간 창살과 함께 남자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엥? 뭐야.”

소희는 놀라서 침대에서 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 창틀에 낀 쪽지를 먼저 잡고는 고개를 조금 내밀어 밑을 바라봤다.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모래 바닥을 구르던 남자는 소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요?”

“아, 네. 당연하죠. 이 정도는 뭐….”

말끝을 흐리며 휴온은 아무렇지 않게 먼지를 툭툭 털었다. 애써 미소 짓고 있어 입꼬리에 잘게 경련이 일고 있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소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걱정스럽게 그를 찬찬히 훑었다. 그리고 낮게 속삭이며 결국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제 올라오지 마요. 도와준 건 진짜 고마웠어요. 다음에 다른 곳에서 봐요.”

다른 곳에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연예인은 멀리서 봐야지.

아쉬움을 달래며 손을 흔들자 그렇게 한참을 아리아드만 바라보던 남자는 결국 등을 보이고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소희는 창문을 닫고 다시 침대로 향했다. 괜히 또 조슈아에게 흠이 잡힐까 봐 붕대에 묻은 먼지도 열심히 털었다.

그리고 휴온이 쓴 쪽지를 펼쳤다.

[반델리 후작님은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증거로 제출한 편지에 데온 공작님이 역모를 꾸민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편지의 필체가 달라서 입증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17일에 풀려나시면 또 조사를 받으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소희는 이해가 되질 않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반델리는 무죄. 데온만 몰리는 중이라는 거지.”

서류를 불태웠기 때문에 증거로 내밀만한 것이 없어진 시점에서 조슈아는 또 다른 증거를 만들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있다면.

“필체가 달라서 입증될지 모르겠다는 건 무슨 소리야.”

조슈아가 그런 엉성한 증거를 만들었다고? 그 점이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쪽지를 들고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이지 애매한 정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그 안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던 중.

철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 사건의 중심인 당사자가 등장했다. 그의 칠흑빛 머리카락이 노을에 반사되어 흑진주처럼 반짝였다.

최대한 일찍 오겠다더니. 역시, 이 남자는 자기가 한 말을 결코 어기는 법이 없다.

새삼스레 그 아름다움에 넋 놓고 바라보던 소희는 이어지는 말에 번득 정신을 차렸다.

“손에 쥐고 있는 건 뭐야.”

소희는 반사적으로 쪽지를 등 뒤로 숨겼다.

“그냥 심심해서 일기 같은 걸 적었어.”

그러자 재킷을 벗은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침대에 앉는다.

“일기면 일기지. 일기 같은 거는 뭐야.”

“그래, 일기. 일기 말한 거야.”

“나도 보여 줘. 일기 같은 거.”

장난치듯 그 입매가 느른하게 올라가는데 소희 혼자 심장이 벌렁대고 난리였다.

조슈아는 좀 더 거리를 좁히며 등 뒤로 구겨 넣은 팔을 잡으려고 했다. 그에 소희는 당황스러워 결국 이상한 짓을 하고 만다.

“너….”

그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소희가 등 뒤에 있던 팔을 빼 종이를 입안으로 구겨 넣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거야?”

짙은 검은색 눈썹이 위로 한껏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종이를 열심히 씹어 삼키려는 그녀의 턱을 큰 손이 덥석 움켜잡았다.

“아리아드, 너 왜 그래.”

종이를 뱉게 하려는 듯 볼까지 움켜쥔 손에 차츰 힘이 실렸다. 그럼에도 소희는 굴하지 않고 그 맛없는 걸 목으로 넘겼다.

그렇게 다 삼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게… 보여 주기 싫어서 그랬어. 일기는 원래 혼자만 간직하고 싶잖아.”

“그럼 그냥 보여 주기 싫다고 하면 되잖아.”

“그래도 넌 뺏어서 볼 거였잖아.”

오가는 대화 끝에 조슈아가 소희의 턱 끝을 잡아 올렸다. 숨결이 느껴질 가까운 거리에 아무 표정도 담기지 않은 만면이 놓여 있다.

“그게 일기는 맞아?”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이긴 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건, 이상해 보이는 것보다 이 내용을 읽게 두는 것이 더 당혹스러운 일을 만들기 때문이었다.

소희는 가늘게 숨을 내쉬며 밑에 놓인 이불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그럼, 당연하지.”

슬쩍 눈알만 굴려 시선을 피하자 그녀를 따라 조슈아가 얼굴을 옮겼다. 붉은 동공을 가만 마주하니 이미 그게 일기가 아닌 것쯤은 눈치챈 듯하다.

턱 끝에 있던 엄지가 올라와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나한테 뭘 숨기는 거야.”

목을 긁고 나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소희가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이 남자는 왜 이리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지. 진정 목덜미가 물린 사냥감이라도 된 듯 몸이 잘게 떨려 왔다.

소희의 입술이 살짝 열리자 그제야 붙어 있던 엄지가 떨어졌다.

“그래, 조슈아. 그럼 서로 말해 주자.”

“뭐를.”

“서로 숨기는 거.”

“난 너한테 숨기는 거 없는데.”

“왜 없어. 데온을 어떻게 죽일지 궁리 중이잖아.”

불편한 주제를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야 말았다.

“아, 그래. 데온.”

그러자 조슈아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 그 또한 소름 끼치게 어여뻤다.

“아리아드, 네가 원한다면 다 말해 줄 수 있어. 네 주변 남자들을 어떻게 없애 버리는지.”

다정히 이어지는 말 뒤에 턱을 잡고 있던 큼지막한 손이 떨어졌다. 뒤이어 지체 않고 그는 자리를 옮겼다.

옆에 앉아 있던 커다란 몸이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는 소희의 하체를 짓누르고 올라섰다 . 그에 소희의 얼굴이 곧장 창백히 질렸다.

“저기, 저기. 우리 대화로 하자.”

다급히 이어지는 말에도 그의 손은 천천히 다가섰다. 그리고 뒤통수를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세부적인 계획까지 전부 다 말해 줄 수 있어.”

“…그래? 그렇단 말이지….”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전개에 소희는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서로 이야기를 해 주자면 조슈아도 숨기는 게 있으니 조용히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말대로 서로 이야기해 주자. 숨기는 거 없이.”

그는 입매를 올려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 작은 머리에서 하는 생각들. 전부 다 말해 줘. 알고 싶어.”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꿀이라도 바른 듯 달콤하다.

소희는 바로 앞에 놓인 남자의 무게감에 심적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럼에도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부터 말해 줘. 그럼 해 줄게.”

“아, 그래.”

서슴없는 대답에 소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아닌데.

“17일 날 서쪽 탑 앞에서 데온이 풀려나길 기다리다가 그가 나오면 바로 죽일 거야. 내가 직접.”

이어지는 미성에 보랏빛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당혹감을 감추려고 했지만 목이 자꾸 말라 와 침을 꿀꺽 삼켰다.

“시체는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이야. 그건 정해지면 말해 줄게.”

소희가 그 말에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그에 그녀의 뒤통수를 매만지던 손가락이 귓불을 스쳐 뺨을 잡는다. 솜털 위를 부드럽게 배회하자 등줄기에서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자, 이제 네 차례야.”

온화하지만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어조. 조슈아한테서만 느낄 수 있는 특이한 위압감이었다.

소희는 목이 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위태로운 침묵이 흐르는 끝에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말하자며.”

다정한 채근.

난감하다, 너무나도. 아랫입술만 짓이기고 있자 그의 손가락이 그곳을 파고들었다.

“입술 그만 괴롭히고.”

“….”

“말해 주기 힘들면 천천히 해 줘도 돼.”

미소 짓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비스듬히 내려온 새하얀 낯이 소희의 바로 앞에 위치하다 그 입술이 달콤한 감촉을 남기고 떨어졌다.

이내 떨어진 틈새로 감미로운 목소리가 채워진다.

“그런데 아리아드. 안타깝게도 내 계획을 안다고 해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뭐?”

조슈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따사롭고, 상냥하게.

“넌 계속 이 방에 갇혀 있을 거니까.”

또 깊은 물처럼 고요한 눈망울로.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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