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뜨거운 입술이 젖은 얼굴에 닿아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계속해서 오늘은 이만 가라고 했던 조슈아의 행동이 이쯤 돼서야 이해가 됐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었던 거였다. 그게 마지막 하나 남은 이성의 끈이었던 것일지도.
소희는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이로 씹힌 모든 곳이 쓰라렸지만, 제일 심히 통증이 오는 건 그가 억지로 벌렸던 두 다리였다. 그에 괜히 서러워서 앞에 놓인 가슴을 쿵쿵 때렸다.
“…너 나빠. 짜증 나 진짜.”
눈물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볼에 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붉은 눈동자 속 짙게 깔린 안개가 서서히 걷혀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니까 왜 자꾸 사람을 놀려.”
“내가 언제 놀렸어.”
“계속 놀리잖아. 사랑 타령하면서.”
“놀린 거 아니야….”
“마음도 없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건 놀리는 게 아니고 뭐야.”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소희는 제 작전을 모두 철회하기로 했다. 세뇌를 시킨다며 실없는 소리를 더 했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조슈아는 자신이 남긴 벌건 흔적을 찬찬히 쓸었다. 부드러운 손짓에도 닿는 곳이 모두 아려 미간을 팍 구겼다. 그러자 손가락이 멀어지고 위를 묵직하게 누르던 몸도 떨어졌다.
그는 침대를 빠져나갔다.
“어디가?”
궁금함과 더불어 안도감이 온몸에 퍼졌다. 아무 대꾸도 들려오질 않자 그저 몸이 축 늘어진 채로 눈을 감았다. 배 위에 잔뜩 구겨져 있는 슬립 원피스를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모닥불의 뭉근한 열기가 피부 위로 가득히 뒤덮일 무렵, 몸 위로 다시 익숙한 손길이 닿았다.
“…뭐야.”
축축한 기운에 눈이 뜨였다. 조슈아가 수건에 물을 묻혀 그녀의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자신이 수놓은 흔적 위를 부드럽게 닦아 냈지만 살짝 닿아 스치는 것에도 고통이 느껴졌다.
몸을 꼼꼼하게 다 훑고 나서야 그의 손이 멀어졌다. 그리고 벌겋게 흉이 질 것 같은 부분에 약도 발라 주었다.
역시, 확실히 병 주고 약 주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듯하다.
“하.”
상처가 너무 아려 낮게 한숨을 쉴 때쯤 조슈아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약통을 닫은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복부에 형편없이 둘려져 있는 슬립 원피스를 벗겨 냈다.
허리를 감싸 안아 일으켜 세운 뒤 하얀 가운을 상반신에 둘러 주었다. 사이즈가 너무 커서 끈을 단단히 동여매도 어깨 부분이 계속 흘러내렸다.
조슈아가 소희를 다시 침대 위로 눕혔다.
아까와는 너무 다른 다정한 모습에 괜히 또 왈칵 신경질이 났다.
“너 진짜 짜증 나.”
투덜거림에 그가 소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미안해. 아프게 해서.”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자 살갗에 뭉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조슈아는 다시 침대 옆에 섰다. 그리고 그 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다.
그가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힌 상체도 아찔하긴 마찬가지였는데, 손가락이 바지의 버클도 잡았다.
순간 너무 놀란 소희는 눈을 감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너 뭐 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의 바지도 내려갔다.
“나 원래 다 벗고 자.”
“어? 어제는 안 그랬잖아….”
“내 방이 아니니까.”
뭐지, 신종 괴롭힘인가.
혼란스러움 속에 속옷도 내려가 그의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완벽한 전라였다.
“미친 거야? 그러고 자겠다고?”
그제야 소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이미 볼 건 다 봤지만.
침대 위로 그가 눕는 것이 느껴졌다.
“야, 아니. 어딜 올라오는데.”
“여기 내 침대인데.”
덤덤한 말투가 이어지자 황당함에 콧김을 거칠게 뿜어 댔다.
아무렇지 않게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준 남자가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하반신까지 차마 다 덮이지 못한 가운 사이로 그의 맨몸이 느껴졌다.
이쯤 되니 다른 방식의 괴롭힘이 확실하다.
“…조슈아, 내가 미안해.”
“뭐가.”
조슈아가 반대편으로 돌아가 있는 소희의 고개를 가볍게 돌렸다. 소희는 밑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앞에 놓인 얼굴만 더 빤히 주시했다.
“그냥 다 미안해. 그니까 제발 옷 좀 입어 주면 안 돼?”
그러자 조슈아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장난기가 담긴 느른한 낯을 보니 살짝 짜증이 일었다. 아리아드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가운이라도 입자.”
아무런 대꾸 없이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이불 위로 다시 매끄러운 상반신이 보였다. 소희가 눈을 질끈 감자 조슈아가 그 모습을 살피며 옆에 놓인 가운을 둘렀다.
“왜 부끄러워해. 할 거는 다 해 놓고.”
“나 네 몸 처음 본단 말이야.”
생각해 보니 정말이었다. 관계를 가질 때 조슈아는 그녀의 옷만 다 벗겨 냈지 제 옷은 벗지 않았다. 바지의 버클만 살짝 풀었을 뿐.
“그러고 보니까 억울하네.”
또 샤워를 시켜 줄 때도 그는 아리아드의 몸을 실컷 봤겠지.
가운을 다 두르고 누운 남자가 허리에 묶어 둔 줄을 잡았다.
“벗을까? 다시 볼래?”
“악!”
외마디 비명에 조슈아가 키들거리며 웃었다.
소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흘기자 그는 그저 웃다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조슈아가 그녀의 등을 찬찬히 토닥였다. 분명 가운을 둘렀는데도 맨 살결이 닿은 듯 기분이 묘했다. 이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나지막하다.
“계속 같이 있어 달라고 했지.”
“응.”
“옆에 있고 싶으면 내가 뭘 하든 관심 가지지 마. 알겠지.”
첫 번째 말에는 쉽게 대꾸했지만, 두 번째 말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고개만 작게 주억거릴 뿐이었다.
등에 닿아 있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쓸어 가슴에 기대게 했다. 이내 위에서 내려앉은 목소리가 상냥하다.
“착하다.”
물론, 소희는 착하지 않았다.
* * *
오늘도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삭신이 더 쑤시는 게 이 세계에도 존재하는지, 온몸이 쓰라림과 동시에 두통이 일었다. 소희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곳이 피폐물임을.
완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한참 남은 거 같은데. 나 얼마나 더 굴러야 하니.
서류를 쥐고 있던 굵은 손가락이 소희의 이마에 닿았다.
“살짝 열나는 거 같은데. 침대에 가서 자자.”
소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수야 없지.
조슈아가 위에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당장 안 죽여. 그니까 가서 자.”
이 정도쯤 되니 둘 다 이판사판 느낌이었다.
소희의 속내를 다 아는 조슈아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그녀를 안고 반델리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메이컨과 나누었다.
무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재판으로 데온을 죽일 길을 찾은 건 확실하다.
그에 소희도 당당히 굴었다. 어제와 같은 일이 발생할까, 살짝 눈치를 보긴 했지만.
“아니, 네 옆에 있을래. 네 옆이 좋아.”
덧붙인 사탕발림과 함께.
조슈아는 그녀의 거짓됨을 알아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속아 주는 척 넘어갔다.
그가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코코아를 들었다.
“그럼 이거 먹고 소파에 누워.”
“싫어.”
“무슨 똥고집이야 이건.”
“그 정도로 안 아파.”
머리 위로 짙은 한숨이 내려앉았지만, 이 이상 그는 강요하지 않았다.
다시 종이를 잡은 조슈아의 팔에 갇혀 소희는 코코아를 호로록 마셨다.
* * *
브릭스는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희한한 소문을 듣고 저택을 나섰다. 이내 그가 도착한 곳은 조슈아가 있는 궁궐이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황태자가 여자에 미쳐 있다고 하던데.
도무지 믿기지 않아 제 눈으로 꼭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평생 공부와 일밖에 모르던 녀석이 여자에 미쳐? 차라리 제국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더 현실성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의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어이, 저하.”
목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리자, 의자에 앉아 있던 조슈아의 기다란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꼿꼿이 퍼져 있는 저 손가락이 뜻하는 건 조용히 하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브릭스는 그의 가슴에 기대 잠들어 있는 여인을 마주하자 아연실색했다. 모포에 둘둘 둘려 있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진짜, 이 나라가 망하려나 보다.
“뭐, 보모로 전직이라도 한 거야?”
목소리를 확 낮춰 중얼거려도 조슈아의 눈썹이 언짢은 듯 꿈틀댔다.
“중요한 이야기 할 거 아니면 나가.”
“이 기이한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데 나가라니.”
“나가.”
단호한 어투에도 브릭스는 그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여인의 옆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잘 아는 이였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알 정도의 유명 인사.
그녀와 몸을 섞은 남자들은 잘생김이 검증된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뒷소문이 좋지 않은 여자였다.
조슈아와 아리아드가 정략결혼을 했을 때 얼마 안 가 이혼을 하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의 더러운 행보를 매킨리 가문 사람들이 그저 지켜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 와중에 조슈아는 이 여자한테 무심해 보였다. 아내가 몸을 굴리고 다니든 뭘 하든 신경도 쓰질 않았다. 그래서 여자에 미쳐 있다기에 정부를 둔 건가 했더니.
소문의 주인공이, 아리아드 피어슨?
이게 무슨 일이야. 이건 미쳐 있는 것보다 더한데.
“벼락이라도 맞은 거야?”
그에 조슈아의 입술에 다시 손가락이 닿았다.
여자가 깰까 봐 계속해서 닥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래, 중요한 이야기만 하고 갈게.”
신기한 광경을 찬찬히 훑다가 소문의 실체를 보기 위해 들고 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갓 나온 따끈따끈한 정본데, 다니엘 매킨리가 막바지에 완전히 밀려서 몬트롤 지역을 빼앗겼다네. 아마 꽤 오랜 시간 그곳에 잡혀 있을 모양이야.”
나름 심각히 말을 이으며 재킷에 넣어 뒀던 담뱃갑을 열었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붙이려던 찰나.
“야, 집어넣어.”
“어?”
“담배 다시 넣어.”
브릭스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굳어 섰다.
“너 설마….”
아리아드 때문에 유난인 거야? 라고 물어보려다가 날카롭게 닿는 눈초리에 말을 삼켰다. 그리고 군말 없이 담뱃갑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늦바람이 더 무섭다더니.
황당함에 피식거리던 브릭스가 하던 말을 이었다.
“차라리 다니엘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도 너한테 나쁘지 않겠어.”
“딱히 신경은 안 쓰여서. 죽든 말든.”
무감한 말투에 혀를 내두르며 괴물 같은 남자를 한 번 더 훑었다.
그를 알게 된 건 아주 어렸을 때였다.
학창 시절 조슈아는 수석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학생이었다. 항상 코피가 터져라 공부를 해도 차석이었던 브릭스는 그때부터 저 남자의 괴물 같음을 똑똑히 알았다.
황태자로 주어진 일이 많아 공부를 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는 항상 앞서 나갔다.
하긴, 그렇게 우월한 남자가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을 리가.
“그래, 그래도 난 다니엘이 죽었으면 좋겠다. 그 새끼는 좀 음험한 구석이 있어. 느낌이 안 좋아.”
다니엘 매킨리는 조슈아의 형이자, 그와 황제 자리를 두고 싸우는 경쟁자였다.
조슈아 또한 앞과 뒤가 달라 재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지만. 다니엘의 능글거림은 더 토가 쏠렸다.
차라리 담백하게 예의를 차리며 뒤통수를 치는 조슈아가 낫다 싶을 정도로.
“알겠으니까 이제 조용히 하고 나가.”
“하.”
어이가 없어 브릭스는 실소를 하고 제 연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품에 있던 여자가 꿈틀거리자 조슈아는 종이를 내려놓고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계속 이어지자 그는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결국 닿는 매서운 눈초리에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실컷 사랑해라. 간다.”
브릭스는 발걸음을 떼었다. 괜히 뭐라 할까 싶어 집무실 문도 조심스레 닫았다.
제정신 아닌 남녀의 사랑이라.
나름 지켜보는 재미는 있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