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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6화 (16/120)

Chapter 16

“나랑 지금 하자. 하고 싶어.”

한동안 침묵뿐이었다. 소희는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있었기에 그 표정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도발이 틀어질 일은 없다고 여겼다. 왜냐, 이 남자는 아리아드의 몸에 아주 단단히 미쳐 있었기 때문에.

제 몸을 희생해서라도 전개를 조금 늦출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려 했다.

그런데.

“…미쳤어?”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예상했던 핀트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소희가 눈을 끔뻑이며 팔의 힘을 살짝 풀어 남자의 표정을 확인했다.

조슈아가 한쪽 눈썹을 크게 치켜올린 채 그녀를 내려 봤다.

“왜 그래.”

“…어?”

“아픈데 무슨 소리야. 걷지도 못하면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커다란 손이 가볍게 닦아 냈다. 소희는 예상치 못한 발언에 놀라 계속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다 나으면 하자. 하고 나면 샤워도 해야 돼서 안 돼. 열 날 수도 있잖아.”

“아니, 아니. 이게 아닌데.”

네가 대체 언제부터 아리아드의 몸 앞에서 이렇게 이성적이었니.

소희는 당황스러워 콧김을 거칠게 뿜어 댔다.

조슈아가 그녀의 팔을 가볍게 풀었다. 그리고 구석에 놓여 있던 타월을 꺼내 굳어진 그녀의 얼굴 위에 덮었다.

수건에 시야가 가려진 채로 웅얼거렸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오늘이어야 해. 꼭 오늘이어야 한다고.”

거머리 작전 돌입.

“오늘… 읍.”

커다란 손바닥이 수건 위를 내리눌러 소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물기를 닦아 내는 것치고는 손가락이 좀 거칠게 얼굴 위를 짓누르며 돌아갔다.

“읍!”

팔을 휘적거리자 그제야 그 손이 떨어졌다. 수건이 없어져 펼쳐진 시야 앞에 조슈아가 빤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나지막한 말 뒤에 소희를 들어 올렸다.

젠장, 작전 실패다.

그의 왼팔에 안겨 욕실을 빠져나가면서 낙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조슈아가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자마자 다시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허리가 펴지지 못하고 깊게 숙여졌다.

“사실 혼자 있으면 나 너무 외로워.”

몸의 유혹이 통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유혹으로 가면 되지.

동정심 유발 작전이다.

“내가 사실 애정 결핍이 심하거든. 다른 남자들을 만나러 다닌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하지만 사람들을 아무리 만나도 채워지지 않는 이 갈증.”

일부러 귀에 대고 훌쩍였다. 물론 콧물이었다.

“너도 봐서 알지? 자살 시도 하는 거. 우울증에 막 갑자기 그렇게 정신을 놓는다니까?”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소희는 불안감에 더 열심히 입을 털었다.

“혼자 있으면 계속 그래. 자꾸 창밖을 보게 되고. 아, 여기는 창살을 달아 놔서 뛰어내리지는 못하지만. 그래서인지 혼자 있으면 혀를 잘근잘근 씹게 되더라고. 이러다가 혀를 세게 씹고 죽는 건 아닌지 몰라.”

귓가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슬슬 작전이 들어 먹히는 분위기에 소희가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 조슈아를 바라봤다.

허리를 편 남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내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에 최대한 아련한 눈빛을 만들었다.

“그래서 결론은, 내 옆에 있어 줘.”

“옆에 있잖아.”

“아니, 하루 종일.”

“뭐?”

“일주일 정도만.”

일주일이면 이 두 다리가 다 나으려나.

“이 주면 더 좋고.”

눈망울에 최대한 눈물을 끌어모으며 앞에 있는 남자를 애절하게 바라봤다.

조슈아가 손목에 두른 시계를 한 번 살피고는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팔짱을 꼈다.

“나랑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외로운 게 좀 괜찮아져?”

“당연하지.”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재빠른 대꾸에 그의 고개가 더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왜? 날 안 좋아했잖아.”

소희는 말의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더 빠르게 답했다.

“이젠 좋아.”

“…뭐?”

“이젠 네가 너무 좋아.”

오묘한 표정을 띤 남자 앞으로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었다.

소희가 조슈아의 얼굴을 덥석 잡고 제 앞으로 끌고 왔다. 얕은 힘에도 그는 순순히 끌려왔다.

그리고 서로 숨결이 느껴질 거리에서 한참을 마주한 끝에.

쪽, 아리아드의 입술이 그의 붉고 도톰한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말캉한 감촉에 조슈아는 그대로 굳었다. 까만 속눈썹이 잘게 떨리며 눈이 커진 채였다.

“내 옆에 있어 줘. 부탁이야.”

가녀린 목소리를 내며 소희는 확신했다.

됐다, 됐어. 데온을 살릴 길이 보인다.

“일도 내 옆에서 해. 일주일, 아니, 이 주면 더 좋고.”

그에 조슈아가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심해를 담은 듯 깊고 느리게 일렁였다.

제 성공을 확신하며 소희는 싱긋 웃었다.

그렇게 다 된 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가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빠르게 등을 보인다.

“…뭐야! 어디 가!”

다급한 언성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일정을 바꿔야지. 옆에 있어 달라며.”

느릿하고 차분한 어조에 소희가 눈을 끔벅였다.

“같이 갈래?”

다정한 물음에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가 허리를 굽혀 다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시원한 민트 향이 코끝까지 스몄다.

가볍게 방을 빠져나가는 발걸음을 느끼며 소희는 그의 목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어조가 심장을 간질인다.

“몸이 나으면 매일 해 줄 게. 우울증이 올 겨를도 없게.”

한결 더 자상해진 것 같은 태도에 온몸의 세포가 팔딱거렸다. 소희는 자신이 한 행동도 잊은 채 부끄러움에 괜히 더 고개를 깊이 묻었다.

* * *

메이컨은 궁내부 소속 비서로 매킨리 황실을 위해 삼십 년을 넘게 일해 왔다.

모든 귀족들의 정점에서 수백 년을 버티고 있는 매킨리 가문 사람들은 태생부터 고결했다.

손짓 하나에도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지배자. 그런 조슈아 매킨리 곁을 지키면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그는 잠시 생각을 비웠다.

“메이컨, 듣고 있나요.”

주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자 놓았던 정신을 빠르게 잡았다.

“아, 네. 일정을 언제로 변경하면 될까요.”

차분히 말을 이어 가면서도 메이컨은 제 눈을 의심했다.

평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복장에 커다란 오류들이 있었다. 포마드 왁스를 발랐지만 살짝 헝클어진 검은색 머리, 구겨진 재킷의 옷깃과 실종된 커프스단추. 구두의 스트랩도 한쪽이 풀려 있었다.

결정적으로 제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황태자의 품에 안겨있는 여자. 물론 그이가 아내라는 사실에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않냐 싶겠지만.

집무실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주인의 모습은 너무도 생소했다.

“그건….”

조슈아가 소희를 내려 봤다.

“나중에 따로 얘기하죠.”

소희는 주어가 붙어 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또한 말을 하면서도 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지도 당연히 알았다.

“알겠습니다. 오후에는 무역 사업 투자자들과 만찬이 있는데 이건 어찌할까요.”

“그것도 미룰 수 있으면 미뤄 주세요.”

소희가 대화를 듣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건 가도 되는데.”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 싸한 정적이 흘렀다. 그녀를 내려 보는 조슈아의 눈빛에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생각만 한다는 게 불쑥 튀어나온 사태에 소희는 제 입을 난타하고 싶었다.

“아, 아니야. 옆에 있어 줘.”

다급히 둘러댄 변명에 그제야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초리가 가셨다.

메이컨이 나가고, 소희의 계획대로 모든 일정이 바뀌어 조슈아는 옆에 남았다.

“이제 뭐 해?”

“일해야지.”

자신을 가만 안고 있던 두 팔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로 향했다.

하얀 종이들이 저 높이 쌓여 있는 걸 보니 소희는 괜히 어지러워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는 조슈아는 일을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종잇장이 팔랑이는 소리만 반복적으로 울렸다.

잠 속으로 자신을 안내하는 것 같은 소리에 소희는 꾸벅꾸벅 졸았다. 아무래도 긴장한 탓에 몇 시간 자지 못한 것과 흉흉한 꿈을 꾼 여파인 듯했다.

조슈아는 고개가 자꾸 까딱거리며 앞으로 쏠리는 소희를 제 가슴에 끌어안아 기대게 했다.

“좀 자고 있어. 한 시간 뒤에 점심 먹자.”

부드러운 목소리와 그에 어울리는 체취는 이내 완벽한 숙면으로 이끌었다.

* * *

해가 떨어지고 있어 창문 너머로 노을의 빛깔이 드리웠다.

조슈아는 다섯 시간 째 같은 자리에 앉아 사업 현안들이 담긴 서류를 읽고 있었다. 이내 몇 분 뒤, 그는 처음으로 제 손에 쥔 종이를 놓게 되었다.

정확히는 들고 있던 것을 놓친 것이었지만. 하얀 종이들이 땅에 떨어져 뒹굴었다.

“…추워.”

품에 안겨 자고 있던 여자가 몸을 옹송그리며 살짝 떨자, 조슈아는 그녀가 깰까 조금도 움직이지도 못했던 상체를 살짝 비틀어 의자에 걸어 놨던 재킷을 들었다.

그리고 소희의 어깨 위로 단단히 덮어 주었다.

몰려오는 온기를 찾아 그녀는 몸을 더 깊이 묻으며 너른 가슴에 뺨을 비볐다.

조슈아는 떨어진 종이를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제 품에 안긴 여자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조밀하게 자리한 기다란 속눈썹을 쓸었다.

그녀의 대한 마음을 육체적 욕망이라 정의 내렸던 것, 그것이 섣부른 판단이었다고 결국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몸만 가져도 되냐는 물음에 이제는 단호히 답할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걸 원한다고.

처음 아리아드에 대한 마음의 변화가 생겼던 건 단순히 그녀와 몸을 섞었던 날이 아니다.

필트모어 저택, 그 창문 앞에 선 여자가 화사한 햇빛을 머금고 말간 미소를 띠며 사라졌을 때.

그 순간 조슈아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데온이 사납게 소리치며 그녀를 찾으러 달려 내려갈 때도, 대리석 바닥에 다리가 박힌 듯 굳어 선 채였다.

그는 이제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난생 갈망이라고는 모르던 완벽히 가꿔진 인생을 살아온 남자. 그런 자신이 처음으로 열렬히 바라는 것이 결국엔 이 여자의 화사한 미소라니.

‘네 눈에만 예뻐 보이면 됐지.’

해사한 얼굴이 다시 눈앞에 그려졌다.

자신을 보며 어여쁘게 웃던 그녀의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이젠 네가 너무 좋아.’

선연히 맴도는 말들과 미소는 그의 앞에 끊임없이 나타났다.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는 결국 그녀의 말이 대개 진실 되지 않음을 알아챈다. 조슈아는 그럴 때마다 제 똑똑한 머리가 야속했다.

그럼에도 믿고 싶었다. 거짓된 이야기들이라고 해도 달콤하니까.

그는 결국 들끓는 제 너절한 소유욕을 인정했다.

너의 모든 게 갖고 싶어. 네가 가진 전부를.

그때 문득 튀어나온 아리아드의 목소리는 그 감정에 혼선을 주었다.

‘조슈아, 이런 친절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

‘사랑.’

아리아드의 붉은 입술을 자분자분 만지던 손길이 멈칫 세워졌다.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그건 아니야.”

조용히 중얼거리는 음성이 귓가에 맴도는 미성을 거부했다.

“…아니야.”

몇 번 되뇌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몰려올수록 아리아드를 안은 팔에 점차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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