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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21화 (21/120)

Chapter 21

빗방울이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오전부터 시작된 빗줄기는 밤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방 안의 온도도 낮아져 시녀는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소희는 진종일 혼자였다. 시녀의 부축으로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와, 진짜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조슈아와 마지막으로 본 게 무려 열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방에서 나가려고 돌아서는 시녀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네?”

“조슈아가 너무 보고 싶은데 침실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제발.”

시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돌아다니게 하지 말라는 명이 있긴 했지만 아내가 남편을 보러 가는 거야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머리를 계속 굴렸다.

그것을 눈치챈 소희가 더 간절히 시녀를 바라봤다.

“제발.”

궐에 아리아드의 편은 하나도 없다. 그랬기에 정보를 줄 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조슈아의 곁에 계속 붙어 있는 게 그나마 이 위기를 타개할 길이었다.

살짝 곤란한 기색을 보이던 시녀가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혼나면 어쩌죠.”

“괜찮아. 내가 잘 말해 볼게. 보고 싶어서 왔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결국 시녀는 그녀를 부축해서 걸어 나왔다. 거의 몸을 기대다시피 맡겼지만 그럼에도 땅에 닫는 다리가 아려 왔다.

계단을 올라 삼 층에 도착했다. 복도 벽면에 조명이 몇 개 켜져 있었다. 그 조명을 따라 걷다가 끝에 있는 방 앞에 다다랐다.

“고마워.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게.”

“네? 이제 어떻게 가시려…. 어머.”

문 앞에서 풀썩 엎드리자 시녀가 경악했다. 네 발로 걷는 거 같은 모양새가 나오자 그녀가 계속 소희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제발 체통을 지켜 주세요.”

“아니, 놔 봐. 괜찮다니까.”

자꾸 자신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 팔을 뿌리치며 앞에 있는 문을 두드렸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징, 없나? 들어가 있을 테니까 문 좀 열어 주세요.”

밑에서 자신을 올려 보는 소희를 보며 결국 시녀는 한숨을 쉬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혼자 방에 들어선 소희는 주변을 둘러봤다. 불을 켜 두지 않아 어두웠다.

아리아드의 방보다 훨씬 큰 면적에 화려한 가구들이 들어서 있고, 금빛 원형 카펫 위에는 킹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다.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니, 침대 위에 조슈아가 정자세로 누워 있다.

자나?

다리를 질질 끌며 기어갔다. 날씨가 꽤 서늘함에도 벽난로에 불을 지피지 않아 방 안이 전체적으로 추웠다.

침대 측면에 도착한 소희가 이불을 붙잡고 일어나려고 끙끙댔다.

“저기, 조슈아.”

겨우 다리를 세워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그에 침대가 전체적으로 출렁임에도 조슈아는 미동 하나 없었다.

아까의 복장에서 재킷만 벗어 둔 남자는, 여전히 바깥 활동을 했던 옷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리고 팔 한쪽을 두 눈 위에 올려 둔 채였다.

소희는 그를 흔들어 깨우려다가 말고 그냥 옆에 가만 누웠다.

흠, 괜히 왔나. 이렇게 일찍 잘 줄이야.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 때쯤.

“왜 왔어.”

조슈아가 눈에 붙이고 있던 팔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봤다.

뭐야, 깜짝이야.

“다리 다 나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니까.”

냉한 눈동자가 그녀를 훑어 내렸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지.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그렇게 말하자 조슈아가 소희를 끌어당겨 몸이 밀착되었다.

어둠 속에 내려앉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소희의 몸이 잘게 떨렸다. 방 안이 추워서 그런 건지 이 남자가 뿜어내는 기운이 싸늘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마주하고 있던 두 눈이 조슈아가 몸을 일으킴으로 인해 어긋났다.

“나중에 해. 방에 데려다줄게. 오늘은 그냥 가서 자.”

“아니, 아니. 잠시만.”

소희를 들어 올리려고 하는 팔을 꽉 잡자 큼지막한 손이 멈칫 세워졌다.

“진짜 중요한 이야긴데?”

글쎄, 또 실없는 이야기긴 했다. 조슈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아무 말 대잔치가 펼쳐질 예정이니까.

“진짜 안 들어도 되겠어?”

“내일 해.”

“잠시만. 나 네 옆에 있고 싶은데.”

위에 놓인 짙은 검은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그는 잡혀 있던 팔을 빼냈다.

차가운 몸짓에 소희가 다급해졌다.

“너랑 같이 자면 안 돼?”

그 말에 대한 대꾸는 없었다. 그는 소희를 내려 보다 갑자기 침대를 빠져나갔다. 어둠이 짙게 깔린 틈에 움직이는 커다란 실루엣을 보다가 그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네가 안 가니 내가 나가겠다, 뭐 이런 건가.

“그래. 간다, 가. 치사해서….”

갑자기 벽난로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주황빛이 돌기 시작한 벽난로 앞에 남자의 인영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가는 게 아니라 불을 피우려고 그랬던 거였다.

조슈아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열기가 은은히 퍼져 나가는 공기 중에 그보다 더 뜨거운 체온의 남자가 소희를 당겨 안았다.

“그래, 해 봐. 무슨 중요한 말인데.”

그는 한 손으로 제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고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게….”

뭐부터 말하지.

“일단은 나랑 계속 같이 있어 줘. 오늘처럼 방치해 두지 말고.”

그에 무감하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픽 웃음을 흘리는 게 비웃음 같기도 했다.

“왜, 데온을 언제 죽이나 감시해야 하니까?”

귀신같은 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외로워서 그러지. 하루 종일 너랑 있다가 혼자 있으니까 얼마나 외로웠는데.”

커다란 손이 그저 가만히 소희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긍정이야 부정이야 뭐야. 대답이나 하라고.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일단 제 잘못이 있기에 재촉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스킨십에 속눈썹을 잘게 떨다가 소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낮에 일은 미안해. 집무실에 멋대로 들어간 건 사과할게.”

“…사과가 잘못됐잖아.”

“응?”

“사과할 건 그게 아니지.”

아니, 사람을 죽이려는 걸 막은 건데 내가 그것도 사과해야 하니?

따지고 싶지만 약자는 참아야만 한다.

냉정한 어투와 눈빛에 눌려 소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열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지도 알겠어. 조슈아, 근데 난 정말 데온한테 마음이 없어. 네 옆에 쭉 있을 거야. 아리아드가 죽을 때까지.”

소희는 순간 제 말실수를 깨달았다. 남을 대하듯 또 삼인칭을 써 버린 것에.

하지만 그가 별말이 없자 안심하고 다시 실없는 소리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데온을 죽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거야. 난 네 손에 피를 묻히고 그런 건 싫다고.”

마지막 문장에 조슈아가 일소를 터뜨렸다.

뭐가 웃기지. 또 거짓말이 형편없었나.

“그리고….”

빤히 자신을 주시하는 붉은 눈동자에 순간 위축되어 말을 더듬거렸다. 역시, 거짓말을 못 하는 건 맞는 것 같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날 사랑하듯이 나도 널 사랑해. 그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또 한 번 세뇌시켜 주기.

말을 하면서 슬쩍 눈을 피했다가 다시 앞에 놓인 얼굴을 마주했다.

말려 올라가 있던 입가가 다시 일자로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새하얀 얼굴 위에 그 어떤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소희가 제 실수를 깨달은 건 그 순간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사랑?”

귓불을 만지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조슈아는 소희의 머리카락을 꼬아 잡았다.

“아!”

끌어 당겨진 힘에 의해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대로 그는 벌어진 입술 사이에 제 혀를 밀어 넣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거칠어 남는 건 고통뿐이었다. 뭉개진 입술 위로 피가 고였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맹렬히 휘젓고 깨무는 감촉에 소희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여태 그녀를 향한 스킨십은 모두 그저 배려였다는 듯, 흉포하게 파고드는 움직임이었다.

조슈아의 몸은 어느새 묵직하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벗어나고자 상반신을 계속 비틀자 그제야 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소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숨을 색색 내쉬었다. 그에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이 삐뚜름히 말려 올라간다. 마주한 붉은 눈동자가 물안개가 낀 듯 혼탁했다.

“그래, 아리아드.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사랑.”

“….”

“일그러진 얼굴이라도 갖고 싶은 게 사랑이라면. 그래, 사랑해.”

초점을 잃은 눈빛에 소희는 깨달았다.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고.

보랏빛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있던 손이 밑으로 내려가 그녀가 입고 있는 슬립 원피스를 찢었다.

새하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나자 당혹감에 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온종일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보는 것 같은 사나운 눈길이 닿았다. 그에 소희의 머릿속에 비상벨이 켜지고 다급히 조슈아를 밀어내려 했다.

“…야, 정신 차려.”

조슈아는 제 가슴을 밀어내는 그녀의 오른팔을 손쉽게 잡아 올렸다.

그 상태로 데온이 짓이겨 아직까지 퍼렇게 멍이 올라 와있는 곳에 제 입술을 뭉갰다. 그리고 그대로 살결을 집어 물었다. 또한 그의 오른손은 상반신의 여린 살결을 꼬집어 비틀었다.

“아, 흑.”

고통에 절로 눈물이 고였다. 목 언저리에 피가 맺혀서야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이어 낮게 중얼거리는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흐느끼는 얼굴이라도 갖고 싶은 게 사랑이라면. 사랑해, 아리아드.”

사랑 고백을 이라기에는 섬뜩하게 깔려 있었다.

가슴 밑 새하얀 살결을 배회하던 손길이 허벅지를 잡았다.

“잠깐만!”

다급한 목소리에도 그는 두 다리를 거칠게 벌렸다. 그에 다친 다리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조슈아가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 사이에 위치했다. 그리고 고개를 묻어 허벅지 안쪽을 집요하게 잘근잘근 씹어 댔다.

소희가 신음을 하며 몸을 비틀었다. 계속해서 바르작대는 움직임에도 거대한 남자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아프게 먹혀가는 감각을 느끼며 미간을 구기고 눈꺼풀만 바르르 떨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무의식중에 고였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을 제 흔적을 남기고서야 고개를 든 남자의 손길이 속옷 위를 선회했다. 또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는 손길이었다. 쓰라림과 더불어 느껴지는 자극에 등이 활모양으로 휘었다.

소희가 힘없이 늘어진 오른팔을 들어 속옷을 끌어 내리려고 하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움직임이 멈췄다.

조슈아의 눈동자가 물기 어린 얼굴로 향했다.

“…이제 그만해. 너무 아파.”

그 말에 하반신에 있던 그의 상체가 느릿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커다란 손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조슈아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핥아 삼켰다. 그리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은 게 사랑이라면. 사랑해, 아리아드.”

그 목소리의 끝이 열기에 젖어 잔뜩 갈라져 있었다.

다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흐릿하고 혼탁하다. 그에 소희는 끊임없이 후회 중이었다. 남자의 신경을 긁어 숨어 있던 악마를 깨운 게 확실했다.

소희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자 조슈아의 엄지손가락이 피가 맺힌 입술을 쓸었다.

한참을 내려 보는 눈길 끝에, 다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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