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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24화 (24/120)

Chapter 24

사랑에 빠진 자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결국 조슈아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 줬다.

자꾸 그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이 생기긴 하지만, 그럼에도 어쩌겠어.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캐릭터를 막 죽이려고 하는데.

그렇게 계획대로 착착 파티장에 도착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하나 있었다.

“…제발 나 좀 내려 주면 안 돼?”

단지 그냥 부축을 받아 오려고 했건만, 조슈아 이 남자는 기어코 그녀를 안아 들고 있었다.

홀 안에는 하얀 식탁보 위에 갖가지 진수성찬들이 차려져 있고 그곳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저마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어 뽐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고상해야 할 매킨리 가문의 남녀가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들어서자 식장이 웅성거렸다.

“…저하가 미쳐 있다는 여자가 아리아드였어…?”

“저런 경박한 모습으로….”

웅성거리는 사이에서 좋지 않은 단어들이 조금씩 섞여 들려왔다. 그녀의 귀에도 들리니 이 남자도 당연히 들릴 터인데 곱고 여유롭기만 한 낯빛은 여전했다.

소희가 조슈아의 귀에 속삭였다.

“내려 주는 게 너의 명성에 좋지 않을까?”

“네가 내 명성도 신경 썼어?”

“당연하지.”

“그럼 여태 왜 그랬어.”

말싸움의 승리자는 항상 조슈아다. 죄 많은 아리아드는 입을 다물 수밖에.

결국 그렇게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홀 중앙을 걸었다. 소희는 민망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조슈아가 방석이 깔린 푹신한 의자 위에 그녀를 내려놨다. 그 옆 테이블에는 소희가 좋아하는 달콤한 디저트들이 트레이 위에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때 마침 메이컨이 가까이 와서 조슈아에게 스케줄을 읊어 주었다.

“앉아서 먹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십 분이면 돼.”

좋아, 혼자 남겨진다.

소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천천히 와. 나 신경 쓰지 말고!”

위에 놓인 조슈아의 머리가 갑작스레 비스듬히 내려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너무 활짝 웃었나.

드러냈던 이를 입술 밑으로 감췄다. 그런 소희를 지켜보며 조슈아가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응?”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저기 호위 기사를 세워 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

흐릿한 대꾸에 조슈아가 소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가리켰던 자리를 응시하자 정말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 한 명이 구석에 서 있었다.

불안은 무슨. 네가 불안한 거겠지.

“진짜 치밀하다니까.”

입맛을 쩝 다시고 우글우글 모여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훑었다.

몇몇의 여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아리아드를 힐끔거리며 숙덕이고 있었다. 그에 소희가 눈을 피하지 않고 뚫어져라 응시했다.

팍씨, 뭘 꼬라봐.

타오르는 눈망울에 여인들이 시선을 피하며 자리를 옮겼다.

“좋아, 소희야. 쫄지 마. 어차피 소설이야.”

아리아드를 안 좋게 보는 분위기에 압도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휴온을 찾기 위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근데 얼굴도 모르는데 어느 세월에 찾지. 인물 묘사라도 좀 써 놨으면 도움이 됐을 텐데.

막막한 상황에서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였다.

“저기, 아리아드 님.”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어왔다.

그 음성을 따라 고개를 돌린 소희는 너무나 깜짝 놀라 감탄사를 뱉었다.

“헐?”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컴퓨터 배경 화면, 벽에 붙여 놓은 포스터, 심지어 팬 미팅까지 갈 정도로 혼자서 절절히 사랑했던 배우.

“이게 꿈이야, 생시야.”

“네?”

“아니, 깜찍하신 그대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소희의 이상형은 귀여운 남자였다. 조슈아와 데온 같이 조각처럼 생겨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얼굴 말고. 살짝 뭉뚝하게 생긴 현실적인 남자. 그런데 현실에서 훈훈하다고 불리는 그런 얼굴 말이다.

귀엽게 생긴 남자가 만면에 당혹감을 담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소희는 그저 신이 나서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점점 벌게지더니 눈을 피한다.

“…저, 아리아드 님. 저를 기억 못 하세요?”

“오잉,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아예 기억을 못 하시는군요.”

실망감에 젖은 눈시울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그 주변에 눈물이 차올랐다.

귀여운 강아지를 닮은 남자가 울려고 한다.

“왜, 왜! 왜! 왜 울어요.”

소희는 너무도 당황스러워 눈물이 고인 얼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눈물을 살짝 훔친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휴온이에요. 하룻밤만 보내고 정말 저를 잊으셨나 보네요.”

“…어?”

휴온 칼리우드. 정보통으로 쓰려고 찾던 남자가 제 눈앞에 있었다.

“아, 아! 생각났다. 하하.”

어색하게 웃자 휴온이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깨가 축 처졌다.

“기억 못 하시는 거 다 알아요.”

“아니, 제가 사실….”

소희도 그와 같이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말을 고르다가 입을 뗐다.

“제가 많이 다쳤어요. 머리를 부딪혔는데, 그게 기억상실로 좀 이어져서….”

꽤 그럴듯했다. 이마에는 아직 흉터가 남아 있으니까.

휴온이 놀라서 얼굴을 반짝 들어 그녀를 찬찬히 훑었다.

“어, 정말 많이 다치셨네요. 목에 상처도 많으시고. 어떡해요.”

저런, 목의 상처는 다른 종류의 것인데.

소희는 갑자기 밤에 일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죄송해요. 그런지도 모르고 너무 다그쳤네요.”

다시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고여서 붉어진 눈매가 귀엽게 호선을 그렸다.

“그날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결국 안 오셔서 저를 그냥 버리셨다고 생각했어요.”

“허어, 그럴 리가. 버리다니요.”

“그런 게 아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싱긋 웃는 쌍꺼풀 없는 눈을 가만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리아드, 너 아주 좋은 삶을 살고 있었구나. 이 몸에 빙의한 내 자신 너무 칭찬해.

입술을 씰룩이며 변태같이 웃고 있다가 뇌리에 스친 현실적인 생각에 입매를 굳혔다.

맞아, 나 얘 이용하려고 했잖아.

고개를 휙 돌려 조슈아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아직 오는 낌새는 안 보이는데.

아리아드가 고개를 돌린 방향을 같이 흘깃 살핀 휴온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눈길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저, 휴온. 부탁이 있는데요.”

“네네! 뭐든 말씀하세요.”

“빨리 가세요.”

“…네?”

“빨리 딴 데로 가시라고요.”

엑스트라니까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말자고? 웃기는 소리.

소희는 단시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좋아하는 배우와 똑 닮은 사람을 이용해서 궁지로 모는 미친 여자가 절대 아니었다. 그냥 차라리 휴온이 아리아드의 몸에만 환장하는 쓰레기 같은 캐릭터였으면 이런 죄책감이 덜 할 텐데.

갑작스러운 단호한 언성에 휴온이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바라봤다.

“제발, 제발 빨리 일어나서 저 멀리 가세요.”

귀염둥이야,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슬프지만 보내 줄게.

마음 한구석에 홀로 아련함을 느끼며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데. 이 남자가 자리를 꼿꼿이 지키고 앉아서 절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왜,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다시 벌게진 눈시울.

장내에 웅성거리는 소음이 커졌다. 힐끔 살피자 조슈아를 둘러싼 인파가 몰려오고 있었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그의 턱 끝이 서서히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기류를 보이자 소희가 더 다급해졌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요!”

그리고 옆에 앉은 남자를 한 손으로 계속 밀었다. 휴온의 몸이 휘청거리다가 결국 서러운 얼굴을 하고는 일어났다.

“오늘도 절 이렇게 밀어내시네요.”

“아니, 밀어내는 게 아니라 살려 주는 거예요!”

그녀가 억울해하며 옆에 서 있는 기다란 몸을 최대한 힘 줘 밀었다. 그러자 휴온이 순순히 등을 보이고 걸어갔다.

그 등짝이 처량하게 처져 있었다.

소희는 그 뒷모습에 대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미안하다. 잠시라도 행복했다.

사람들 틈 사이로 사라진 휴온을 보며 안도하다가 다시 조슈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그녀 쪽으로 완전히 시선을 굳힌 채 걸어오고 있었다.

못 봤겠지? 딱히 찔릴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심장 부근이 서늘했다.

“미안, 조금 늦었지.”

휴온이 앉아 있었던 자리에 조슈아가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를 마신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래서, 사람 구경은 많이 했어?”

“응, 했지.”

내 최애의 얼굴을 구경했지.

정보통은 사라졌지만 나쁘지 않은 소득이라고 위로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앞으로 마카롱을 든 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왜 하나도 안 먹었어.”

“아, 까먹고 있었다.”

마카롱을 받아 들고는 입에 구겨 넣으니 목이 턱 막혔다. 긴장감에 너무 쑤셔 넣었나. 옆에 앉은 남자가 딱히 뭐라 한 것도 아닌데 혼자 찔려서 난리였다.

소희는 목이 타서 옆에 놓인 음료를 마셨다. 그때 마침 조슈아의 동공이 커지며 음료를 마시고 있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뭐야.”

목을 타고 내려오는 열감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아리아드, 이거 술이야.”

“어? 아 그래? 뭐 어때. 나 술 잘 마셔.”

병나발도 부는걸.

“너 못 마셔.”

“응?”

“너 못 마신다고.”

내가 잘 마신다는데 왜 저래?

소희는 어리둥절 해했다. 잡혀 있는 손을 빼내려고 힘을 줬지만, 남자의 악력 덕에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래.”

조슈아가 잔을 뺏어 들었다.

“아리아드, 너 예전에 보드카를 물인 줄 알고 마셨다가 식장에서 쓰러졌잖아.”

“…엉?”

작가 당사자도 모르는 그런 스토리가 있었단 말이야?

지금 보니 목부터 시작된 열감이 온몸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심지어 시야가 좀 뿌옇게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이거 한 모금 마셨다고 이렇게 되다니.

일단 정신을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붙잡고 있을 수 있었던 건, 너무도 당혹스러운 이 순간 때문이었다.

조슈아가 그녀를 가만히 주시하다가 또 붉은 입술을 열었다.

“술에 깨서 시녀들한테 화냈잖아. 왜 거기다가 보드카를 뒀냐고. 기억 안 나?”

“어… 맞다, 맞다. 기억났다, 하하.”

바보같이 웃으며 무마하려 하자 조슈아가 피식거렸다. 그리고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불쑥 가까워지자 소희는 더욱 선명해지는 열기를 느꼈다.

바로 앞에 놓인 해사한 얼굴의 입술이 비스듬히 말려 올라간다.

“거짓말이야.”

“…뭐?”

“술에 깨서 화낸 적은 없어.”

뭐 하는 놈이지, 이거.

억지로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반면에 그 앞에 있는 남자는 여유로운 낯을 하고 있었다.

소희는 그게 너무 당황스러워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부딪히면서 기억이 조금 소실되어서. 하하. 내가 지금 좀 왔다 갔다 해.”

술기운으로 인해 앞에 놓인 남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틀렸다. 어지러운 시야로 조슈아의 입매도 조금 비틀려 보였다. 그저 미소 짓는 건지, 비웃고 있는 건지. 도통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상체를 좀 휘청거리자 조슈아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자 시원한 체취와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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