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25화 (25/120)

Chapter 25

조슈아는 침실로 와 그녀를 침대에 내렸다.

고새 온몸이 더 벌게지고 두 눈은 풀려 있고, 술을 잔뜩 마신 낯이다.

내려놓았는데도 여전히 제 목에 팔을 두르고 있어 그는 침대에 앉아 허리를 굽혔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눈망울이 방 안에 드리운 햇살을 담고 더 뇌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애달는 마음에 목울대가 꿀렁이자 조슈아가 만면에 자조를 띄웠다.

더러운 놈.

실소를 머금었다가 앞에 있는 탐스러운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조슈아.”

그때 술에 취한 여자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그를 불렀다.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푼 여자가 가볍게 그의 가슴을 툭툭 쳤다.

“너 때문에 아직도 개아파. 짜증 나.”

웅얼거림에 조슈아가 다시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귀여워.”

그에 아리아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얼굴에는 바보 같은 천진한 웃음을 담고 있었다.

“너는 확실히 미쳤어. 아리아드에 미친놈이야.”

“맞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지금 제 모습은 예전의 자신이 봐도 미친놈이라고 할 정경이니까.

갑작스레 아리아드의 오른손이 그의 뺨을 잡았다.

“아리아드를 향한 너의 사랑. 음, 너무 대단해.”

갑자기 사랑이라는 단어를 계속 되뇌던 여자는 웅얼거리다가 이상한 말을 툭 던졌다.

“사랑…. 휴온 칼리우드 너무 사랑스러워. 개귀여워.”

“…뭐?”

휴온 칼리우드. 그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 꽉 틀어박힌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술주정하는 아리아드를 바라보다가 조슈아가 한쪽 눈썹을 크게 치켜올렸다.

“걔가 누군데.”

“내 이상형…. 최애….”

그것으로 말끝이 흐려지더니 아리아드의 몸이 오른편으로 기울었다. 그에 조슈아가 급히 상반신을 잡아 침대에 눕혔다.

베개 위로 라벤더 향을 담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흐트러졌다. 그의 손가락이 그것을 자분자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머리에 맴도는 단어를 밖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휴온 칼리우드.”

* * *

브릭스는 어느 사교모임에 참여하든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말주변이 좋고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이 알고 있으니 사담을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여느 때처럼 파티의 분위기를 즐기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의 옆은 시끄럽다며 같이 놀자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인간이 무슨 일인지 행차를 다 하셨다.

“저하? 무슨 일로?”

쿠션에 느른하게 기대앉아 있던 상체가 놀라움에 꼿꼿이 세워졌다.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자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얼굴을 붉히고 힐끔거렸다.

아, 역시 짜증 나는 조슈아. 입은 내가 열심히 털고, 호감은 저놈이 다 가져간다.

“물어볼 게 있어서.”

“뭘?”

“휴온 칼리우드가 누구야.”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앞으로 조슈아가 테이블 위에 놓인 샴페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뭐 속 타는 일이라도 있나 봐.”

“휴온 칼리우드가 누구냐고.”

아주, 지 필요할 때만 찾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브릭스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칼리우드 백작가 둘째 아들이잖아.”

“누가 지금 가문을 몰라서 물어?”

조슈아가 새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차분한 어조였지만 그를 오래 봐 온 브릭스는 거기에 짜증이 잔뜩 담겨 있는 게 느껴졌다.

물어보는 자의 태도가 참 거만하기도 했다.

“뭐가 궁금한데?”

“뭐 하는 놈인지.”

“아직 딱히 하는 일은 없는 거 같던데. 황실 기사직에 관심이 있는지 얼마 전에 시험을 봤대. 그런데 몸 쓰는 일에는 재주가 없어서 바로 탈락했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

세부적인 정보에 조슈아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갔다. 원하는 정보였는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던 얼굴에 갑작스레 즐거움이 깃들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몸을 돌리는 걸 보며 브릭스가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배은망덕한 자식.

때마침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 온 여자가 있었다.

샹들리에 조명을 담은 금발이 화려해 브릭스는 단숨에 시선을 빼앗겼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오롯이 그 여인만 보였다.

켈리가 조슈아의 앞에 섰다. 조슈아는 방향을 틀어 그대로 지나치려는 걸 그녀가 다시 막아섰다.

그제야 그가 켈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자신을 내려 보는 눈빛에 압도되어 켈리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입술을 뗐다.

“…저기, 혹시 쿠키는 괜찮았나요?”

“쿠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무감한 표정, 설명을 더 요구하는 거 같은 눈초리에 켈리의 눈시울이 설핏 떨렸다. 당혹감에 손가락이 곱아들어 하얀색 드레스를 꽉 틀어잡았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브릭스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저걸 저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이야. 그도 함께 동공을 잘게 떨고 있었다.

일순 메이컨이 다가와 조슈아를 부르자 일이 생긴 듯 빠르게 켈리를 지나쳤다.

드레스에 달린 레이스를 꽉 잡고 있던 여자가 사람들 틈 사이에 껴 있는 브릭스를 정확히 주시했다.

그는 그 푸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선명히 읽었다.

짙은 원망.

그대로 뒤돌아서는 발걸음에 허탈함이 묻어 있었다.

조금 전 상황을 돌아보다가 브릭스가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였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안 처먹었지.

* * *

몰려오는 두통 속에서 소희가 눈을 떴다.

그리고 깜깜하게 내려앉은 방 안을 보고 당황스러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게 말이 돼?”

시간이 삭제됐다. 그것도 순삭.

“아이고, 소희야. 네가 잠을 처잘 때냐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 사이로 창 너머에 부엉이 우는 소리가 자꾸만 신경을 더 긁어 댔다.

혼란스러운 틈에서 시간과 더불어 삭제된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혼몽한 기억은 조슈아가 자신을 안아 드는 것에서 끝이 났다.

“그러고 그냥 잔 건가?”

그렇겠지. 그래야 해.

소희는 제 술주정을 잘 알았다. 쓸데없는 말을 주절주절하는 야속한 주둥아리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끊긴 필름 속에서 분명 그대로 잠을 잔 거여야만 한다.

“결국 파티에서 이뤄 낸 건 아무것도 없고.”

최애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끝.

소설 진행을 위해 자신이 한 일이 뭔지 자책감이 끝없이 몰려와 이불 밑으로 얼굴을 푹 묻었다. 그렇게 계속된 자책 끝에, 방문이 열리고 어슴푸레 번지는 빛과 함께 조슈아가 들어왔다.

“깼네.”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대고 결국 소희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나 혹시 실수한 거 없지?”

“실수?”

“술주정 같은 거.”

“아.”

그의 눈매가 어여쁘게 접혔다.

“없어. 실수한 거.”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 말을 끝으로 조슈아가 항상 그랬듯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그리고 소희의 어깨에 겉옷을 둘러 주고 방 밖을 나섰다.

“뭐야, 우리 어디가?”

“밤에 놀아 준다고 했잖아.”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유유하게 걷는 발걸음에 맞춰 그저 스치는 풍경들을 구경했다. 궐 밖을 나와 그는 한참을 걸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듯 잎이 다 떨어져 텅 비어 버린 나뭇가지들. 몇 개 켜져 있는 조명 사이, 잔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가지들을 살피다가 다시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잔잔하게 풍겨 오는 밤공기와 그에 썩 어울리게 섞여드는 민트 향. 그리고 얼마 안 가 몰려오는 바람 속에 실린 물 내음에 얼굴을 들었다. 눈 앞에 펼쳐진 호수, 그는 그 호숫가 근처에 있는 별채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커다란 내부를 천천히 훑다가 소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뭐 하고 놀아?”

“글쎄.”

분명하지 않은 대답과 함께 어둠 속에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조슈아는 테라스의 손잡이를 잡았다.

별채 안에 은은하게 자리했던 피톤치드의 향을 벗어나자 가을바람과 함께 호수의 내음이 코끝으로 스몄다.

“와.”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을 보니 감탄만 나왔다.

구름 하나 없는 밤하늘에 펼쳐진 별 무리와 보름달. 그리고 그것을 오롯이 담고 있는 물의 표면. 조명 하나 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반짝였다.

그 아름다운 정경에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호수에 비친 달의 그림자만큼이나 아름다운 눈동자가 놓여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예뻐서.”

낮은 목소리로 선선하게 말을 던지자 소희의 얼굴이 벌게졌다. 왜 남의 얼굴을 보며 예쁘다고 하는데 내 가슴이 설레는지.

“무,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해.”

“그럼 어떻게 해. 요란이라도 떨어야 하나.”

“그런 말이 아니잖아.”

괜한 부끄러움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조용히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호수를 다시 눈에 담다가 문득 이 테라스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자신이 소설 속에 넣었던 장면 중 하나였다.

호수를 앞에 두고 첫 키스를 하는 조슈아와 켈리.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리아드가 정말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생각에 헤실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들려 온 폭죽 소리가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있던 소희를 일깨웠다. 까만 하늘 위로 화려한 빛깔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매년 축제의 날,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들은 조슈아에게는 너무도 익숙해서 지루한 것들인지라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이 처음인 소희에게는 신기한 일들이었다.

밤하늘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소희에게 조슈아가 문득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넌 생일이 언제야.”

“생일? 3월… 아니지. 너는 내 생일도 몰라?”

소희는 아무 생각 없이 현실에서의 제 생일을 뱉어 놓고 아차, 싶어 급히 말의 방향을 바꾸었다. 조연의 생일까지 기억할 리 없는 작가는 조금 초조해졌다.

다행히도 조슈아는 날짜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해 왔다.

“생일에는 뭐 했어?”

“…파티를 했지?”

“무슨 파티?”

아니, 왜 이렇게 집요하게 물어본담.

죽음을 맞이할 조연의 생일 파티 따위 기록해 둔 적도 없기에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소희는 얼른 대화 주제를 바꾸기 위해 대충 얼버무렸다.

“그때 너도 왔었잖아. 너도 와서 축하해 줬으면서 왜 그렇게 물어봐.”

“내가 갔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럼! 너 그때 와서 나한테 선물도 주고….”

“내가 뭘 줬더라.”

“그, 그때 내가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아서 가물가물하네. 아, 근데 날씨 진짜 좋다.”

부인의 생일이면 당연히 조슈아도 참석했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대충 둘러댄 말이었다. 그리고 소희는 고개를 휙 돌리고 다시 화려한 불꽃들이 수 놓인 밤하늘을 괜스레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자 조슈아가 피식,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 남자는 그 애매한 대화 속에서 굳이 이상한 점을 짚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손으로 소희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펑펑, 귓가에서 폭죽 소리가 크게 울리고 두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오래도록 유지된 고요함 속에서 소희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기분 나쁘지 않은 긴장감과 발끝에서부터 찰랑거리며 차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

이야기는 소희가 써 놓은 대로 진행됐다. 조슈아는 가까워졌고 그 좁혀진 틈으로 소희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입술이 닿았다.

펑펑, 소희의 머릿속에서도 폭죽 소리가 울렸다.

호수를 앞에 두고 키스를 하는 조슈아와 아리아드. 이것은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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