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7화 (17/120)

Chapter 17

창밖에 어둠이 찾아왔다.

테이블 옆, 벽면에 붙어 있는 조명 하나만이 방 안을 밝혔다. 어슴푸레 보이는 빛에 소희가 눈을 떴다.

“…뭐야.”

분명 잠들기 전에 오전이었는데 눈을 뜨니 초저녁이라니.

충격에 빠져 중얼거리는 소리에 조슈아는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놨다.

“깼어?”

시간도 충격적이긴 했지만, 진종일 자신만 안고 있던 조슈아에게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아니, 깨우지….”

“너무 잘 자길래. 코도 골던데.”

장난스럽게 픽 웃는 남자를 올려 보며 잔뜩 흘겼다.

그러고 보니 복부에 상처도 있어 안고 있는 게 쉽지도 않았을 텐데.

“상처는 안 아파?”

“별로.”

“셔츠에 피가 이렇게 묻었는데?”

소희가 혈흔이 묻은 자리를 더듬자 조슈아가 그 보얀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살짝 터진 거야. 괜찮아.”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말에 남자가 실로 대단해 보였다. 남자주인공이라 고통에도 무디고 체력이 좋은 건가, 놀라울 따름이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조슈아의 모습을 엿보며 감탄하고 있는 와중.

꾸르륵, 하고 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필이면 적막이 찾아온 와중에 울린 소리는 귓가에 너무도 크게 틀어박혔다.

“배고플 때가 되긴 했지.”

심상한 어조였지만 입가에는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배가 고픈 거면 다행이게.

꾸르륵, 또 유난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소희는 지나치게 멀쩡한 의식으로도 눈앞이 하얘지는 순간을 경험 중이었다.

그저 배가 고픈 줄 알고 소희를 안아 올리려는 남자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재킷이 흘러내려 떨어졌다.

“나….”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걸 조슈아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니까….”

조각상같이 잘생긴 남정네 앞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똥 마려.”

개망신이다 진짜.

안절부절못하는 소희 위로 낮은 웃음이 내려앉았다. 키득거리며 웃던 남자가 지체 않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걸 그렇게 긴장감 있게 말할 일이야?”

“하….”

죽고 싶어졌다.

소희는 얼굴이 벌게져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 위로 계속해서 웃음소리가 들리다가 조슈아는 그녀를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 친절히 변기 뚜껑까지 열어 주는 손길에 수치심은 가증되었다.

“…아주 고맙다.”

목 끝까지 시뻘게진 얼굴을 구경하다가 조슈아가 피식거리며 문을 닫고 나가 주었다.

옆에 계속 같이 있어 달라 했던 과정 중에 이런 수치스러운 부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냥 조슈아를 인간 휠체어 정도로 생각하면 창피함이 덜 하려나.

“잘 나와?”

문밖에 서 있는 건지 짓궂게 건네는 말에 소희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나 변비 생길 거 같아…. 십 분만 멀리 가 있어 봐….”

그 말에 키들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말은 참 잘 듣는 휠체어라 다행인 거 같다며, 소희가 애써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했다.

* * *

소희는 창피함에 힘이 쭉 빠진 채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러나 저녁 식사가 마련된 온실 정원에 들어서자 기운을 되찾는 건 순식간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코끝까지 들어차자 배고픔에 위가 아우성쳤다.

조슈아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로 의자에 앉았다.

“이러고 먹게?”

“어렵지 않지.”

아무리 사랑의 힘이라지만, 이런 현실성 없는 남자를 봤나. 소희는 문득 아리아드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하얀 식탁보 위에는 전채부터 디저트까지 코스별로 준비되어 있었다.

시녀가 와서 중앙에 있는 장식용 촛대에 불을 붙이자 그림 같은 음식들이 더욱 찬란히 빛났다.

“뭐 좋아해?”

담백하게 묻는 질문에 소희는 하나하나 대답했다.

새우, 로제 파스타, 안심 스테이크, 오렌지 주스, 마카롱, 딸기 생크림 케이크.

조슈아는 그녀가 말하는 순서대로 음식을 앞에 놓아 주었다. 왼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오른손으로 포크를 들어 직접 먹여 주기까지 했다.

또 몇 번 해 봤다고 내성이 생긴 건지 소희는 입을 벌리고 신나게 받아먹었다.

그렇게 포만감이 차올랐을 때.

“너는 안 먹어?”

먹여 주느라 바빴던 그를 쳐다보며 그제야 물음을 던졌다.

“먹고 있어.”

거짓말.

그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걸 본 건, 소희에게 샐러드를 주려고 시도했다가 거부당하고는 그걸 제 입에 넣은 순간밖에 없었다.

“새우 먹어 봐. 버터가 듬뿍 스며서 진짜 맛있어.”

“난 해산물 안 좋아해.”

그녀의 권유에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짜 놓지도 않은 설정인데 그 안에서 다들 주체적이기도 하다.

앞에 놓인 새우를 손가락으로 그냥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입 앞에 갖다 댔다.

“진짜 맛있다니까? 한 번만 먹어 봐.”

반짝이는 눈망울을 조슈아는 아무 대답 없이 한참을 내려 봤다. 그리고 망설이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소희는 그 안에 새우를 밀어 넣었다.

“어때, 맛있지.”

기대감에 찬 눈빛을 보며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소희는 마카롱을 베어 물고는 또 조슈아의 입가에 남은 것을 들이밀었다.

“이것도 맛있어.”

그가 단 걸 싫어하는 건 직접 짜 놨던 설정이라 잘 알고 있었지만, 이 맛을 꼭 알려 주고 싶은 욕심이었다.

싱긋 웃으며 음식을 건네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눈빛이 오래도록 닿았다.

쳇, 안 먹으면 말고.

소희는 그것이 거절인 줄 알고 입술을 삐죽이다가 남은 마카롱을 입안 가득 넣었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던 조슈아가 불쑥 고개를 숙였다.

비스듬히 내려온 붉은 입술의 정착지는 그녀의 입술 위였다. 뜨거운 혀가 앵두 빛 입술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열심히 움직이던 그녀의 하관이 갑작스러운 감촉에 멈춰 섰다.

“…뭐, 뭐야.”

놀라 더듬거리는 그녀와는 다르게 이상한 짓을 한 남자는 정작 별 반응이 없다. 새빨갛게 물든 귓불을 쓰다듬다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읊조렸다.

“맛있네.”

“…내가 마카롱을 먹으랬지! 어?”

“마카롱 먹은 건데. 네 입술에 붙어 있던 거.”

덤덤한 말 뒤에 피식 웃음을 흘린다.

소희는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남자를 흘겼다.

또, 또 장난질.

“으, 진짜 짜증 나.”

그 위로 내려앉은 웃음소리가 그래도 싫진 않았다.

저녁 식사가 마련된 테이블 주변으로 화려한 장미들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나무 기둥을 타고 반짝이는 크리스털 오너먼트와 이 모든 걸 안고 있는 유리창.

그 유리에 반사되어 비춰지는 따스한 풍경을 소희는 눈에 담았다.

포만감으로 나른해지는 몸과 자신을 안고 있는 커다란 남자까지. 이 모든 게 좋았다.

역시 아리아드가 너무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그 만족스러운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때,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구나.”

황후인 비앙카 매킨리의 목소리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옆엔 켈리도 함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식사를 같이하는 거였는데.”

어우, 소희는 생각만 해도 불편해 몸서리쳤다. 자신이 행했던 만행을 떠올리며 켈리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뒤에 위치해 있던 시녀들이 들고 있던 간이 테이블을 폈다. 그 위에 티타임을 위한 준비들이 한창이었다.

왜 꼭 자리도 이렇게 마주 보고 앉는 건지.

“조슈아, 그런데 말이다. 보기가 좀 흉하구나.”

비앙카가 조슈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리아드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보는 시선도 많은데 품위를 지키는 게 좋지 않겠니.”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분명 조슈아의 이름을 부르며 한 말이었지만, 비앙카의 눈초리는 온통 아리아드를 향해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경멸이 너무도 잘 읽혀 소희는 눈을 피했다.

그에 조슈아는 별 대답을 하지 않다가 불쑥 소희의 입에 마카롱을 넣어 주었다.

이내 읊조리는 말이 무덤덤하다.

“식사를 누구 보여 주려고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찻잔을 들어 입술에 붙였던 비앙카가 실소를 했다.

한 점에서 맞부딪혀 있던 시선들이 흩어졌다.

비앙카와 켈리는 온실 정원에 핀 식물에 대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비앙카의 시선은 두 남녀를 향했다.

건너편에 앉은 이들은 다시 먹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긴장감 있던 분위기를 잊고 마카롱을 입에 물고는 소희가 즐겁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내 발끝까지 전해진 달콤함에 붕대를 두른 두 다리가 가볍게 흔들린다.

그 위에서 조슈아가 그런 여자를 내려 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두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다.

“하.”

비앙카가 다시 실소를 터트렸다.

“단단히 미쳤구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켈리는 반문하지 않았다.

그 예리한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 *

비앙카는 제 아들의 정신 나간 행동을 견디지 못하고 온실 정원에서 빠져나왔다. 그 뒤를 켈리가 뒤따랐다.

선선했던 바람결이 해가 지자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켈리가 얇은 겉옷을 여몄다. 그럼에도 시린 것이 피부인지 다른 곳인지 아리송했다.

“…아리아드 님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비앙카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미간이 제대로 구겨졌다.

“안 좋아하다 뿐이겠니? 난 그 아이를 아주 혐오한단다.”

그 칼날 같은 대답에 켈리는 왜인지 모르게 안도했다. 자신이 그녀를 미워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판단과 함께.

“어떻게 자란 귀한 아들인데, 그런 여우 같은 애한테 홀려서는. 진짜 요즘 내 속이 말이 아니란다, 켈리.”

제 심정을 토로하는 비앙카의 말을 가만 귀 기울였다. 그녀의 심정이나 켈리의 심정이나 조슈아를 보면서 타들어 가는 속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황제 폐하께서 이어 준 정략결혼부터가 잘못됐지. 피어슨 가문이 하는 사업들과 그 땅 규모가 뭐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다만, 난 물질에 팔려 가는 것 같은 조슈아의 처지가 참 딱하다고 여겼어.”

귀족들의 상황은 모두 비슷했다. 그들의 부와 명예는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거래된다. 그 안에서 진실 된 사랑을 하는 자가 몇 명이나 될지.

비앙카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조슈아가 참 착했지. 별말 없이 폐하의 뜻을 따르더구나. 아니, 난 착한 아들인 줄로만 알았어. 그래서 아리아드가 천박한 짓을 하고 다닐 때 이혼을 권유할 생각이었단다.”

앞만 보고 걷던 그녀의 눈길이 켈리를 향했다.

“난 켈리 네가 참 마음에 들어. 강요는 아니긴 하다만, 내 두 명의 아들 중 한 명과 결혼을 시키고 싶구나.”

두 명의 아들.

선연히 그려지는 다른 한 명의 얼굴에 켈리가 몸을 떨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에 그걸 잊고자 가볍게 고개를 저어 털어 냈다. 그리고 다시 비앙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기 황제로 조슈아가 내정되어 이야기가 나오고 있단다. 난 그 옆자리에 네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 말씀은….”

“내가 도와줄게, 켈리.”

켈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커다래진 파란 눈동자에 ‘도대체 어떻게요?’라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와 함께 비앙카의 걸음도 멈춰 섰다.

“그래 봤자 겨우 정략결혼이잖니. 필요를 다하면 내쳐지는 관계란다.”

단호한 말투와 함께 날 선 바람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피어슨 가문의 힘을 약화시키고 너희 가문에 힘을 실어 주마.”

그 강고함에 시리기만 했던 심장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망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조슈아의 옆자리, 곧 황후가 될 황태자비.

불가능하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그려지자 켈리가 다시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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