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8화 (18/120)

Chapter 18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소희는 빵빵해진 배를 더듬었다. 그리고 침대 헤드에 기대 서류를 넘겨보는 조슈아를 찬찬히 훑었다.

사랑하는 여자한테는 모든 걸 다 내줄 것처럼 헌신적인 남자.

이보다 더 완벽한 남자가 어디 있냐 싶겠지만, 모든 걸 쏟아붓는다는 건 배신감을 느끼게 됐을 때 그 화가 몇 배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다른 말로, 데온의 아이를 가진 걸 알게 되면 얼마나 큰 후폭풍이 들이닥칠지 아찔했다.

이대로 쭉 친절하기만 했으면.

간절함을 담아 기도를 올리다가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봐.”

“음.”

잠시 할 말을 고민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냥 좋아서.”

네가 친절한 게 너무 좋아. 영원히 아리아드에게 친절해 줘. 내 소설을 위해.

진실 된 뒷말은 꿀꺽 삼킨 채 대충 얼버무린 말이었다.

그런데 가볍게 던진 대꾸에 엉뚱한 사람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조슈아는 두 눈이 조금 커진 채 소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말들이 조슈아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갑작스레 마주한 눈빛에 열기가 서리자 부담스러움에 슬그머니 눈을 피할 뿐이다.

“음, 자야겠군.”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자 조슈아가 협탁 위에 서류를 내려놓고 같이 누웠다. 그리고 스탠드 불을 꺼 주었다.

이내 옆에 누운 소희를 어제와 같이 끌어안았다. 귓가에 살짝 잠겨 갈라진 목소리가 깔린다.

“다시 말해 봐.”

“…뭘?”

정자세로 곧게 누워 있던 소희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장난기가 서린 얼굴이 보였다.

“조슈아는 내 거야, 그 말.”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소희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병 주고 약 주기가 특기인 남주는 소희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아니, 갑자기 무슨.”

“그냥 또 듣고 싶어서. 뭐라 그랬더라. 내 거 탐내지 마, 였나.”

“…제발 멈춰.”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는데 도가 튼 인간이다. 자신이 켈리한테 한 말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들으니 부끄러움이 배가 됐다. 내가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니.

눈을 질끈 감자, 조슈아가 픽 웃다가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에 속이 또 간질거린다.

“아리아드.”

부드럽고 느릿한 어조는 고운 선율이 흐르는 듯했다. 한소희를 부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남의 이름에 제 가슴이 설레었다.

“나도 이제 네 어장 속 물고기로 인정해 주는 건가.”

소희가 감았던 눈을 떴다. 마주한 눈망울은 강물에 붉은 석양이 내려앉은 듯, 제 마음을 가득 담아 출렁인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

“어장 속 물고기가?”

“응, 네 물고기 할래.”

잔잔히 이어지던 감미로운 말들이 짙은 소유욕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그 어장에 아무도 없을 거야. 내가 다 잡아먹을 거거든.”

그리 말하며 어여쁜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저리 천진하게 웃으면서 무섭게 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특히 저 말이 무엇보다 진심임을 알기에 팔에 솜털이 일었다.

“어후, 나는 너밖에 없어. 엉뚱한 사람 잡아먹지 마.”

괜히 잘못 엮였다가 생뚱맞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까 둘러댄 말이었다. 그에 살짝 느슨히 풀려 있던 팔에 힘이 실렸다.

굵은 팔이 소희를 꽁꽁 감싸 안았다.

“그래, 믿어.”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볼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소희는 그의 달콤한 말과 행동들에 안도했다. 이대로 믿음을 주면 데온이 죽는 일도 없겠지.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느꼈다.

그렇게 안심하며, 어느새 익숙해진 따스한 품에서 눈을 감았다.

* * *

모든 이가 잠든 시간. 풀벌레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새벽녘에 깨어 있는 이들이 있었다.

조슈아가 새근새근 자는 아리아드를 내려 보다 조심스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위로 도톰한 이불을 단단히 덮어 주었다.

스탠드 옷걸이에 걸어둔 재킷을 걸치고 방문을 나서자 그 앞에는 메이컨이 대기 중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기사 열 명을 추려 대기시켜 놨습니다.”

“수고했어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는 주인의 뒤를 메이컨이 쫓았다.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궁궐 앞,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

“필트모어 저택으로 출발하죠.”

대기시켜 놓은 말 위에 조슈아가 가볍게 올라탔다.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가을의 마지막을 알리는 찬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고삐를 단단히 잡고 빠르게 속력을 낼수록 선연한 기억들이 날카로이 머릿속에 맴돈다.

아리아드의 몸 위에 올라탄 데온.

그 여자의 모든 것이 탐날수록 여유로웠던 마음은 사그라졌다. 처음 느껴 보는 초조함.

깊어지는 소유욕 끝에 결국 드는 생각은.

“더 빨리 죽이고 싶어졌어.”

중얼거리는 스산한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흩어졌다.

소희의 행동들은 제 바람과는 다르게 시놉시스의 사건을 더욱 앞당기고야 만다.

* * *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다.

남자의 한결같은 달콤한 행동들.

씻겨 주고, 이마에 약을 발라 주고, 다친 다리와 팔에 얼음찜질을 해 주고, 아침을 직접 먹여 주고, 결국 그렇게 품에 안긴 채 집무실에 함께 앉아 있었다.

종잇장이 팔랑이자 자장가처럼 또 꾸벅꾸벅 졸았다.

밤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잘만 잤는데 왜 이렇게 피로한지, 조슈아의 품에 안겨 잠만 늘어나는 느낌이다.

그렇게 나른한 오전을 보내고 있을 때 즈음.

“아이고! 아이고! 저하!”

익숙한 이의 통곡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찌나 절절히 불러 대는지 소희는 잠이 달아나 반짝 고개를 들었다.

“…뭐야?”

그에 조슈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다시 자.”

그가 왼손으로 부드럽게 소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가슴에 기대게 했다. 동시에 우렁찬 통곡은 시작됐다.

“저하! 제발 한 번만 만나 주십쇼! 억울합니다, 저하!”

그와 함께 노크 소리가 울리고 메이컨이 들어왔다.

“저하, 죄송합니다. 정리해서 내보내겠습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울부짖던 남자가 꾸역꾸역 얼굴을 들이밀었다. 초인적으로 버티는 힘이 어찌나 거센지 붙어 있던 기사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저하! 잠시면 됩니다! 정말 아주 잠깐만 시간 좀 내주세요!”

문틈 사이로 소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반델리였다.

그녀는 남자의 정체를 깨닫자 그가 왜 이러는지 단번에 알았다. 황태자를 암살 시도했다는 누명을 쓴 억울함에 직접 조슈아를 찾은 것이다.

이 남자가 직접 꾸민 일인지도 모르고. 불쌍한 반델리.

“죄송합니다.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반델리를 밀어내며 메이컨이 급하게 나가려고 했다.

한 손으로 찻잔을 들어 입에 머금은 남자가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선명한 소리에 메이컨이 고개를 돌렸다.

“됐습니다. 응접실로 모시세요.”

그의 말에 눈이 커진 메이컨이 곧바로 허리를 숙이고는 복도 오른쪽으로 반델리를 끌고 갔다.

무슨 생각이지? 소희도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시로 일관할 줄 알았더니 친절히 상대를 해 주겠다니.

조슈아가 일어나 푹신한 의자 위에 소희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조금만 기다려.”

그리 말하고 잔머리를 정리해 주는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집무실을 비우자 의자 쿠션에 몸을 기댔다.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났고 심심함에 괜히 앞에 놓인 서류들을 뒤적였다. 그리고 그가 마셨던 찻잔을 들어서 차도 한 모금 머금었다.

옅은 바닐라 풍미가 도는 캐모마일 차였다.

“오호, 맛이 나쁘지 않군.”

단 걸 유독 좋아하는 어린이 입맛임에도 썩 괜찮았다.

“흠, 소설이 계획했던 대로 순조롭게 풀리고 있어서 그런가.”

그래서 뭐든 달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소희가 케이팝을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을 찬찬히 만졌다. 괜히 아래 놓인 서랍도 열어 물건들을 살폈다.

첫 번째 서랍, 두 번째 서랍, 세 번째 서랍.

하나하나 열었다 닫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소희가 일순 굳어 섰다. 흥겹던 멜로디가 멎었다.

“…뭐야.”

스치듯 봤던 단어에 눈을 끔뻑였다.

닫았던 세 번째 서랍을 다시 열었다. 그 맨 위에 있는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서쪽 광산 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귀족들의 이름이 담긴 종이였다. 별반 다를 거 없는 서류처럼 보여도 그 아래 적힌 명단과 찍힌 인장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데온 필트모어, 반델리 포티어스, 루피안 피어슨…. 뭐야 이거.”

필트모어 가문, 포티어스 가문, 피어슨 가문.

반역죄 명단에 올라 목이 잘려 죽는 세 가문의 이름이었다.

* * *

응접실 중앙에 놓인 원형 테이블 위로 시녀들이 다과를 준비해 왔다.

반델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앞으로 조슈아가 느릿하게 걸어와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았다.

“저하!”

인기척에 반델리가 고개를 빠르게 들었다. 그리고 소파와 테이블, 그 좁은 틈에 덜컥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런 남자에게 붉은 눈망울이 느긋하게 닿았다.

“오해십니다. 저는 사람을 시켜 저하를 죽이라고 명한 적이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처량한 가락을 띠었다.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건너편에 앉은 조슈아는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삼키고는 한참 뒤에야 벌벌 떠는 이 앞에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붙어 있던 사람은 어찌 설명할 거죠.”

부드럽지만 강한 어투. 높낮이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반듯하게 꽂히자 반델리가 바닥에 머리가 닿을 듯 더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사람을 붙인 것은 맞으나, 나쁜 뜻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정말이지, 저하께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반델리. 그 마음 충분히 알아요.”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반델리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서 그를 마주했다. 핏빛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설핏 웃고 있었다.

“아신다니….”

“그래서. 재판장에 서서도 그리 말씀하실 겁니까? 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몰래 사람을 붙여 놨다, 나쁜 뜻은 아니었다.”

그 눈동자에 묘한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그에 오싹해져 반델리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러면 그걸 듣는 사람들이 아, 그대가 진정 충성심이 강한 인간이구나, 그럴까요?”

“…저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울먹거림이 응접실을 흔들 정도로 커다랬다. 그리고 반델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전보다 더 깊게 숙인 탓에 땅에 쿵, 머리를 박았다. 그럼에도 형편없이 흔들리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염치없지만 용서를 구합니다. 죄송합니다.”

“전 그대 마음을 충분히 압니다. 사죄는 그만 하세요.”

“그렇다면… 용서를 해 주시는 건지….”

흐릿한 질문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툭, 툭, 툭. 기다란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반복적으로 치는 소리에 반델리는 제 명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용서라.”

“….”

“남의 돈을 백만 파운드 떼먹는 사람을 향한 용서라면 이미 충분히 했습니다. 그대의 그 보잘것없는 땅과 교환하지 않았습니까.”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가 마른침만 삼켰다. 위압감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에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용서. 당신이 심어 둔 심복을 향한 용서도 했습니다. 나를 위한다지만 결국 감시를 위한 용도였다는 걸 알아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조슈아가 기댔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반델리 곁으로 걸어갔다.

차갑게 식은 구두코가 창백하게 질린 손가락 위에 닿았다.

“다만, 반델리.”

위에서 그 구두코만큼이나 시리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이 일은 그대가 비는 용서랑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잘게 떨려오던 반델리의 머리가 더 심하게 후들거렸다.

“그대가 나보다 더 존경한다는, 데온 필트모어.”

말을 이어 가는 조슈아의 목소리에 점차 묘한 웃음기가 섞였다.

“그 남자를 원망하세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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