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20화 (20/120)

Chapter 20

“여기서 네가 뭘 했을까.”

“그… 그게….”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지자 말이 절로 뚝뚝 끊겼다. 숨이 막히고 쿵쾅쿵쾅 심장이 뛰어 댄다.

망한 걸까.

아니지, 아직 서류를 태웠다는 걸 모르잖아.

그가 아무리 똑똑한 머리를 가졌더라도 내가 모든 걸 다 꿰뚫고 막으려 한단 걸 어찌 간파할까.

모르겠다. 그냥 일단 뻔뻔히 나가?

“그니까….”

소희가 고개를 돌려 조슈아와 눈을 마주했다.

고요하고 차분한 눈동자, 웃음기 하나 없는 입매. 그녀를 가만 내려 보는 남자의 얼굴이 얼음 파편같이 날카롭게 빛났다.

역시, 너무나 잘 아는 그 표정.

“아무것도… 안 했는디….”

뻔뻔하게 나간다는 다짐과는 다르게 말을 더듬으며 멍청한 변명을 했다.

한 치의 움직임 없이 빤히 그녀만 주시하는 무감한 눈동자 앞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아무것도 안 했다?”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 깊은 분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희는 당황스러움에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이내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 흘렀다.

갑자기 조슈아가 그녀를 안아 들고 창가 옆 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벽에 그녀를 붙여 세웠다.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뭐 하는.”

마저 닫지 못한 창문 틈으로 날 선 바람이 몰려왔다. 화창하던 하늘에서 어느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조슈아가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창틀 밑을 검지로 천천히 쓸었다.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미처 나가지 못한 종이의 재들이 그 밑에 남아 그의 손가락을 까맣게 물들였다.

빌어먹을. 그걸 지켜보던 소희가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창문을 닫지 않음, 재를 깨끗하게 치우지 못함, 그 두 가지 실수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뭘까.”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조슈아가 몸을 더 가까이 붙이고 섰다. 벽과 그의 상반신 중간에 놓인 아리아드의 몸이 꽉 눌렸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시선을 피한 소희는 제 또 다른 실수들을 발견했다.

시야의 오른쪽에 보이는 건. 다 닫히지 못한 세 번째 서랍, 책상 한가운데에 있는 재떨이, 찻잔 또한 위치가 달랐다. 차마 정리되지 못한 물건들에 소희가 이를 꽉 물었다.

저 서랍이라도 닫으면 발뺌이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데 조슈아가 갑작스레 소희의 오른손을 잡아 올렸다. 이내 놀라 다시 마주한 얼굴에 묘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더니 손등에 입술을 맞추고 떨어졌다.

실수로 인해 불에 데여 빨갛게 달아오른 위치였다.

입가는 말려 올라가 있지만 여전히 눈은 무감해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고 소희는 깨달았다.

이미 조슈아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작고 낮게 울려 퍼졌다.

“어떻게 알았어.”

“…뭘?”

“종이.”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한 사람 앞에서 더 이상의 발뺌은 통하지 않았다. 워낙 머리가 좋은 남자는 흐트러진 공간을 대충 살피는 것만으로도 소희의 속셈을 알아챘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걸 보며 조슈아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제 알겠다.”

“….”

“네가 왜 그렇게 달콤한 말들을 해 댔는지.”

그 나지막한 말과 함께 벽에 붙어 있던 그녀의 몸을 떼어 내 다시 이동했다. 그리고 그녀를 테이블 위에 앉혔다.

보랏빛 눈동자에 곧게 꽂혀 있는 눈은 여전했다. 그는 밑을 살피지도 않고 살짝 열려 있던 세 번째 서랍을 발로 가볍게 밀어 닫았다.

“저기, 오해가 있는데….”

뭐라도 둘러대기 위해 달싹이던 입술이 뒤잇는 서늘한 말에 의해 굳게 다물어졌다.

“얼마나 힘들었어. 되도 않는 연기를 하느라.”

부드러운 어투와 함께 보랏빛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어내리는 손길에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연기가 아니라 마음은 진심이었고, 이건 별개의 일인데….”

머리카락을 쓸던 손가락이 그녀의 보얀 얼굴 위로 닿았다. 솜털 위를 천천히 움직이는 손짓이 부드러운 만큼 위협적이었다.

“아리아드, 속아 주려 해도 네 거짓말은 너무 형편없어. 얼굴에 다 보이거든.”

젠장. 그렇구나.

소희가 속으로 욕을 되뇌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조슈아가 반대편 손으로 메고 있던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그리고 칠흑빛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틈으로 적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이해해.”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서 난데없이 온화한 언성이 이어지자 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엉?”

“데온을 살리고 싶어 하는 너의 마음도 이해해. 그만큼 그를 향한 마음이 크다는 것도 알겠어.”

“아니, 아니. 진짜 그런 게 아니라. 마음하고는 관련이 없어. 데온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위해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끝맺음을 못 한 소희의 형편없었던 계획은 이와 같이 난감한 상황만 남겨 놨다.

그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럼에도 그 안에 담긴 핏빛 눈동자는 여전히 흉흉했다.

“그런데 아리아드, 네가 이번에 어떻게 알고 종이를 없앴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은 막기 쉽지 않을 거야.”

소희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다음? 이 서류 말고 다른 게 또 있다고?

“데온을 죽일 방법이 이것밖에 없을 거 같아?”

피식거리는 남자의 앞에서 그녀는 너무도 당황스러워 눈과 함께 콧구멍도 커진 채였다.

내가 짜 둔 건 여기까진데. 남자의 행동은 시놉시스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혼란에 빠져 멍해져 있는 소희를 그가 가볍게 들어 올렸다. 제복에 달린 금빛 휘장 탓에 평소와는 다르게 그 품이 조금 불편했다.

조슈아는 그저 여느 때와 같이 여유롭고 느긋하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덕분에 더 죽이고 싶어졌어.”

다정한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문장은 섬뜩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거야.”

실패한 계획 뒤에 남아 있는 건, 사납게 뒤틀린 남자의 심사뿐이었다.

소희가 조용히 깊은 숨을 내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두운 것이 제 소설의 미래와도 같았다.

* * *

방문이 쾅 닫히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 망할. 망할. 망할.”

침대 위에 혼자 남은 소희는 계속 탄식만 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평소와 같이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녀를 대했다. 하지만 더 이상 옆에 같이 있어 주지 않았다. 그녀를 침대 위에 올려 이불까지 상냥히 덮어 주고는 방 밖을 나서는 등짝이 유독 서늘했다.

“쟤 지금 단단히 화났는데 어떻게 하냐.”

계속해서 조슈아의 성난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대체 저 방법 말고 어떤 걸로 데온을 죽이겠다는 거지?”

종이를 다 태우고 벽에 걸린 시계를 살폈을 때 분명 회의가 끝나기 오십 분 전이었다. 남자의 빠른 등장, 그 와중에 아무것도 정리되지 못한 방 풍경이 실패의 요인이었다.

아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쉬울 것이라 생각한 제 자만심도 계획을 망친 요인 중 하나일 테지.

“왜 이렇게 똑똑한 남주를 만들어 놔서.”

그저 평범한 그녀의 머리로 그 속내를 살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미 모든 게 제 손을 떠나 멀리 날아간 뒤였다.

문득 소희는 창살이 달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뛰어내려서 현실로 돌아간다면 조슈아의 속셈을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그러고는 다시 아리아드의 몸을 살폈다.

“하, 여기서 뛰어내리면 다음 일은 어쩌려고.”

현실에서 알아낸다고 해도 다시 돌아와 더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막을 수 있을 방도가 없었다. 초반에 현실로 돌아가겠다며 계속해서 자살 시도를 했던 게 이제 와서야 후회가 됐다.

“그래, 다 내 업보다.”

지금 유일하게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부분은, 조슈아의 사랑.

아리아드를 향한 그의 사랑이 진심인 것은 알고 있으니, 제대로 용서를 빌면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싶은 것이 마지막 희망의 끈이었다.

그때 문득 조슈아의 단호한 목소리가 스쳤다.

‘속아 주려 해도 네 거짓말은 너무 형편없어. 얼굴에 다 보이거든.’

좋아한다며 실없는 소리를 해 대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태 속였다고 생각했던 건 그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다 제 뜻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조슈아의 손아귀 안에 있는 인간들 중 하나였다니.

그에 허탈감이 커다란 파도처럼 밀려왔다.

“멍청한 소희야. 머리 좀 제대로 굴려 봐. 네 소설이잖아.”

소희가 제 이마를 쾅쾅 내려쳤다. 살결이 벌게지도록 쳐도 좋은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 * *

반델리는 하루 만에 더욱 초췌한 낯을 하고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오며 내리는 비를 다 맞아 다갈색 머리카락이 형편없이 젖어 물미역처럼 흘러내렸다.

어제와 같은 자리, 한 명은 또 무릎을 꿇고 있고 한 명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은 위치였다.

한동안 차를 마시는 소리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뒤섞여 숨 막히는 침묵을 그나마 완화시켰다. 하지만 반델리에겐 이조차도 버거웠다.

“저하… 부르신 이유가….”

차갑게 내리꽂혔던 목소리에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던 어제. 하지만 조슈아가 다시금 자신을 호출했을 때 생겼던 그 작은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반델리의 초조한 목소리에 조슈아가 찻잔을 내려놨다.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엄중함에 그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얼마나 세차게 흔들어 댔으면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당신은 살려 줄게요.”

반델리는 그 말에 천장에 달린 조명이 더 밝아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의 고개가 살짝 올라갔다. 어제 제 손끝을 스쳤던 까만 구두와는 다른 하얀색 구두가 보였다. 순백의 구두코가 조명에 반짝이고 있었다.

조슈아의 발끝이 까딱이며 가볍게 흔들렸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정적이 흘렀지만 반델리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가 유리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놓고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에 반델리의 시선이 더 올라갔다.

“이 편지를 재판장에게 전달하세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두 손을 붙이고 있던 반델리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종이를 살폈다. 내용을 읽고는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편지지에서 시선을 떼고 앞에 있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져 웃고 있었다.

이제야 그 의도가 정확히 읽혔다.

“그리고 데온 필트모어한테 가서 전하세요.”

“무어라고… 전할까요….”

그 핏빛 눈동자에 남은 건 번들거리는 살기였다.

“조슈아 매킨리가 너를 죽이려고 판을 짜고 있다. 나는 협박을 당해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만 전달하면 될 것 같아요. 아주 쉽죠.”

그에 반델리가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였다. 살길이 생겼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지지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용을 읽고 나니 자신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느껴졌다. 이 남자 앞에선 설설 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도 뼈에 새겨 넣었다.

“재판 날 하셔야 될 말도 정해 드리겠습니다. 그대로 외워 말하세요.”

조슈아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있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메이컨이 들어왔다.

“메이컨, 후작님께 정보를 드리세요.”

그 말과 함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란 다리가 유유하게 응접실을 벗어났다.

맹수의 앞에서 겨우 살아난 것 같은 기분에 반델리가 허리를 펴고 급하게 숨을 골랐다.

그의 앞에 메이컨이 앉아 법정에 서서 해야 될 말을 짚어 주었다. 그에 반델리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진한 긴장감이 다시금 몰려왔다.

“이렇게만 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치고 싱긋 웃어 보이는 메이컨의 태도가 제 주인과 다를 바 없었다.

조슈아는 데온 필트모어를 죽이기 위해 촘촘한 거미줄을 짜 놓고 있었다. 결국 그 거미줄에 걸린 건 자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젠장, 여기서 나라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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