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
“정말 그거뿐이야?”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을 경우, 노을이 진 듯 붉은 눈망울을 마주할 때면 절로 움츠러들었다. 소희는 제 입꼬리에 잘게 경련이 이는 것도 모르고 대꾸했다.
“그, 그럼. 당연하지.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어. 그래서 기억도 안 나고….”
조슈아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아리아드, 왜 이렇게 떨어.”
그의 손가락이 옆으로 흘러 뺨을 쥐었다. 안정감 있고 따스한 감촉에도 숨이 턱 막혀 왔다.
“다그치는 거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아, 아하.”
다시 어색하게 웃자 그녀를 따라 조슈아가 웃음을 흘렸다.
소희는 그의 속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냥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진짜로 별일 없었어. 심심하기만 했지.”
“그래? 내일은 최대한 일찍 올게.”
그 다정한 대답 이후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조슈아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제야 소희는 막혀 있던 콧구멍이 조금 뚫리는 듯했다.
그는 매고 있던 타이를 풀고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리고 그녀의 하반신 쪽에 위치했다.
또 얼음찜질을 해 주려고 그러는 건가. 그렇게 예상했던 것이 들어맞았는지 조슈아는 드레스 하단을 올려 다리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해 주는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심지어 붕대를 풀려면 드레스를 한참 올려야 해서 속옷도 드러났기에 매번 민망함도 함께했는데, 이제는 또 몇 번 해 봤다고 그에도 익숙하다.
“아리아드.”
얼마 전 일을 회상하던 소희가 자신을 낮게 부르는 소리에 그와 시선을 맞췄다. 제 할 일을 다 끝낸 큼지막한 손이 다 푼 붕대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붕대가 왜 이렇게 지저분해. 땅바닥을 쓸고 다닌 것처럼.”
무방비한 상태에서 예리하게 들려오는 질문에 소희의 콧구멍이 커졌다.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어떻게 저리 정확하게 집어내지.
“아… 아까 자다가 굴러떨어져서 그런가?”
또 대충 둘러댔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끝도 없이 낳고 있었다.
며칠 전 제 거짓말은 형편없다고 말하던 언성이 귓가에 스쳤다. 지금 이것도 형편없이 다 탄로 나려나.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때 즈음, 조슈아가 침대 가장자리로 옮겨 와 그녀와 가까워졌다. 그리고 앉아 있는 소희의 허리를 잡았다.
“떨어졌어?”
“어… 응.”
“괜찮아?”
형편없는 거짓말을 알아내는 그의 능력보다, 아리아드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나 보다.
조슈아는 진실로 걱정스럽게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을 찬찬히 훑었다. 그리고 다시 소희와 눈을 맞췄다.
“진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에 너른 가슴이 가까이 다가서 소희를 꽉 끌어안았다.
“조심해.”
위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거짓말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 * *
날이 추워지며 해 뜨는 시간이 늦춰졌다. 조금은 어둑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조슈아가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란돌프 공작님이 찾아오셨다는데 아리아드 님은 별말씀 없으셨습니까?”
옆에서 그와 같이 움직이던 메이컨이 넌지시 질문을 던지자 조슈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통 아리아드에게만 관심이 쏠린 남자가 피어슨 가문의 사업이 급격히 하향세로 들어선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랬기에 딸을 잘 찾지도 않던 란돌프가 방문했다고 했을 때 아리아드에게 무엇을 요청했을지 대충은 예상했다.
현재 그녀가 갇혀 있는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저에게 도움을 청하리라 여겼는데, 계속해서 질문을 해도 그녀는 대답을 피하기에 바빴다.
“오히려 말하는 걸 피하던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도움을 받기에 부담스러워서 그러시는 것 아닐까요.”
메이컨의 추측에 조슈아도 수긍했다.
소희의 행동으로 인해 이렇게 엉뚱한 오해만 쌓여 가고 있었다.
“제가 어제 말씀드렸던 돈은 준비해 놓으셨나요.”
“네, 돈은 모두 준비됐고 란돌프 공작님께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오늘 중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든 메이컨이 온실 정원으로 들어서는 조슈아와 길을 달리했다.
조슈아는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공간에 들어섰다. 각종 꽃내음이 꽉 들어찬 중앙에 비앙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를 보고 비앙카가 입을 뗐다.
“별일이 다 있구나. 네가 먼저 식사를 같이 하자하고.”
“좋은 아침입니다.”
딱딱한 어투를 부드럽게 넘기고는 조슈아는 의자에 자리했다. 그와 함께 형식적인 식기의 달그락거림이 시작됐다.
느릿하고 여유롭게. 그렇지만 다정한 분위기는 없었다.
거위 간 샌드위치를 입에 잘라 넣은 비앙카가 그것을 다 삼키고는 한참 뒤에야 서두를 뗐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니.”
식사나 같이하자고 부를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비앙카도 그의 속내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조슈아는 그녀가 예상했던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피어슨 가문에 투자했던 돈을 다 빼서 그와 비슷한 사업체를 차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이 참 빠르구나. 내 돈으로 내가 원하는 걸 하겠다는데 철회하라고 할 셈이니?”
“그럴 리가요. 말씀하신 대로 황후 폐하의 돈인데 제가 무슨 권한으로 그러겠습니까.”
덤덤한 말 뒤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조슈아는 앞에 놓인 새우를 썰어 입에 가볍게 넣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비앙카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이혼하렴. 그럼 이 이상 건들지는 않으마.”
그에 조슈아가 일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놨다.
“제가 여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말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따랐던 건 멍청해서도 착해서도 아닙니다.”
봄바람이 부는 듯 온화한 목소리. 하지만 이상하게도 비앙카는 그 안에서 날카로움을 느꼈다.
“그저 맞서기 귀찮아서. 그뿐입니다.”
말이 끝나자 비앙카도 헛웃음을 뱉었다. 부드러움 속에 뾰족하게 세워져 있는 날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찌를 듯했다.
“결혼하래서 결혼을 하니 이제 와 이혼하라 압박을 넣으시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슬슬 짜증스럽네요. 유순한 아들을 원하신다면 이쯤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니?”
“그럴 리가요.”
조슈아가 차를 입에 머금어 삼킨 뒤 맑게 웃었다.
“폐하께 바라는 건 없습니다. 그저 알아 두셨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
“이번 무역 사업에 피어슨 가문이 만드는 물품을 넣어 타 제국에 판매할 예정입니다.”
이어지는 말에 비앙카의 입에서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조슈아는 지금 당신이 방해하는 일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폐하의 소중한 돈이 어디 쓰이는지 제가 무어라 말할 자격은 없겠죠. 그러니 저도 제 권한 안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분명 후회할 거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 뒤에 비앙카가 첨언했다. 매우 나직한 목소리였다.
“여자는 여자가 잘 아는 법이란다. 아리아드가 지금은 너에게 잘해 주는 듯 보여도 조만간 네 곁을 떠날 거야. 내 말을 명심하렴.”
그에 가만히 미소를 그리던 조슈아의 눈매가 뻣뻣이 섰다.
“그것 또한 제가 판단하고 감당할 문제이니 그쯤 해 두시지요.”
서로 선은 넘지 말자고 단호히 그어 내리는 모습에 비앙카가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놨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입맛이 없어져 더 이상 못 먹겠구나. 맛있게 먹고 가렴.”
내리깔린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차갑게 돌아섰다.
항상 그랬듯 마음은 이와 같이 날카롭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대한 것은 그저 아들을 위해서, 다 제 아들을 위해서였다.
그로 인해 애정은 몽땅 지워 버린 관계가 되어 버렸지만.
* * *
차갑게 살결을 베는 바람 위로 태양 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현란한 악기 연주는 삼 일째 이어졌다. 그 연주를 흘려들으며 휴온이 중얼거렸다.
“기사들은 축제를 즐기지도 못하는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저 파티의 참가자는 자신이었는데. 순식간에 뒤바뀐 위치에 조금 씁쓸해졌다. 그러한 씁쓰레함을 다 삼키기도 전에 기사단장이 검의 손잡이로 그의 머리를 툭 쳤다.
“조용. 저하께서 오신다.”
단장의 말과 함께 시선을 옮기자 길쭉한 장신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조슈아 매킨리, 가까이에서는 처음 마주하는 남자. 뚜벅뚜벅 걸어오는 자태는 여유로움과 동시에 위압감을 풍겼다.
“휴온 칼리우드.”
제 앞에 서 이름을 혀로 가볍게 굴렸을 뿐인데도 우아함이 묻어났다.
그에 휴온은 곧바로 깨달았다. 아리아드를 사랑함에도 감히 그와 대적할 수 없는 위치임을. 그저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 인사하는 것에서 멈추라고, 머리가 본능적으로 그리 경고해 댔다.
“이번 시험에서 아쉽게 탈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위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휴온은 어리둥절했다. 아쉽게 탈락하다니? 심사를 봐주던 사람은 이 터무니없는 실력으로 지원한 것에 기가 찬다고 했었다.
“비루한 실력임에도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못 해도 일단 감사하다고 뱉고 봤다. 뒤이어 휴온은 제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손길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그 큼지막한 손에 들린 건 매킨리 황실의 금빛 문양이 수놓아진 장검이었다.
“잘 벼린 검입니다. 이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검술을 좀 보고 싶으니 검을 드세요.”
저보다 낮은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상냥한 미소에 휴온은 앞으로 자신이 섬길 주인이 이와 같이 따뜻한 사람임에 감동했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검을 잡았다. 그러자 조슈아도 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칼날에 얼굴이 일그러져 비쳤다. 동시에 조슈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챙, 서늘한 소리와 함께 검이 붙어 섰다.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이어진 공격에 휴온이 당황해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그와 함께 다시 날 선 움직임이 이어져 몸은 계속 비치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고운 얼굴과는 상이하게 남자의 힘은 거셌다. 힘껏 버티던 휴온은 결국 검을 놓쳤다. 멀리 날아가 내동댕이쳐진 검과 같이 휴온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변에서는 모래 먼지가 잔뜩 일고 있었다.
곧이어 목에 차가운 칼날이 닿는다.
“저런.”
위에서 의미 모를 탄식이 들려왔다.
목에 닿아 있던 칼은 살결을 살짝 베고 떨어졌다. 스친 부분에 핏방울이 맺혔다.
휴온은 숨을 거칠게 내쉬다가 얼굴을 들었다. 위에 놓인 남자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가 있었다.
“많이 부족하네요.”
냉정한 평가에 휴온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자책이 이어졌다.
“그래도 연습을 많이 한다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좌절하지 마세요.”
하지만 들려오는 나긋한 어조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손끝과 둔부가 아림에도 벌떡 일어나 앞으로 모실 주인을 바라봤다.
“실망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리를 푹 굽히자 위에서 선선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래요.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조금은 장난스러운 언성.
“이대로라면 전쟁터에서 죽기 딱 좋을 테니까.”
그럼에도 이상하게 서늘함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