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27화 (27/120)

Chapter 27

똑똑.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소희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놀라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창문 앞에 선 남자가 유리창을 다시 두드렸다.

앞에 서 있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긴 했다. 나무우듬지에 앉아 위태롭게 창살을 잡고 매달려 있었으니까.

“아리아드 님, 저예요!”

난데없이 목청을 높이는 휴온을 보며 소희가 다급히 입술에 곧게 핀 검지를 붙였다. 잘못했다가 조슈아의 측근인 시녀가 들이닥치면 낭패였다.

소희는 어쩔 수 없이 또 네발로 기어 창문이 있는 벽면에 도착했다. 거리가 꽤 멀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어여쁜 드레스를 갖춰 입고 땅을 기는 그녀를 지켜보던 남자가 죄송스럽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들어가고 싶은데 창살이 너무 단단하네요.”

커다란 창문에 길게 늘어선 열 개의 쇠창살을 휴온이 힘주어 당겼다. 여러 번 흔들어 댄 끝에 힘이 빠졌는지 이내 그는 포기했다.

소희가 창문을 열어 남자를 제대로 마주했다.

“왜 왔어요. 미친 거 아니야?”

제정신이 아니란 듯이 바라보자 감청색 짙은 눈썹이 더 비스듬히 내려간다.

“좋은 소식이 있어서 들려 드리고 싶어서요. 단지 그뿐이에요.”

“좋은 소식?”

“아리아드 님을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웰시코기를 떠올리게 하는 귀여운 얼굴이 맑게 웃다가 다시 저 혼자 우울해졌다. 표정 변화가 다채로웠다.

“아, 그렇다고 해서 아리아드 님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냥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이라도 행복하니까요.”

소희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에 대한 단순한 이유는, 너무 귀여워서. 하지만 그 눈빛에 휴온은 다른 생각을 가진듯했다.

“혹시… 지금 이렇게 찾아오는 행동도 부담스러우시다면 그만둘게요. 죄송해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연분홍빛 입술을 오므렸다.

부담스럽냐고? 전혀.

다리만 괜찮았다면 일어나서 개다리춤이라도 출 수 있을 만큼에 기쁨이었다.

이 마음을 곧게 표현하자니 조슈아의 얼굴이 또 선히 그려져 말을 아꼈다. 데온에 이어 내 연예인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네요. 두 번 다시 이렇게 찾아오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산뜻한 남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리고 그와 같이 남자의 목소리도 처량하게 흔들렸다. 소희는 뱉어 낸 가시들이 돌아와 다시 제 가슴에 푹푹 박히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제가 휴온 님을 미워하는 건 아니에요. 이런 모습을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휴온 님을 걱정해서 하는 소리예요.”

이거야말로 진심을 가득 담은 말이었다. 그에 휴온이 금방 다시 행복한 미소를 그렸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이렇게 착한 사람이 다 있나.

소희도 팬 서비스를 받는 느낌에 행복해했다. 핑크빛 즐거움에 젖어 가며 현실을 잊고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서 아까 말했던 좋은 소식이라는 게 뭐예요?”

그에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희한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제가 기사직 시험에 합격했어요. 그것도 황태자 저하 직속 기사로요!”

“…네? 황태자 저하? 황태자? 조슈아?”

핑크빛 즐거움이 가시고 남아 있는 건 당혹감뿐이었다. 소희가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뇌며 묻자 휴온이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아리아드 님을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합격 되었다고 전달받자마자 거처를 황성 안으로 옮겼어요. 멀리서라도 아리아드 님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네요.”

홀로 행복감 속에 헤엄치는 남자를 두고 소희는 상념에 빠졌다.

이게 단순히 우연인가. 우연도 무슨 이런 무서운 우연이 다 있단 말인가.

“운명의 장난이야, 뭐야.”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기엔 조슈아라는 남자의 특징이 거슬렸다. 그 소름 끼치는 치밀함.

그런데 견제를 한다 하면 제 직속 기사로 뽑아 가까이 둘 이유도 없지 않은가? 소희는 나름대로 합리화를 하며 행복 회로를 돌렸다. 그냥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고.

그때 문득 어여쁘게 접혔던 조슈아의 눈매가 생각났다.

‘나 혹시 실수한 거 없지?’

‘없어. 실수한 거.’

알 수 없는 찝찝함은 가시지 않고 여전했다.

“어후, 뭐지. 뭘 놓치고 있는 거 같은 이 이상한 기분.”

“네?”

사념에 빠져 중얼거리는 소희를 바라보며 휴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려오는 귀여운 중저음에 얼굴을 가볍게 흔들어 불길함을 떨쳤다.

“아니에요. 저도 자주 볼 수 있다니 기쁘네요.”

이대로 대화만 하는 담백한 관계로 지낸다면 조슈아가 그를 건드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래서 소희는 그저 이 기쁨을 즐기고자 했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현실적인 문제도 처리하고.

“휴온, 자주 보는 김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내일 치러질 반델리 재판에 관한 정보.

“네, 뭐든. 정말 뭐든 하세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게는 큰 기쁨이니까요.”

그래,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니 괜찮을 거야.

소희는 막막한 전개 속에서 결국 휴온이라는 패를 꺼내 들었다.

* * *

황금빛 돔 형태의 지붕에 쨍한 햇빛이 반사되어 눈을 찔렀다. 그에 로잘린과 에리카는 건물 밖을 나와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더 심히 구겼다.

“소문이 뭐 잘못된 거 아니야?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사이가 엄청나게 좋아졌다더니.”

“그러니까 말이야. 어쩜 저렇게 무심할 수 있지. 내가 보기엔 아리아드 님은 전혀 마음이 없어 보여.”

“하, 뭐 좋은 방법 없어?”

황후가 켈리를 끼고 축제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뒤로부터 그들은 점점 초조해졌다. 왜 하필 켈리냐며 두 눈에 쌍심지가 서서 욕을 해 댔었다.

그리고 결국 훔쳐 읽던 비장의 무기인 일기장을 꺼내 들었는데.

비장의 무기는 개뿔. 아무 반응도 없잖아.

로잘린이 짜증스럽게 공책을 구겨 햇빛을 가리고는 중얼거렸다.

“비앙카 매킨리는 저무는 태양이라잖아. 너무 초조해하지 말자고. 우리는 차기 황제의 부인인 아리아드만 노리자.”

“그래서, 언니는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연주가 흘러나오는 건물 모퉁이, 금발의 여인이 벤치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로잘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방법. 뭐 그건 이제 만들면 되지.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거야 순식간이 아니겠어?”

그늘진 곳에 들어서자 로잘린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가 벤치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 뒤를 에리카가 졸졸 쫓았다.

“켈리, 쉬고 있었나 보네. 황후 폐하의 시녀인양 열심히 시중을 들더니. 축제 기간에 아주 고생이 많구나.”

로잘린의 빈정거림에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것 없는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매번 찾아오는 지겨운 손님을 보는 듯한.

“이거 가져가.”

그 앞으로 로잘린이 들고 있던 공책을 대충 던졌다. 툭 떨어진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켈리가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이걸 왜 언니가.”

“그러게 잘 숨겨 뒀어야지.”

잘게 떨려 오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로잘린이 새빨간 입술을 삐죽 올렸다.

“아주 인상 깊게 읽었어. 눈물 나는 짝사랑을 하고 있던데. 마음이 아파 어쩌니.”

안쓰럽게 쳐다보면서도 이죽거리는 어투에 옆에 서 있던 에리카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흙바닥에 떨어진 공책을 주우려고 다가서는 손이 멈췄다. 로잘린의 구두가 불쑥 다가서 그 공책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켈리. 똑같은 짓은 반복하지 말자.”

“…뭐?”

“정부의 딸이 또 정부가 되는 거. 그거 너무 추잡스럽잖아.”

들려오는 비아냥거림에 켈리는 그녀와 눈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푸른 눈망울은 공책 위를 밟고 서 있는 뾰족한 구두코만 응시했다.

“널 받아 준 유레시아 가문 사람들에게 죄송스러워서라도 그런 짓은 하면 안 되지. 차라리 성을 떼고 집을 나가든가. 난 그럼 네가 더러운 사랑을 한다고 해도 참견할 생각 없어.”

틀린 말이 하나 없어 반박하지 못하는 것에 입속이 퍼석하게 말라 갔다.

“그런데 그렇게는 못 하겠지? 넌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아이니까.”

그리고 그 기운은 서서히 내려가 목도 타들어 가게 했다.

“사람이 제 주제는 잘 알고 살아야지, 켈리.”

“….”

“안 좋은 소리 한다고 우리를 욕할 것도 없어. 내가 뭐 틀린 말 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정말 널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잘 포장한 말속에 뾰족하게 날 선 괴롭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켈리는 제 드레스 천만 꽉 잡고 있었다.

“더러운 피를 이어받는 거. 그거 너 하나에서 이만 끝내자. 유레시아 이름을 달고 더 이상 우스워지지 말자고.”

에리카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로잘린은 공책에서 제 구두를 떼어 냈다. 그리고 그들은 한층 후련해진 마음으로 돌아섰다.

켈리는 여전히 짓밟혔던 표지 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하트를 그려 넣어 꾸민 앞부분은 찢겨 너덜거렸다. 그게 또 잔뜩 밟힌 제 마음과도 같았다.

바짝 말라 가는 속이 그저 로잘린의 독설 때문일까.

아니, 켈리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더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은, 그 남자의 정부라도 되고 싶은 너절한 제 마음 때문이었다.

* * *

오늘도 밤은 찾아온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새까만 어둠이 드리운 방 안에서도 단번에 여자를 찾아냈다.

“…왔어?”

인기척에 잠들어 있던 소희가 눈을 비볐다. 그리고 일어나 앉아 기지개를 쭉 켰다. 자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아리아드의 몸에 처음 빙의했을 때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영 이상한 몸 상태에 꿍얼거리다가 어느새 제 앞까지 와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는 남자를 바라봤다.

오늘은 탄탄한 몸 위로 짙은 남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겉옷을 벗어 원목 의자에 걸쳐 둔 조슈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에 시원한 향기가 코끝에 훅 들어찼다.

“하루 종일 뭐 했어?”

“뭐 하긴. 심심해하다가 잤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소희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안겨 있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남색 제복이 휴온의 머리 색과 같아 문득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누굴 만났는지 모르겠지? 그럼, 알 턱이 없지.

그리 단정 짓고는 안심하고 있는데.

“오늘 란돌프 공작이 찾아왔다며.”

“란돌프? 란돌프가 누구야?”

별생각 없이 뱉어 낸 질문에 조슈아의 널찍한 가슴이 살짝 떨어졌다.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어조가 이어진다.

“너희 아버지.”

“아.”

말려 올라가는 남자의 입꼬리를 보며 소희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아버지 이름도 모르는 딸이라. 이거 꽤 엄청난데.

“자고 일어났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

이마에 작은 손을 붙이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나날이 연기력만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위에서 조슈아의 의미 모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진다.

“유레시아 자매들도 찾아왔다며. 사람들하고 무슨 이야기 나눴어.”

분명 엄청 다정한데 어째 불길했다. 소희는 하나하나 방문객들을 읊는 조슈아의 말에 속이 뜨끔뜨끔했다. 이러다가 휴온 칼리우드 이름까지 나오겠는데.

“…그, 별말 안 했어. 그냥 소소한 근황 이야기?”

대충 얼버무리자 조슈아가 그녀의 턱을 살짝 잡고 올렸다. 한 뼘의 틈새만 남겨 놓고 두 눈이 마주하다, 뒤이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거뿐이야?”

뭘 알고는 이러는 건지.

느슨하게 이어지는 묘한 긴장감에 소희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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