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23화 (23/120)

Chapter 23

복도 끝, 금발의 여인이 계단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브릭스는 많은 이들의 정보를 섭렵한 호사가였다. 그랬기에 앞에 있는 여인의 이름을 당연히 알았다.

유레시아 가문의 셋째 딸. 이름이 켈리였나?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는 여자는 앞에 있는 브릭스를 힐끔 쳐다보고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그대로 지나치려는 순간 브릭스가 그 앞을 막아섰다.

어리둥절해하며 살짝 갸웃거린 켈리가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브릭스도 그녀와 같이 움직였다.

“…먼저 가세요.”

켈리가 복도 구석에 붙어 섰다. 그와 같이 동선을 옮겨 둘은 또 마주 섰다.

“할 말 있으세요?”

못마땅해하는 표정. 좁혀 든 눈썹을 보아하니 첫인상을 그리 좋게 남기지는 못한 듯했다.

“어디로 가는지 알 것 같아서. 조슈아를 보러 가는 거면 지금 가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어째서요.”

“제가 방금 들어갔다가 쫓겨났거든요.”

“아….”

켈리가 고개를 숙였다. 컬이 진 연노란색 머리카락이 목둘레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머리카락들 사이로 짙은 멍이 보였다.

그걸 천천히 훑던 브릭스가 입을 뗐다.

“그 상자, 제가 전달해 드릴까요.”

그 말에 한참을 고민하는 듯했다. 금빛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상아색 페도라만 시야에 보이던 차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상자를 건넸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여름 바다를 닮아 청량하게 반짝이는 파란 눈망울. 순하게 꺾이는 눈매. 사과같이 싱그러운 얼굴.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들은 류트 연주같이 고운 미성이 이어졌다.

상자를 받아 든 브릭스가 계단을 내려가는 켈리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큼지막한 손으로 리본을 풀어 안의 내용물을 살피니 갖가지 모양의 쿠키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재수 없는 조슈아.”

미인들을 독차지하는구만.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의 주변으로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는 이는 물론,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선물을 쉼 없이 전달하는 여인들까지. 대부분이 줄을 서서 관심을 바라 왔다.

“저런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 뭐가 좋다고. 성격도 더러운데.”

괜스레 심통이 나서 투덜거리던 브릭스가 제 손에 들린 리본을 대충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안에 든 쿠키의 포장을 찢어 입에 넣었다.

전해 주긴 개뿔.

전해 봤자 어차피 조슈아는 아리아드에게 다 갖다 바칠 게 뻔했다.

마음을 표현해 봤자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데.

“그럴 바엔 들키지 않는 게 낫지.”

브릭스가 쿠키를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여전히 그의 손엔 커다란 상자가 들린 채였다.

그렇게 한 여자의 정성은 오늘도 전해지지 못했다.

* * *

가을의 막바지에는 항상 축제 준비로 북적거렸다. 황후의 탄신을 축하하는 파티와 추수 감사제가 겹쳐진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첫째 날 아침.

“아리아드, 몸이 아파서 고생이 많구나.”

여전히 쌀쌀맞은 비앙카의 눈빛을 피하며 소희가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덕분에 축제 준비를 아무것도 돕지 못해서 마음이 불편하겠어.”

이거 약간 돌려 까는 것 같기도 하고.

소희는 아리송한 기분으로 앞에 놓인 음식만 대충 주워 먹었다.

옆에 앉은 조슈아가 그녀의 접시 위로 멀리 있어 닿지 않는 음식을 올려 줬다.

황제, 황후와 같이하는 식사 자리에서도 이 남자는 그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직접 먹여 주려 했다. 그에 소희는 기겁하며 거절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세심한 친절에 괜히 주변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나는 몸이 안 좋아 먼저 일어나겠네. 즐거운 시간 갖게.”

주름이 깊게 진 황제의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다. 그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소희는 그 모습을 살피다가 자연스럽게 건너편에 앉은 켈리를 바라보게 되었다.

매킨리 사람들만 있는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있는 불청객.

황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입지를 다지는 여주인공의 설정은, 현재 아리아드인 소희에게 굉장히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내가 짠 스토리가 이렇게 내 발목을 거치적거리며 잡을 줄이야.

한숨을 쉬며 저도 모르게 켈리를 빤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든 그녀와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엉망으로 마무리됐던 집무실 사건 이후로 마주한 첫 번째 자리였다. 완벽하지 못한 계획으로 인해 조슈아에게 밉보이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켈리의 눈망울에서 원망의 기운이 옅게 흐르고 있었다.

그건 참 유감.

소희가 그 시퍼런 눈망울을 마주하고서 조용히 사과의 뜻을 전달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준비하던 사업이 하나 있단다.”

비앙카의 목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옮겼다.

“프랭클린 제국의 첫 여성 학교를 위한 준비였지. 12월 초에 개교를 하고자 하는데, 세부적인 관리와 개교식을 준비할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소희도 아는 내용이었다.

비앙카 매킨리는, 비교적 모든 면에서 힘을 갖지 못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사업을 진행하는 꽤 멋있는 캐릭터였다.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멋진 지도자.

물론, 아리아드에게는 그저 까칠하기만 한 시어머니였지만.

“그래서 켈리, 네가 대표로 좀 도와줬으면 하는구나.”

“네? 제가요?”

동그래진 켈리의 눈동자만큼이나 소희의 눈도 커졌다.

아니, 시놉시스에서 저건 황태자비가 하는 역할이었는데?

물론 짜 놓은 설정에서는 아리아드는 이미 죽어 없고, 황태자비는 켈리였다.

“그래, 네가 야무지니 잘 할 수 있을 거 같구나.”

소희는 이쯤 되니 자신이 황태자비인지 켈리가 황태자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는용?”

아리아드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프랭클린 국제 학교가 만들어지고 나면 개교를 앞서서 도왔던 황태자비의 이름 또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게 소희가 여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고 만들어 놨던 설정이었다.

그런데 이걸 켈리가 그대로 가져가게 둘 순 없지 않은가.

“저의 도움은 필요 없으신가요?”

그에 비앙카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아, 아리아드. 너도 해야 할 일이 있지.”

그래,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라고 해도 방치가 웬 말이냐.

“켈리의 보조로 개교식 준비를 도우렴.”

“엥?”

소희는 저도 모르게 의문을 표했다.

“그냥, 그냥 보조요?”

“그럼 멍청한 네가 보조 말고 뭘 할 수 있겠니.”

와씨, 이젠 대놓고 깐다.

괜히 분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조용히 듣고만 있던 조슈아가 끼어들었다.

“굳이 아픈 사람이 도울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서로 닮은 듯 닮지 않은 붉은 눈동자가 첨예하게 맞부딪쳤다.

“그 정도 아픈 걸로 유난이니 무서워서 뭘 시키지도 못하겠구나.”

“황후 폐하께서 아프실 때 그런 말씀 들으시면 참 좋으시겠습니다.”

우아한 목소리와 고상한 몸짓들 사이로 날카로운 문장들이 오갔다. 그에 괜히 소희가 눈치가 보여 끼어들었다.

“…그만하시고, 도울게요.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뭐 그때쯤이면 다리도 다 나아 있을 거 같고.”

“굳이 할 필요 없어.”

조슈아가 옆에 있는 그녀를 돌아봤다.

“아니,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그만 싸워 너희 엄마랑.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조슈아가 아리아드를 감싸면 감쌀수록 비앙카의 눈 속 불꽃은 더 활활 타올랐다.

단호한 소희의 말에 그제야 옆에 앉은 남자는 과보호를 멈췄다.

“나도 이만 파티 준비로 일어나 봐야겠구나.”

비앙카의 예리한 시선이 거둬지고 켈리와 함께 다이닝룸을 나갔다.

식당 안에 조슈아와 둘이 남게 되자 소희가 말문을 떼었다.

“나 때문에 너무 날 세우지 마. 그래도 어머니잖아.”

조슈아가 그녀의 입가에 묻은 토마토소스를 엄지로 닦아 냈다.

“딱 봐도 괴롭히려고 그러는 건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새하얀 얼굴 위로 설핏 짜증이 올라왔다. 그에 소희가 씩 웃어 보였다.

“괜찮아. 나 혼자서 잘해. 괴롭히면 갚아 준다, 두 배로.”

손가락 두 개를 척 들어 보이자 조슈아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소희를 부드럽게 안아 올렸다.

“씩씩하고, 귀엽네.”

이내 깃털 같은 어조가 귓가를 간질였다.

* * *

아침 식사 후, 조슈아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소희는 침대에 앉아서 앞으로 꼭 해야 되는 일을 떠올렸다.

“내 소설… 잘 써지고 있을까….”

스토리를 직접 짠 작가라지만 이미 많은 게 뒤틀려 버린 지금, 가진 정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기껏해야 인물의 성격을 알고 있는 정도랄까.

데온을 일단 살리기라도 하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반델리의 재판이 어찌 돌아가며, 그걸 어떻게 이용하는지. 믿음직한 정보통이 되어 줄 사람을 구해야 했다.

“그런 사람 어디 없나.”

매킨리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아리아드가 이 안에서 그런 사람을 구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심지어 아리아드는 비중이 적은 조연이라 직접적인 이름이 거론되어 엮여 있는 인물도 많지 않았다. 고작 지금 떠오르는 게 데온뿐인데.

문득 소희는 스치는 이름 하나에 탄성을 뱉었다.

“맞아, 휴온 칼리우드.”

데온의 손에 빼앗겼던 편지가 떠올랐다.

“아리아드랑 몸을 섞은 건 분명한데.”

그날 그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퇴짜를 놓긴 했다. 데온한테 묶여 있어서 못 갔으니 고의는 아니었지만. 일단 확실하게 믿고 섭외할 수 있는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잘못 했다가 그 남자도 조슈아한테 찍혀서 죽을 위기에 처하면 어떡하지?

미간을 좁히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소희가 제 생각에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네가 지금 엑스트라까지 신경 쓸 때야? 너나 잘해, 한소희.”

어차피 아리아드가 아니었으면 소설 한쪽도 채우지 못할 엑스트라였다. 그러니 이용하는 거에 딱히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말자고.

“좋아, 일단 이번 파티에서 휴온을 찾아보자.”

그렇게 다짐을 하고 나름 최선의 방안을 택했다고 여겼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파티를 참석하고 싶다고 하는 소희의 앞에 단호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안 돼.”

맞네, 얘 지금 다 안 된다고 그러지.

조슈아가 깔끔한 검은색 정복으로 갈아입고는 침대에 앉아 있는 소희에게 다가왔다.

“아니, 왜 안 돼? 나도 놀고 싶어. 사람 구경하고 싶다고. 맛있는 거 먹고 싶어.”

“내가 밤에 놀아 줄게. 사람 구경은 다 나으면 하고. 맛있는 건 방으로 가져다줄게.”

뭐 이런 파워 디펜스가 다 있나.

끼어들 틈도 없는 철벽에 소희가 낙담했다.

“밤까지 혼자 있으라고? 말도 안 돼.”

절망 어린 중얼거림에 원목 의자에 자리한 조슈아가 소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어쩔 수 없어. 같이 간다고 해도 바빠서 네 옆에 있어 주질 못해. 그니까 방에 있어.”

“아니, 나 혼자 있어도 되는데?”

“안 된다고.”

대답이 점차 서늘해졌다.

“그럼 조용히 앉아 있을게. 파티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으면 되잖아.”

“앉아 있으면 이상한 것들이 꼬일 거 아니야.”

젠장, 이유가 그거였냐.

이번 파티가 끝나면 휴온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데온이 풀려나는 날은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고, 조슈아는 그사이에 끝장을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정보통을 구하는 것이 시급한데.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만.”

중얼거림에 머리를 쓰다듬던 조슈아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럼 삼십 분 정도 구경만 시켜 줘. 답답해서 그래.”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아리아드. 정말 최악이다.

자조 섞인 생각과 함께 남자의 눈을 최대한 아련하게 바라봤다. 그러자 조슈아의 잇새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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