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
어둠이 가시고 어슴푸레한 박명의 시각이었다.
조슈아는 복도의 나 있는 창으로 희미하게 올라오는 하늘의 색깔을 훑으며 천천히 걸었다. 집무실의 문틈 사이로 빛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메이컨이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를 정리하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저하, 오셨습니까.”
조슈아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는 진갈색 가죽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오른편에 놓인 검은색 만년필 잡고는 펜촉으로 테이블 위를 툭, 툭, 가볍게 쳤다.
규칙적이고 경쾌한 리듬이었다.
그를 오랜 시간 봐 온 메이컨은 그에 익숙했다. 무언가 고민이 있을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손짓을 멈춘 조슈아가 서류를 정리하는 메이컨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아리아드의 생일이 여름이었죠, 아마.”
“네, 8월쯤 생일 날짜에 맞춰 무도회를 성대하게 여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조슈아가 턱 끝을 까딱였다. 그리고 잡고 있던 펜대를 다시 움직였다.
툭, 툭, 툭.
다시 시작된 일정한 박자에 따라 그의 뇌가 작년을 떠올렸다.
별관 입구를 둘러싼 휘황찬란한 장식물들. 아치형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보랏빛 머리카락 위에 사람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하얀 깃을 세운 여자가 걸어 나왔다. 관능적으로 딱 달라붙은 새빨간 드레스에 그 색감을 똑 닮은 입술.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조슈아를 보고는 천천히 기울어진다.
“왜, 너도 잔소리하려고 왔니?”
울긋불긋 다채로운 보석들을 두르고 있어도 아리아드의 화려한 얼굴은 그 틈에서 유독 빛났다. 그 아름다운 모습조차 조슈아에게는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했는지 그 앞에 선 얼굴이 무감하기만 했다.
아무런 낯빛도 띠지 않은 남자를 마주하고서도 아리아드는 그저 태평히 웃어 보였다.
“안 그래도 방금 전에 황후 폐하가 와서 어찌나 잔소리하던지.”
“….”
“매킨리 가문의 돈을 펑펑 쓴다니까 그게 참 아니꼽나 봐.”
그들의 옆으로 시녀들이 거대한 얼음 석상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것을 천천히 훑던 아리아드가 다시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내 심보가 아주 삐뚤어서 안 좋은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더 그렇게 하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결심했어. 죽기 전에 이 가문에 있는 돈은 내가 다 쓰고 죽으려고.”
그에 조슈아가 무성의한 미소만 설핏 띠었다.
“그래, 어디 한번 네 마음껏 해 봐.”
조슈아의 구둣발이 아무런 미련 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지독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공간을 성큼성큼 벗어났다.
그 옆으로 훤칠한 남자 한 명이 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지나쳤다. 그 남자는 입구에 서 있는 아리아드를 반갑게 꽉 껴안고는 입을 맞췄다.
툭, 툭, 툭.
반복되는 소리 끝에 메이컨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하, 이 서류는 이쪽 서랍장에 정리해 두겠습니다.”
허공을 가만 응시하던 흐릿한 초점이 돌아왔다. 붉은 눈동자가 이내 선명해지고 테이블 위를 반복적으로 치던 소리가 멎었다.
그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여태 남아 있는 뭉근한 감촉.
이내 모든 것이 과거에서 벗어나 또렷해진다.
“메이컨, 혹시 얼마 전에 황궁에서 기사직 시험을 치렀나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서류를 정리하던 메이컨이 허리를 폈다.
“네, 황제 폐하 직속 기사를 뽑았습니다.”
느릿하게 속눈썹을 내리깐 남자가 검지와 엄지를 맞부딪혀 튕겼다. 탁, 그 또렷한 소리가 귓가에 내리꽂힌다.
“탈락자 중에 휴온 칼리우드라고 있을 겁니다. 제 직속 기사로 추가 합격 시켜 주세요.”
* * *
추수 감사제로 황궁의 밖도 왁자지껄했다. 길게 늘어선 장과 각종 곡예. 이는 오롯이 황성 안에 거주하는 서민들을 위한 잔치였다.
“내가 묘사를 기막히게 해 놨는데. 실제로 어떨지 궁금하네.”
소희는 그저 그 들뜬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제 술을 마시고 해롱거린 덕인지 조슈아는 동행하는 것을 강경하게 거부했다.
그렇게 쌩하니 사라진 남자의 자리를 아련하게 바라보다가 소희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답답해 죽겠네.”
이제 남은 시간이 참으로 무료하겠다고 예상했는데.
“아리아드, 부탁이 있단다.”
이게 웬걸, 그 예상은 아주 크게 벗어났다.
아리아드를 찾아온 첫 번째 손님이 있었다.
그녀와 똑 닮은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원목 의자에 앉았다. 우묵하게 들어간 눈가 밑으로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수심에 차 있는 낯빛이었다.
“너를 억지로 결혼시켜 놓고 내가 참으로 염치가 없지만….”
남자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눈치를 계속해서 보는 것이 아버지와 딸의 사이가 좋지 못했나 싶기도 하고. 거기까진 작가인 소희도 모르는 설정이었다.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경쾌한 목소리에 남자는 목을 조르고 있던 타이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주름진 입가를 만지다가 말을 이었다.
“그… 사업이 갑작스레 난항을 겪고 있단다.”
피어슨 가문이 주력으로 미는 사업은 사치품 판매였다. 본래 광활한 영지를 바탕으로 튼실한 말을 키워 판매했고, 그것으로 크게 성장해 아리아드의 아버지 때부터 향수, 드레스, 액세서리를 더 화려하게 가공해서 팔았다.
그렇게 피어슨 가문이 거의 이 시장을 독점해서 돈을 쓸어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난항이라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만 황후 폐하께서 투자하고 있던 돈을 모두 회수하셨단다. 꽤 큰 금액이었는데…. 그리고 몇몇 가문에다 이야기해 두었는지 연락망도 끊기고….”
근심 섞인 말을 듣자마자 소희가 혀를 찼다.
딱 보니 각이 나왔다. 아리아드를 끌어내리려고 작정을 한 것 같은데. 사교계의 여왕인 그녀가 귀족들에게 입소문을 내 피어슨 가문의 사업을 방해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던 남자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마지막 본론을 꺼냈다.
“아리아드, 네가 황후 폐하께 도움을 청해 줄 수 있을까.”
“…예?”
“내가 계속 만나고 싶다 요청을 드려도 무시를 하시니 어쩔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나마 안면을 트고 있는 사람이 아리아드 너뿐이라…. 염치없지만….”
고생을 많이 한 거 같은 차갑고 투박한 손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소희의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부탁한다.”
질끈 감고 있는 주름진 눈매를 살피다가 소희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망할 황후가 이러는 이유가 아리아드 때문이라는 걸 여기서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반역죄로 피어슨 가문 사람들이 모두 죽는 길은 피하니, 또 진창으로 가는 험난한 길이 펼쳐졌다.
아무 대답도 없자 남자가 눈을 뜨고 간절하게 바라봤다. 고뇌가 깃든 눈망울을 보니 소희는 속이 답답해졌다. 부모에게 버려진 소희의 제일 약한 부분을 제대로 파고드는 전개였다. 그에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덥석 하고야 만다.
“…네. 일단 말이라도 해볼게요. 기대는 마시고….”
이야기를 꺼냈다가 욕이라도 처먹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어두운 미래를 그리다가 앞에 앉은 남자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퍼지자 그저 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입꼬리를 떨면서 아주 어색하게.
그렇게 남자가 나가고, 심란한 마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두 번째 방문자들이 들이닥쳤다.
“안녕하세요, 아리아드 님. 처음 뵙겠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유레시아 가문의 로잘린이고, 이쪽은 제 동생 에리카입니다.”
“엥?”
소설 속 악녀들이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등장했다. 주황빛 머리카락을 곱게 말아 올린 여자들에게서 코가 아릴 정도로 진한 향수 냄새가 났다.
소희가 콜록거리자 협탁 위에 있는 티슈를 로잘린이 급하게 빼 들었다.
“여기요.”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듯 티슈를 건네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져 있다.
뭐지? 이 소설의 전개를 도통 감을 잡기 힘들단 말이야.
소희가 복잡해진 머리를 애써 굴리다가 티슈를 받아 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 물음에 에리카가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거기엔 누렇게 해진 공책이 들려 있었다.
“저희가 이걸 읽고 얼마나 기겁했는지, 아리아드 님께 바로 말씀드려야겠다 싶어 이렇게 들고 왔습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기겁씩이야.
이리 말하는 걸 보면 아리아드에게 썩 유쾌한 공책은 아님이 분명했다. 소희가 조금 긴장감 있게 공책을 받아 들고는 너덜거리는 표지를 넘겼다.
한 장, 한 장 읽어 갈수록 고조되었던 긴장은 팍 식어 갔다.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이잖아.
흥미를 잃어 가는 듯한 아리아드의 표정에 두 자매가 다급히 외쳤다.
“아리아드 님, 조금 더 넘기시면 엄청난 게 나옵니다.”
소희는 속독으로 읽어 내려가다 공책을 가볍게 덮었다.
이 공책의 정체는 다름 아닌 켈리의 일기장이었다. 이제야 이들이 왜 이리 호들갑을 떨었는지 이해가 갔다.
일기장 안에는 대개 조슈아에 대한 마음을 빼곡하게 기록한 것들로 가득했다. 그가 오늘 입은 옷 스타일, 표정, 그리고 조금 더 용기 내자고 다짐하는 켈리의 절절한 마음까지. 빽빽하게 차 있는 반듯한 글씨들만큼 커져 가는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뭐, 아리아드에게나 봉변이겠지만, 이 일기장을 직접 만든 소희는 심드렁했다.
“아, 잘 봤어요.”
태평한 대답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일기장을 건네자 두 자매의 연주황색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네?”
“잘 봤다니까요. 글을 참 잘 쓴다. 그죠?”
누가 썼는데, 오홍홍.
일기장 안에서도 감출 수 없는 유려한 필력에 내심 뿌듯해하며 소희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에 앞에 서 있는 여자들은 더 미궁 속으로 빠져 가는 낯빛이었다.
로잘린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입을 뗐다.
“저, 그, 제대로 읽으신 거 맞죠? 켈리 이 여우 같은 계집애가 감히 설 자리도 구분 못 하고 과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데…. 정말 괜찮으세요?”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던가. 이들은 황후의 예쁨을 받고 커가는 켈리의 입지를 느꼈는지 몰라도 조금 다급해 보였다. 한 명의 아군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뭐, 저는 괜찮아요. 짝사랑하는 마음이야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니까요.”
이제 켈리의 마음은 별 위협이 되지 못했다. 조슈아는 확실하게 아리아드에게 빠져 있으니까.
남의 일을 대하듯 가볍고 무심한 어투에 로잘린과 에리카가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이내 어깨 위에 실망감을 잔뜩 얹고는 축 늘어져 방 밖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소희가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리고 푹신한 이불을 꽉 껴안았다.
“어후, 또 졸리네. 요즘 왜 이러지?”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느른하게 감겨 왔다. 이제 잠이나 다시 자 볼까 생각하며 두꺼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들어 올렸을 때.
똑똑.
창가에서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그에 이불을 잡고 있던 손이 허공에서 방황하다가 멈춰 섰다.
창문에 붙어 있는 세 번째 손님.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정체를 확인하고 소희의 콧구멍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