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9화 (19/120)

Chapter 19

“데온 필트모어, 반델리 포티어스, 루피안 피어슨…. 뭐야 이거.”

서류를 든 소희의 오른손이 잘게 떨렸다.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밑에 있는 구겨진 편지지 한 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데온 공작님, 반델리입니다. 저하께서 승인해 주지 않아 시행하지 못한 사업들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존경하는 공작님, 저는 저하의 역량보다 공작님의 능력이 더 크다고 믿습니다. 몇몇의 사업을 함께 시행해 나가는 동업자로서 공작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크다는 걸….]

소희가 짜 둔 설정 중 하나였다. 조슈아는 그들의 글씨체와 인장들을 똑같이 베낄 수 있는 전문가를 불러와 반역의 증거로 조작한다.

그런데 대체 언제 가져온 거지?

“망했다.”

소희가 콧구멍이 커진 채로 굳어 섰다.

못 가게 막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거야.

“이 치밀한 남자 같으니라고.”

소름이 돋아 팔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종이를 다시 서랍에 넣어 놓고 고민에 빠졌다.

원래대로라면 흘러가는 시놉시스를 막을 계획은 이러했다.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 옆에 붙어서 조슈아를 감시하다가, 데온의 저택에서 필요한 서류를 빼 오면 직접 그 종이를 찾아 태워 없앤다.

서류가 무엇인지 잘 알기에 어려울 것 없는 미션이었다.

하지만 지금 없앤다면? 그러면 누가 봐도 범인이 나잖아.

“아, 이럼 곤란한데.”

없애 말아, 없애 말아.

반복되는 고민으로 허무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세 번째 서랍에 하염없이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옮겨졌다.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지는 어여쁜 핏빛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만 담고 있었다.

“비스킷 먹을래?”

그 어떤 이보다 아름답게 웃는 남자. 그렇기에 해사한 얼굴 뒤 보이지 않는 이면이 더 어둡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마카롱도 있어.”

자신을 다시 안아 올리는 따스한 품에서 소희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고민했다.

나, 데온을 살릴 수 있을까?

* * *

보살핌만 받고도 하루는 빠르게 지나갔다. 진종일 앞으로의 전개를 고민하는 탓에 다른 무엇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깊은 늪에 빠진 것 같던 그녀의 앞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역시 이렇게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지.

“매달 첫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회담. 와 내가 왜 이걸 생각을 못 했지.”

소희는 아리아드의 방에 혼자 있었다. 매일 같이 붙어 있자고 한 게 서류를 없애는 데 더 큰 장애물로 작용했는데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이 생긴 것이다.

현재 있는 궐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가 있었다.

황제가 주최하는 것이기에 조슈아도 어쩔 수 없이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스케줄이었다.

“그렇다면 집무실은 비어 있을 거고.”

회의가 진행되는 시간은 오전에 두 시간. 그렇다면 집무실 또한 두 시간이 빈다는 말씀.

기회가 생겼지만 움직일 수 없는 두 다리와 감금되어있는 아리아드.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산 아리아드에게 도움을 줄 친구가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지로 만든다.”

강건한 중얼거림과 함께 노크 소리가 울렸다.

창살에 스며든 햇살같이 화려한 금발 머리를 가진 여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무슨 이유로 부르신 거죠.”

아리아드의 호출에 불려온 켈리가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이틀 전 신경전을 벌였기에 그러한 태도가 당연했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서 아리아드를 예리하게 내려 보는데.

“저번 일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고 싶어서 불렀어요. 화해해요, 우리.”

생각지도 못한 말에 켈리의 눈이 커졌다.

켈리는 이틀 전 일을 회상했다. 자신은 명백히 선 넘는 말을 했었다. 뇌를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나온 우발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니 마땅히 사과해야 하는 쪽은 본인이었다.

그런데 아리아드 피어슨의 뜬금없는 사과라니. 쓸데없는 치기를 부리다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저번에 켈리 양과 대화를 하고 생각이 참 많아졌어요. 저도 주변에서 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알아요. 켈리 양이 했던 말 중에 틀린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괜히 사람이 찔리면 더 화를 낸다고, 저도 잠시 욱해서 죄 없는 쿠키를 던진 거죠. 그건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켈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침대 모서리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었다.

소희는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푸른 눈빛에 깃들어 있던 적대감이 조금 가신 것 같아지자 세워 놓았던 계획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목에 상처가 더 많아지셨네요.”

뜬금없는 말에 켈리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켈리는 제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기다란 머리카락을 넘겨 목선을 가렸다.

“신경 쓰실 거 없어요. 사과하시려고 부르신 거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바쁜 일이 있어서….”

“유레시아 부인을 잘 알아요.”

상처의 이유를 정확히 집어내는 말에 돌아서려는 켈리의 발걸음이 세워졌다.

“자신의 두 딸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죠. 특히 켈리 양이 더 빛난다면 부인의 화는 두 배가 될 테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유레시아 공작께서 황후 폐하의 총애를 받는 켈리 양에 대해 칭찬을 한 것으로 알아요. 그것 때문에 또 학대를 당하셨을 테고.”

소희는 소설 속 사건의 순서를 기억해 내다가 켈리의 상처를 보고 대강 짐작해 나갔다. 그리고 켈리의 낯이 점점 굳어 가자 자신이 짚은 사건이 정확히 얼마 전에 벌어졌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아세요?”

“유레시아 부인께서 누군가와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밖에서 하고 다니신다고요?”

여전히 불쾌감으로 좁혀든 켈리의 미간을 보며 소희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 보니 지체 높은 귀족이 제 손버릇이 안 좋다는 단점을 저 스스로 동네방네 이야기하고 다닐 일은 없을 텐데.

제 이야기의 신빙성이 살짝 떨어지는 듯 하자 소희가 대충 둘러 댔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얼마 뒤에 켈리 양한테 엄청 난감할 일이 생길 거에요. 그게 무슨 일인지도 제가 엿들어서 알고 있어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저의가 대체 무엇인가요?”

“저도 켈리 양을 도와 드릴 테니 켈리 양도 저를 좀 도와주세요.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제 정보가 켈리 양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해요.”

이런 게 바로 상부상조라며 소희가 내심 제 계획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물론 파란 눈망울에 깃든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했지만.

“저를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소희는 다시 간절하게 호소했다.

* * *

방 앞에 시녀를 따돌릴 수 있었던 건 켈리와 온실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진다는 명분이었다. 아리아드를 감시하는 역할의 여자는 그렇게 다과를 준비하러 떠났다.

집무실은 아리아드의 방보다 한 층 위에 있어 소희는 켈리의 부축을 받아 급히 올라갔다. 수행 비서와 호위 기사들도 조슈아와 동행했는지 다행히도 복도는 조용했다.

“종이만 찾아서 태우면 된다는 거죠? 그런데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들킬 일은 없어요. 저만 믿으세요.”

어차피 회의가 끝나려면 한 시간이나 더 남았고, 서류야 이미 위치를 알고 있으니 태워 없애는 건 손쉬웠다.

없애고 나서 혹여 의심을 살 수도 있겠지만, 켈리와 함께 티타임을 즐겼다는 확실한 증거를 만들 것이니 의심은 심증으로만 남을 것이다.

잘게 떨리고 있는 켈리의 손가락이 집무실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테이블 쪽으로 가죠.”

소희의 말과 함께 그들은 이동했다.

제일 먼저 잡은 건 이틀 내내 집무실에 안겨 있으며 봐둔 은색 지포 라이터. 진갈색 가죽 의자에 풀썩 앉아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다행히도 종이 몇 장이 그대로 있었다.

소희가 서류를 들어 그대로 불을 붙였다.

“으악, 뜨거!”

불꽃이 손등에 와 닿자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가 활활 타오르자 켈리가 기겁했다.

“아니, 그걸 그렇게 태우시면 어떻게 해요!”

켈리가 테이블 구석에 있던 스테인리스 재떨이를 그녀의 앞에 밀어 넣었다. 그곳에 다급히 종이를 던진 소희가 테이블 위에 먹다 남긴 차를 부었다. 그러자 그제야 절반 넘게 탄 종이의 불길이 잦아들었다.

소희가 다 타 버려 검은 재만 남은 재떨이를 들었다. 그리고 바퀴가 달린 의자를 뒤로 질질 밀어 창가에 도착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맑은 빛이 쏟아지는 공기 중에 그것을 흩뿌렸다.

“좋아! 내가 해냈다!”

행복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 때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네, 이제 나가서 이야기해요.”

“지금 해 주시겠어요? 저에게 곧 닥칠 엄청 난감한 일 말이에요.”

앞에 있는 여인의 눈매가 불신으로 가늘어졌다. 당장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소희를 버리고 나가버릴 것 같은 눈치였다.

소희가 괘종시계 속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조슈아가 오기까지 시간은 넉넉히 남아 있었다.

“저녁 식사 직전에 책상 세 번째 서랍을 매일 확인하세요.”

“…네?”

“그 서랍에 유레시아 부인이 값비싼 보석을 넣어 둘 거에요. 더 말하지 않아도 그로 인해 켈리 양이 어떻게 곤란해질지는 알고 있겠죠?”

소희는 자신이 적어 둔 소설 속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정확한 일시를 기록해 둔 적은 없으니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정보였다.

“제가 들은 정보는 이게 다예요.”

켈리는 그 말에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잠시 생각에 빠진 모양새였다. 그러나 결국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레시아 부인이 켈리의 방에 제 물건을 넣어두고 도둑으로 모는 짓은 어렸을 때부터 가끔씩 해왔으니까. 그것으로 제 학대를 정당화하는 유레시아 부인의 면모를 켈리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서랍은 잠겨 있는 걸요.”

“열쇠를 찾는 일이야 어렵지 않겠죠. 특히 도둑으로 몰려면 잠겨 있는 곳에 넣는 게 확실할 거고. 이번 일이 벌어진다면 켈리 양은 유레시아 공작 앞에서 완벽하게 도둑으로 몰릴 거에요.”

켈리에게 화를 내려고 방법을 만들어 낼 때마다 도둑으로 모는 짓이야 일상이었다. 하지만 일개 부인의 놀이에 유레시아 공작까지 개입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소희가 알고 있는 한, 그들은 손버릇이 나쁜 딸을 교육한다는 목적으로 유레시아 저택 안에 한동안 가둬 둘 것이다. 그것은 괴롭힘에도 목적이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황후 폐하와 친목을 쌓는 켈리의 행보를 막기 위함이었다.

마치 미래를 보는 듯 상황을 읊는 소희의 태도에 켈리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이 말을 믿어야 할까.

마주한 파란 눈망울에서 고민하는 기색이 읽히자 소희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믿어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매일 식사 후에 서랍을 확인하는 일이 어려운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방금 태우신 종이는 대체 뭔가요? 왜 이렇게까지….”

소희가 곁눈질로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해….”

야속하게도 그 뒤에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집무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당황스러워 흔들리는 네 개의 눈동자가 한곳으로 쏠렸다.

종이가 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방에 주인이 들어섰다. 붉은 눈동자가 그 둘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메이컨, 손님을 방 밖으로 모시세요.”

“…아, 네.”

조슈아의 옆에 서 있던 메이컨이 두 명의 여자를 보고 굳어 섰다가 문고리를 고정시킨 상태로 켈리를 응시했다.

몸을 잘게 떨던 그녀가 조슈아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방 밖을 나섰다.

멀어져 가는 등을 소희가 아련하게 바라봤다.

제발, 나도 같이 가.

“어… 나도 나가야겠당. 하하.”

의자에 앉아 있던 소희가 살아남기 위해 걷지도 못하는 다리를 본능적으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휘청거리며 테이블 모서리를 잡았다가 그냥 기어서라도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닥에 엎드리려던 찰나.

조슈아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철컥.

방문이 무심히 닫히고 그렇게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한쪽 손은 서류가 쌓인 테이블 위에, 한쪽 손은 소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조슈아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여기서 네가 뭘 했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